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는 잘 정리되어 봉선화와 여러 종류의 꽃들이 즐비한 화단이 있어서 아침저녁 출퇴근길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올해 초에 새로 오신 경비아저씨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듯 화단에는 갖가지 꽃들 대신 잡초만 무성하여 작년을 그립게 만들었으며, 꽃들과 나누는 즐거움 대신 모기걱정을 하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잡초를 다 뜯을 수는 없고 일부분만을 뜯어낸 다음 상추씨를 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모님이 키워서 밥 비벼주셨던 상추의 부드러운 맛과 된장과 함께 먹었던 쌈 상추를 연상하면서, 설레임으로,...
  막상 풀을 뽑아낸 다음, 상추씨를 손에 잡았는데 그다음은 어떤 방법으로 씨를 뿌려야하는지를 노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를 엄습한 것은 후회였습니다. 부모님이 농사 지어주신 것이나 먹었지 씨를 뿌려보거나 뿌리시는 것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뿌려야지요. 일단 흙에 거름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섞은 후에 흩어뿌리기를 했는데, 이제 흙을 어느 정도나 덮어야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씨가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흙을 많이 덮으면 올라올 수가 없을 것 같고, 성경의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해 보니 흙을 적게 덮으면 새가 와서 먹을 지, 또는 뿌리를 잘 내릴 수 없을지가 걱정되어 고민하다가 제 생각대로 덮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수일 후, 상추는 싹을 틔워 고개를 내밀고 올라왔으나, 농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을 열심히 주었으며, 한약 찌꺼기도 갖다 주고 비료도 주었지만 상추는 아주 연약하였으며 비가오자 견디지 못하였고, 비 온 후 상추가 녹았다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이 기억났고 상추는 녹았습니다.
  “나중에 안 써먹더라도 배워는 놔라” 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과 표정들이 떠올랐습니다.
  키질을 배우라고 하셨던 엄마 덕분에 수년 전 쌀에 벌레가 났을 때 키질을 하여 벌레만 골라버릴 수 있었으나, 엄마의 말씀에 많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워놓지 못한 후회가 있습니다.
  저건네 밭에서 보릿단을 거둘 때, 힘든 당신의 삶과 우리를 위로하시던 “내일 죽더라도 나는 오늘 내 할 일은 한다”던 말씀 때문에 웃을 수 있었고, “엄마가 시대를 잘못 태어나셔서 고생하신다. 옛날에 그런 말을 하여 유명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고 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던 그 날들이 그립고 눈에 선히 떠오르는군요.
  내 나이가 28세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집으로 전화하면 “정옥아, 내 자다가도 기도한대이” 라는 한마디로 부담을 주지 않으시면서 엄마의 마음을 표현하셨던 지혜로우셨던 엄마, ‘형제간의 우애’를 끊임없이 말씀하시던 우리 엄마, 오늘 저녁 주님의 품으로 가시면서도 낮에 내 아들 경훈이(생후 14개월)를 돌봐주시겠다고 하시며 우리 부부에게 해인사 구경갔다오라고 하셨던 나의 엄마, 입술의 상처가 가실 날이 없도록 이 땅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내 어머니. 너무나 그립고도 그리워 내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을 때도 있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쯤으로 기억을 하는데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루에는 “새밋가 논에 마늘 캐러간다. 새밋가 논으로 오너라”는 내용의 메모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변함없이 찬장으로 실겅으로 엄마가 숨겨놓은 맛있는 것이 있나를 구석구석 찾아본 다음 논으로 나가 마늘을 캐는데 친구들이 고무줄, 오재미 등을 가지고 놀면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또, 한참을 일하다 보니 힘도 들고 지루하기도 하여 꾀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성경에 보면,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신 말씀 때문에 꼼짝 못하고 해가 질 때까지 일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께 나가 예배드려야하기 때문에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해가 지고 캄캄할 때까지 들에 계시던 아버지, 새벽기도 다녀오시면 우리를 깨우셔서 타작마당에 동참시키신 아버지,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욱 올바르고 예의 있게 키우시기 위하여 한없이 애쓰셨던 아버지. 말씀으로만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셨던 그 아버지 덕분에 학교에서 “부모님께 존대 말 사용하는 사람? 학교에 올 때 부모님께 인사하고 오는 사람?” 을 조사할 때 당당하게 손을 들 수 있었고 긍정적인 자아상,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난과 무식을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과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살라”시며 기도하시던 아버지가 계셨기에 나는 자기소개서를 써야할 경우에 너무나 자랑스럽고, 그런 부모님의 딸로 태어났기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라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답니다.  
