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행 2일차예요;;
2일차
6시 반,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어제 잠이 든 시각에 비해 몸이 너무 개운해서 놀랐다. 모닝콜을 받은 후 나는 당연히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잘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나졌고 어제의 걱정처럼 몸이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머리도 손질을 안 한 채 일층으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아직 7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한국 사람들 캄보디아에서는 왜 이리 부지런한 사람들로 보이나.
역시나 식당도 보통 호텔 식당과 다름 없었다. 단지 여전히 어두운 불이 적응이 안 될 뿐. 호텔 답게 뷔페식이었다. 그릇을 집자 마자 야채가 보였다. 그런데 오이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오이의 껍질이 핑킹가위로 자른 모양처럼 생겼다. 맛은 같았지만 오이, 심지어 파인애플까지 핑킹가위로 잘랐는지 울퉁불퉁했다. 정말로 이 둘을 자른 칼을 보고 싶었다.
그 뒤로도 음식들이 쭉 있었다. 고기들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다 태웠고, 심지어 계란 후라이도 탄 자국으로 범벅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굽는 거야? 주변에 말할 사람이 너무 많고 행복지수가 높아서 쉴 새 없이 떠들다가 태웠나?
예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빵 하나만 가져오고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서 여러 음식들을 권해봤는데 그래도 안 먹었다. 조금 뒤 엄마가 쌀국수 같이 생긴 걸 가져왔다. 그것 마저 예희가 먹으려하지 않자 내가 먹어봤다. 너무너무 너무 맛있는데, 동시에 맛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무너무 너무 매웠다. 하지만 너무너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어댔다. 역시 매운 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독의 힘이 있다. 동남아는 냉이가-고추가- 엄청 맵다. 특히 향신료같은 경우 우리나라의 청양 고추에 비교되지 않는다. 나중에는 냉이를 넣지 않은 국수와 섞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웠다. 마지막에는 혀가 탈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혀가 탔다가 식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드시고, 방으로 들어가서 양치를 하고 있었더니 캄보디아에서 반가운 한국 손님을 만났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보태주신 나가사끼 아저씨께서 나가사끼와 젓갈을 가지러 오셨다. 우리가 나가려고 준비를 하는 동안 구석에 서서 아저씨가 연설을 하셨다. 이 나라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려고 색종이와 찰흙을 많이 가져왔다고 하니 아저씨가 한꺼번에 주지 말고 내게 줄 게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하셨다. 저번에 아저씨도 짐 한 바구니를 들고다니시며 아이들에게 나눠주시다 선글라스, 가방 전체를 뺏겼다고 하셨다. 아저씨가 그런 일을 당했다니, 몸집은 우리 아빠 만하고, 배의 크기는 이미 아빠의 두배를 넘어선 산 만한 배를 계속 쓰다듬으시는, 내 눈 앞에 있는 아저씨가 그런일을 당했다면 도대체 우린 뭐야?
아저씨가 관광을 계획해 주시는 리차드 권 아저씨에게 데려다 주셨다. 건물 위에 크게 한국어로 간판이 있었다. 여기도 한국인이 많다고 한다. 크게 크게 쓰여진 ‘글로벌’이라는 글자 아래로 들어갔다. 들어 가자 마자 아저씨가 오셔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저씨가 나이가 드셨다. 머리가 히끗히끗하신 이미 할아버지가 되신 리차드 권씨셨다. 리차드 권 아저씨가 우리 일정을 다 짜 주셨다. 오전에는 박물관과 왓뜨마이, 그리고 오후에는 리차드 권씨와 함께 톤레돗에 가기로 했다. 리차드 권 아저씨와 엄마아빠가 얘기하실 동안 예희랑 나랑 떠들고 있었는데 예희가 갑자기 아저씨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나오는 bon trap이 닮았다고 했다. 정말, 본 대령님이라면 꽤나 미남인데. 좀 아닌 것 같았다 히히 조금 뒤 예희가 정말로 진심으로 김갑수가 닮았다고 했다. 어, 정말. 우리가 아는 극소수의 배우들 중 한 명이다. 이제 보니 정말 닮으셨다. 나중에 말씀드렸더니 그런 얘기를 많이 들으신다고 했다.
밖은 어젯 밤에 예상했던 것 보다 전혀 덥지 않았다. 오히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우리나라의 가을이자 방글라데시의 겨울 정도의 날씨, 즉 우리에게는 최상의, 캄보디아인에게는 coldest 날씨였다.
