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왕 예수님(기독교보 송년호 시론, 2005,12,24) 투고
2005.12.29 23:53 Edit
평강의 왕 예수님
유 해무
로마 제국이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이방풍습은 상당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354년경에 로마교황은 태양신의 출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변경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연중 해가 가장 짧아 춥고 음산한 시절에 촛불을 켜고 의로운 해(태양; 말 4:2)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면서 묵은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대비하며,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풍습이 생겼다.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실 뿐 아니라 샬롬, 곧 평강의 왕(사 9:6)으로도 오셨다.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는 천군 천사들의 찬양은 구약 말씀의 성취이다. 성경은 샬롬을 평강, 평화, 화평 등으로 번역한다.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는 비발디의 유명한 칸타타가 불현듯 생각이 난다. 실로 그러하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처처에서 일어나는 갈등, 시기, 무력 충돌, 고소와 고발 등을 보라. 사학법, 佛者임을 내세운 황 우석 박사와 관련된 진실 게임도 평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조류독감과 같은 것이 우리를 위협한다.
그런데 교회는 어떠한가?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은 교회는 진정한 평화의 도구인가? 필자는 연초에 ‘신앙과 이데올로기’로 본보의 시론을 열었다. 화해이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연합하되, 참 신앙만이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제압하고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 가운데에 연합을 찾기 힘들 뿐 아니라,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파당을 만들어 자기 권리는 변호하지만, 겸손이나 사랑의 용서는 희귀하고, 당하면서도 미소 짓는 신앙의 여유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한해를 지난 지금의 심정은 그때보다 더 착잡하다. 단적인 예가 성도간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이다. 특히 명예 훼손건이 계속 줄을 잇고 있다. 우리 가운데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는가?
우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전 3:3). 그러니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신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1:10; 2:14). 성령님은 평안의 줄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엡 4:3). 시기와 분쟁을 인하여 하나임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큰 범죄, 곧 성령훼방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주실 평안이 세상의 평안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그 평강은 세상의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곧 고난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은 무력과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빌리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상 권세의 상징인 검으로 무장하고 겟세마네로 왔다. 그때 제자 하나가 그 검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이에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고 하셨다.
평강의 왕께서는 검의 권세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가지셨다(요 10:18). 평강의 왕은 한 알의 밀알로서 죽고 살아나셔야 많은 생명을 열매로 얻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는 이렇게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행사하사, 많은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화평의 왕에 등극하셨다. 이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평강을 선포하실 수 있다(요 20:19).
바울 서신 대부분이 평강을 빌면서 시작하는데, 이 평강은 평강의 왕께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0:34). 주님 자신은 참 평화와 거짓 평화의 잣대요 갈림길이다. 참 평화는 주님 그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거짓 평화를 우리가 성령님의 평강의 능력으로 잘라내어야 참 평화가 임한다. 고난이 없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
우리 교단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분쟁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 중심에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대학교와 병원이 있다. 병원 정상화는 그 길이 멀어 보이고, 대학교도 신입생 모집이 여의치 않을 듯하다. 모름지기 이런 기관에는 성경말씀과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나온 원리가 지배해야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이 자주 세도를 부린다. ‘복음’병원이 복음 전파에 얼마나 기여를 하는지, 아니면 거침돌이 되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는 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 교단에 참 평화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시기와 분쟁이 참 평화를 훼방한다. 그리고 싸움과 다툼은 욕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준행자일 뿐, 재판자는 아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약 4:12). 이것을 무시하고 잘잘못을 따지거나 자기변명에만 급급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모독은 참람죄를 말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미 현실적 무신론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지도 모른다.
“고난 없이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선하신 예수님, 주님 안에 순수하고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발디의 칸타타 가사의 전부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 3:18).
평강의 하나님께서 참 평강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되, 종말론적 평강을 소망하자. 성령님의 평안의 줄로 하나 되기를 힘쓰는 새해를 이루자.
유 해무
로마 제국이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이방풍습은 상당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354년경에 로마교황은 태양신의 출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변경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연중 해가 가장 짧아 춥고 음산한 시절에 촛불을 켜고 의로운 해(태양; 말 4:2)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면서 묵은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대비하며,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풍습이 생겼다.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실 뿐 아니라 샬롬, 곧 평강의 왕(사 9:6)으로도 오셨다.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는 천군 천사들의 찬양은 구약 말씀의 성취이다. 성경은 샬롬을 평강, 평화, 화평 등으로 번역한다.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는 비발디의 유명한 칸타타가 불현듯 생각이 난다. 실로 그러하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처처에서 일어나는 갈등, 시기, 무력 충돌, 고소와 고발 등을 보라. 사학법, 佛者임을 내세운 황 우석 박사와 관련된 진실 게임도 평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조류독감과 같은 것이 우리를 위협한다.
그런데 교회는 어떠한가?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은 교회는 진정한 평화의 도구인가? 필자는 연초에 ‘신앙과 이데올로기’로 본보의 시론을 열었다. 화해이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연합하되, 참 신앙만이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제압하고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 가운데에 연합을 찾기 힘들 뿐 아니라,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파당을 만들어 자기 권리는 변호하지만, 겸손이나 사랑의 용서는 희귀하고, 당하면서도 미소 짓는 신앙의 여유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한해를 지난 지금의 심정은 그때보다 더 착잡하다. 단적인 예가 성도간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이다. 특히 명예 훼손건이 계속 줄을 잇고 있다. 우리 가운데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는가?
우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전 3:3). 그러니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신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1:10; 2:14). 성령님은 평안의 줄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엡 4:3). 시기와 분쟁을 인하여 하나임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큰 범죄, 곧 성령훼방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주실 평안이 세상의 평안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그 평강은 세상의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곧 고난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은 무력과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빌리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상 권세의 상징인 검으로 무장하고 겟세마네로 왔다. 그때 제자 하나가 그 검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이에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고 하셨다.
평강의 왕께서는 검의 권세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가지셨다(요 10:18). 평강의 왕은 한 알의 밀알로서 죽고 살아나셔야 많은 생명을 열매로 얻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는 이렇게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행사하사, 많은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화평의 왕에 등극하셨다. 이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평강을 선포하실 수 있다(요 20:19).
바울 서신 대부분이 평강을 빌면서 시작하는데, 이 평강은 평강의 왕께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0:34). 주님 자신은 참 평화와 거짓 평화의 잣대요 갈림길이다. 참 평화는 주님 그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거짓 평화를 우리가 성령님의 평강의 능력으로 잘라내어야 참 평화가 임한다. 고난이 없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
우리 교단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분쟁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 중심에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대학교와 병원이 있다. 병원 정상화는 그 길이 멀어 보이고, 대학교도 신입생 모집이 여의치 않을 듯하다. 모름지기 이런 기관에는 성경말씀과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나온 원리가 지배해야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이 자주 세도를 부린다. ‘복음’병원이 복음 전파에 얼마나 기여를 하는지, 아니면 거침돌이 되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는 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 교단에 참 평화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시기와 분쟁이 참 평화를 훼방한다. 그리고 싸움과 다툼은 욕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준행자일 뿐, 재판자는 아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약 4:12). 이것을 무시하고 잘잘못을 따지거나 자기변명에만 급급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모독은 참람죄를 말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미 현실적 무신론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지도 모른다.
“고난 없이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선하신 예수님, 주님 안에 순수하고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발디의 칸타타 가사의 전부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 3:18).
평강의 하나님께서 참 평강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되, 종말론적 평강을 소망하자. 성령님의 평안의 줄로 하나 되기를 힘쓰는 새해를 이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