  동생들과 가끔 말다툼을 하여 의자 들고 벌을 설 때는 우리 집에는 왜 이리 의자가  많은지가 불평했던 기억도 있지만, 그토록 피곤한 중에서라도 가정예배를 열심히 드린 기억은  과거를 그립게 하는군요. 예배시간에는 부부와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대하여 특히 강조하셨던 것 같은데 늦게까지 믿지 않으셨던 엄마로 인하여 아버지는 신앙의 좌절을 맛보셨을 때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셨고 엄마는 교회에서 여전도회 일을 열심히 감당하시면서 하나님을 섬기셨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엄마의 잦은 아픔은 아버지를 더욱 인내하게 만드셨고 아버지의 자상함과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면 엄마를 안으시고 밤새워 기도하시면서 찬송하셨다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항상 엄마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고 장로 수련회 등 부부동반을 좋아하셨는데, 언제나 남편과 같이 있고 싶고 남편의 잦은 출장이나 외출이 싫은 저의 성향이 이 글을 적다보니  아버지를 닮은 듯 하군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통하여 이 민족과 교회와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새벽기도 끝나고 오신 아버지는 방에 자고 있는 딸의 추위를 아시는지 추워서 웅크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하여 불을 때시는 아버지의 기도와 찬송소리는 몸과 맘과 영혼을 부드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기에 잠에서 깨는 나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또한, 엄마가 밥 하실 때 춥지 않도록 미리 솥에다 따뜻하게 물을 데워놓으시던 자상하신 아버지, 부엌에서 일할 때의 편리를 고려하여 부뚜막의 높이를 높이시고 시멘트를 발라서 깨끗하게 정리하셨으며, 축담에 시멘트를 바르는 등 집을 계량하셨으며, 생각이나 의식에서 항상 앞서가시던 아버지, 아랫방 가마솥에서 데우신 따뜻한 물을 자라바가지에 떠셔서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 우리의 몸을 끼우시고 얼굴만 내밀도록 하시어 세수를 시켜주셨던 아버지의 거칠은 손길이 부드럽고 포근하게만 다가옵니다. 아버지께 나의 몸을 맡긴 채 아버지가 씻어주시는 세수를 하고 싶군요.  
  또, 아버지의 발 등에 나의 발을 올리고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로 청마루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나 “우리구주 그리스도 다시오실 그 때에..” 등의 노래를 즐기시던 아버지, 들에 나가실 때 지게에 태우고 싶으셔서 일부러 바지게를 끼우셨던 아버지, 밥할 때, 보리쌀을 밑에 많이 깔고 그 위에 쌀을 조금 올려서 밥을 한 다음 할머니는 쌀밥만, 아버지 어머니는 보리를 약간 섞은 쌀밥, 그 다음은 쌀을 약간 섞은 보리밥을 밥그릇에  담아서 상을 차린 나에게 지나치시도록 칭찬하시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셨으며, 작고 조그마한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나의 아버지, 경훈이가 잘 웃는다고 마당에서 일하시면서 계속하여 경훈이와 눈을 맞추시고 너무너무 좋아하시던 아버지, 그래서인지 더더욱 경훈이를 많이 안아 주시고 기도를 많이 해 주셨답니다.
  내가 어릴 때 손가락을 다쳐서 우셨고, 대학을 가지 못하여 우셨으며 시집을 가야할 나이에 시집가지 못하고(?) 있어서 나 때문에 세 번을 우셨다던 내 아버지. 정말 그립고도 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때, 돈이 필요하여 집에 들르면 꼭 예배를 통하여 교훈하시고 기도하시면서 축복하시고 집을 떠나기 전에는 이성에 대하여 특히 몸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아버지, 직장에 취직이 되어갈 때면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 집에 베푸신 축복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해 주시던 아버지, 배운 것이 없다시며 겸손해 하시던 아버지는 어쩌면 아시는 것이 그렇게도 많으셨는지...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자녀교육의 지침서는 성경이다. 나도 성경의 교훈을 가지고 우리 아버지처럼 내 아이들을 양육해야지라고 마음먹고 결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이에게는 내가 받은 가정교육, 신앙교육을 전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갑니다. 교회 전도사님의 학업으로 인하여 수요예배를 인도하시는 아버지는 성경 66권의 구절구절을 줄줄줄 어쩌면 그리도 잘 외우셨는지, 나도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외웠던 구절마저 잊어버려 암송할 수 있는 구절이 거의 없는 상태랍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버스를 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길에 서서 아이스콘을 드시는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난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답니다. ‘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순진하시고도 순수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와 눈높이를 같이하려 애쓰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유기농 쌀을 소개 받아 주문을 하여 먹는데, 언젠가 전화를 받지 않길래 핸드폰 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연세가 지긋하신 아저씨가 지금은 들에 나와 있으니 밤에 집으로 전화하라고 하시더군요. 아! 우리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지금쯤이면 우리 아버지도 핸드폰을 들고 들에 나가 계실텐데..... 또 핸드폰을 들고 얼마나 자랑을 하셨을까.’
  늦게까지 부모님과 가까이 지낸 영옥이가 부모님께 많은 것을 사 드리고 해드렸지만 우리가 드린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시던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성실과 근면,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열심, 우리들에게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을 잘 지켜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넘기 힘든 산등성이에서 다리와 팔을 벌려 너무나도 먹음직스런 딸기 한 다라이를 건네주시려고 몸부림치시는 엄마, 우리 집 안방과 아랫방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일년 동안 내내 꾼 꿈 중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경훈이가 성훈이를 놀리거나 둘이 다투어 견디기 힘들 때에 난 가끔 말합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야 한다”고. 물론 우리 엄마의 모습을 그리면서 또한 나 자신에게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더욱 밀려오는군요.
  “아버지 어머니 직장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싶어집니다.
  이제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일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도록 애쓰며,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부모님의 소원이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렵니다.<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