앞에서 바로 툭툭이 기사를 잡은 후 바로 툭툭이 기사와 함께 출발했다. 시내에 나가보니 정말로 방글라데시와 별 다를 것 없었다. 릭샤가 툭툭이로 변하고, 길가에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을 몇 천대 놓으면 캄보디아였다. 여전히 하늘은 아름답고 뿌연 먼지가 있지만 한국의 오염된 먼지가 아닌 상쾌한 공기와 섞인 깨끗한 먼지가 있었다. 툭툭이를 타니 정말 시원했다. 릭샤는 타는 것 자체로도 힘들었는데 툭툭이는 자전거 뒤에 이인용 소파 두 개를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모든 게 편했다. 앞을 보고 앉는 두 자리에는 엄마와 예희가 타고 뒤를 보고 있는 곳에서는 아빠와 내가 앉아서 묵직한 덩치로 모래,먼지로 함께 섞여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었다. 잠깐은 정말 시원하지만 먼 길을 타면 힘들고 특히 뒤를 보고 타다보면 멀미가 올 것은 확실했다.
릭샤는 위의 막이 없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지만 툭툭이는 바람은 다 들어오고 비는 맞지 않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앞의 교통수단이 사람이 직접 끄는 자전거가 아닌 오토바이라는 점에서 이다. 늘 자전거를 끌고 위에 몇 백 kg 가끔은 1톤 정도 될 만한 큰 짐들을 들고 다니는 릭샤 꾼들이 너무 불쌍하고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도 편히 앉아있을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 릭샤이다. 늙은 할아버지나 한창 즐기고 있을 나이의 청년들이 끄는 릭샤에 타게 되면 늘 그들의 등이 안쓰러워진다. 그 대신 툭툭이에서는 편히 앉아 즐길 수 있었다.
박물관까지 가면서 처음으로 캄보디아의 아이를 봤다. 너무 이뻤다. 엄마와 이모같이 보이는 사람의 중간에 -그것도 오토바이에서-끼어서 타고 있었는데 엄마 눈에 너무 이뻐보였는지 툭툭이에서 오토바이로 색종이를 건네주고 싶어했다. 안타깝게도 바로 툭툭이가 출발하는 바람에 손만 흔들고 가 버렸다.
밖의 풍경과는 다르다. 서민들의 집이 작고 기우뚱한다면 박물관은 웅장하고 굳건하다.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 안에서 비추는 박물관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아침이라 아직 박물관은 열지 않은 상태였고, 준비를 하며 현관에서는 직원 여러 명이 앞을 쓸고 있었다.-사실 정식 직원이라기보다 우리가 말하는 임시직 같은 청소부 같아보였다. 내가 박물관 앞에서 현관에서 혼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인지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왠지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순수한,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 가지의 감정이 합쳐져 있는 눈 같았다. 직원들끼리 수다를 떠는데 도저히 알아듣지 못 하겠고 왠지 나를 가리키며 하는 말 같아 연못을 찍고는 성급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에서 지갑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했다. 처음에 카메라 까지 가져가길래 카메라는 가져가면 안 되냐고 했더니 카메라는 된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왜, 소지품을 가져가는 건가. 우리 소지품을 자물쇠도 없는 선반에 버리 듯이 던져 놓길래 엄마가 아줌마 영어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제서야 귀찮은 듯이 자물쇠가 있는 서랍으로 짐을 넣어줬다.
분명히 김갑수 아저씨-리차드 권 아저씨-께서는 예희는 공짜라고 하셨다. 예희는 아직 만 12세 미만이기에 한 사람에 40불이나 되는 유적지 티켓도 공짜다. 그리고 박물관도 공짜라고 들었다. 하지만 티켓을 파는 아가씨가 끝까지 아니라며 말하길래 그냥 알겠다며 갔다. 동글동글 말린 길을 타고 박물관을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은 총 A~E까지 8개의 gallery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가기 전 영상을 보는 게 있었다. 거기에 직원이 있길래 지금이다 하고 엄마가 만 12세 미만은 티켓이 공짜가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직원은 알아듣는 건지 야금야금 씹는 건지 싱글싱글 웃으며 이쪽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참,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가 이거였나.
영상을 보고 있는 곳에는 이미 외국인 싱글 아주머니가 영어로 관람을 하고 계셨다. 아직 아침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아주머니가 보시길래 쑥쑥 넘어가는 영어를 흘려듣다가 아주머니가 가시니 그제서야 다시 한국어로 바꿔서 다시 들었다. ‘제대로 된 언어’로 들어보니 정보가 있는 영상물이 아닌 그냥 8개의 gallery를 총정리 해 놓은 영상이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미리 좀 가르쳐 주지, 시간 아깝잖아, 금발의 아주머니.
본격적으로 gallery에 들어가기 전에 부처들을 모아 놓은 gallery가 하나 더 있었다. 엄청나게 많았다. 부처들은 표정들이 다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수백개 될 것 같은 귀여운 소형 부처상들이 벽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불상들은 모두 1000개 였다고 한다. 사실 작은 모형들이 너무 많았기에 수천개는 더 되 보였다. 한국말로 설명을 해 주는 레코드를 재생 시켜 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멘트만 자꾸 나왔다. 내가 그렇게 반가웠나. 나중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숫자를 눌러야 하는 수동이었다. 그제서야 시작했다.-내가 반가웠던 게 아닌가 보다- 불상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대부분 아래 두루두루 말린 두루마리 뱀 위에 앉아 있는 부처나 뒤에 무서운 뱀들과 함께 명상 중인 부처들이 많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뱀들은 용이라고 하는데 권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실 레코드에서 나왔던 건 정말 많았는데 그 많은 걸 다 기억할 수도, 다 쓸 수도 없다. 사실 박물관에서 너무나도 많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많은 것을 쓰려면 내 전체 기행문의 2배정도는 족히 될테니 간단하게 쓰겠다.
