신앙과 이데올로기, 기독교보 2005년 신년호 시론 투고

        신앙과 이데올로기
                                                유 해무
        예수님은 우리의 화해이시다. 그런데 관선이사의 파송 이유 중에는 구성원들 간의 반목이 들어있다. 반목과 질시가 이방인들의 눈에도 심각하게 비쳤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형제들이 반목하고 질시하면 남만도 못하다. 형제에게는 책임을 추궁하면서 자신의 권리만을 챙기려 하면, 분노와 증오에게 종이 되고 형제 사이는 갈라지고 만다. 하나님을 향한 각자의 믿음으로 서로 형제인 것은 틀림없지만, 관계가 이처럼 상하고 찢겨져 있다면 믿음은 어디에 있고 형제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처신이나 윤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믿음의 문제이며 하나 되게 하신 삼위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과 다를 바 없다.
        시편 133편은 기름과 이슬을 가지고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멋진 정경을 노래한다. 같은 동사로써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과 이슬이 내리는 것을 표현한다. 장자권과 연관되어 있는데,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에 아래로 차자(次子)에게도 흘러내리며, 헐몬의 이슬이 저 먼 예루살렘에까지 날려가니, 다툴 거리가 있을 수 없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면서도 배타적으로 움켜잡지 않고 옹기종기 살아가는 모습이 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권리를 가진 이가 그 권리를 제한하고, 다 쓰지 않음으로 동거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이 아름다움은 화해이신 예수님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를 뒤로 하시고 우리 중에 하나가 되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면서도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를 죄로 만드셨다(고후 5:21). 죄인들과 연합하여 동거하시려고 권리를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 포기하셨다. 이처럼 아름다운 동거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천사 12 영을 부르지 않으셨다.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와 동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동거를 위한 희생을 가장 비참한 고난인 십자가에서 치루셨다. 여기서 위 시편은 완성된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먼저 그분과 연합한 자만이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선이 아니다.
        우리의 권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기를 널리 선전하면서 권리를 찾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시대에 살고 있다. 말보다는 손이 먼저 나간다고, 과시하고 시위하는 문화가 득세하며, 여차하면 양보보다 법적인 대응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남을 가차 없이 훼손하기까지 한다. 권리를 포기한 예수님과는 무관한 이런 옛사람의 문화가 교회 안에도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침투하였다. 아무리 “성도간의 법정 소송을 개탄”하여도 이것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원통함을 풀어주실 것을 바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자!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도, 욕을 받았으나 욕하지 않았고, 고난을 받았지만 위협하지 않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 “원수 갚는 것이 네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는 명령과는 달리, 이 시대의 예수장이들은 앞장서서 재판관이 되려 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는 말씀을 순종하는 아름다운 연합과 동거를, 교회 안에서도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말하거나 변증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추호도 제국주의식의 무력행사를 지지하지 않는다. 노조운동이나 그것에 빌미를 준 기업경영 행태, 주말마다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키는 각종 집회를 보라. 익명으로 올려지는 네티즌들의 의견들을 읽어보라. 실명으로는 도무지 올릴 수 없고, 올릴 용기도 없을 법한 글들이 교계 언론의 게시판까지 뒤덮고 있다. 이런 데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이라는 경건과 믿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순간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몸소 비천한 자리에 임하시고 우리를 섬기셨다(막 10:45). 주님도 우리를 섬기셨는데, 그분 덕에 생명을 얻은 우리는 섬김만을 받으려고 하고, 권리만을 주장하려고 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 아닌가.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르지만,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에는 대의명분이 없다. 누가 과연 대의명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우리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행한 뒤에, “무익한 종이라”(눅 17:10)고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선택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고백하는 신앙인은 형제를 향한 처신에서도 대의명분을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과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외마디는 역사상 가장 처절한 무신론의 현장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죄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이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려는 우리의 어린양은 무신론의 음침한 골짜기를 진솔한 투쟁으로 빠져나와만 했다. 그러나 신앙의 내공이 없는 자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의 골짜기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진짜 무신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당하고도 미소 짓는 여유, 그것은 명분을 추구하는 자로서는 누릴 수 없는 신앙의 열매이다. 명분은 변명을 만들고, 변명은 그것을 지지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방편을 끌어들인다. 그중 하나가 ‘정치’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정치 계파는 사라져야 한다. 명분을 내세우면서 믿음과 그 기초를 허무는 책동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선택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제발 싸움하지 말고, 제발 투서 좀 넣지 말고, 제발 화해하라. 그러기 전에는 철수할 수 없다’는 책망을 들으면서, 무슨 명분으로 이방인에게 전도할 것인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까.
        개혁하고 공의를 세움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이 팽배하고 있다. 공의는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공의를 이루실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럴 때에야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골짜기로부터 해방 받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올 2005년에는 우리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게 하실 것을 대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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