크메르 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은 엄청났다. 정말 만들어 낸 불상과 신과 종교가 아니라 할 정도로 교묘하고 섬세했다. 그렇게 열심히 지어내고 만들었는데 그 신이 가짜였다니, 정말 불쌍했다. 사실 앙코르 왕조의 모든 유적지들이 힌두교, 불교에 대한 사상과 관련된 건물들이다. 건물 하나 하나, 벽화 하나하나, 그림 하나하나, 글씨 하나하나에 많은 것이 적혀있는데 너무 놀라웠고, 불쌍했다. 방명록에 어떤 사람이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했다는 것에 정말 믿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로, 이 나라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은 땅에서 솟아올랐고, 뚝 떨어졌다는 말이 이해됐다. 게다가 처음 봤던 전시관의 모든 불상들의 표정이나 모든 게 달랐는데 중국의 병마용갱 못지 않았다.
박물관을 보다가 낯익은 현지인을 만났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릴 보고 정말 환하게 인사하며 좋아서 손을 흔들어 댔다. 툭툭이 기사였다. 진심으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박물관에 볼 게 많아서 만나는 시간을 조금 더 미루자고 한 후, 엄마가 정말로 순진한 것 같다고 했다.
박물관은 너무 좋았다. 걱정과는 달리 레코드도 잘 되어있어서 맛보기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한 gallery씩 지날 때 마다 너무 한심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부분들이 있었다. 많은 유물들에 쇠나 철로 박아 놓고 아름다운 유물을 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유물 위의 유성으로 쓴 듯한 번호 매김. 정말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아예 발굴을 하지 않고 직접 가서 볼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두었다면 돌 위에 단단하게 박힌 철근이라도 빼낼 수 있었지 않을까? 그래도 이건 약소한 거다. 이미 지난 일이기에 돌이킬 수도 없고 후회해 봤자 같은 결과의 더 큰 아픔을 주겠지만 앞날의 문제를 일으킬 거도 많이 보였다. 우선 첫 번째 갤러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도 제제를 안 해 놓았다. 첫 번째 갤러리에는 작은 불상들이 많아서 쉽게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하나하나 다 유리로 막아놨지만 그 뒤로는 아무것도 유리로나 줄로나 막아 놓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정말 작은 유물들은 유리로 바닥만 해놨다. 아니, 해 놓으려면 다 해 놓지 또 선반 처럼 앞은 안 막고 바닥만 받침대로 유리를 놓는 건 또 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온데 생각만 돌리면 쉽게 가져갈 수 있는 수 억짜리의 유물들이 있었다. 하긴, 유적지에서는 낮잠을 자고 부조에는 낙서를 해 놓는다니-물론 이 낙서는 외국인들의 흔적이지만- 이건 약골인가?
박물관을 나왔더니 이제 시간도 꽤나 지났고 박물관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박물관 앞에는 툭툭이 기사들이 나오는 손님들을 모시러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적어도 택시 기사들이 더 낳다- 그런데 너무 사람들이 많은 탓에 우리 툭툭이 기사가 안 보였다. 도대체 찾을 길이 없자 옆에 있는 경비원까지 도와줬다. 5분 정도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툭툭이 의자 위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오토바이 헬멧을 얼굴 위에 올리고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꿈나라에서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가 아저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나는 아저씨의 블링블링한 분홍색 헬멧을 보고-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가 무안했는지 헐레벌떡 툭툭이를 뺐다.
처음에는 예희가 무서워 했지만 아침의 삐짐+부루퉁이는 어디가고 툭툭이가 너무 좋다며 어느새 툭툭이의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내리기가 안타까울 정도로 시원한 드라이브를 즐겼다.
이번은 캄보디아에 오기 전부터 내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killing field의 내용을 담고 있는 왓뜨마이로 갔다. 캄보디아는 학살이 있었다. 그것도 200만 명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학살이었다. 폴포트라는 정권자가 정권을 잡은 후 7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자신이 원하는 공산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반역하는 모든 사람들 즉 지식인들, 안경낀 사람들, 배가 나온 사람들, 굳은 살이 없는 사람들 등, 약 캄보디아 인구 전체의 1/3정도를 죽인 일이다. 이 일로 인해 현재도 캄보디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아픔을 격고 있고 특히 눈 앞의 문제라고 한다면 현재 학교의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지식인들은 몰살한 후라서 이번 세대는 당연하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르는 정말 큰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제대로 된 법의 처벌을 받지 않고 가택 연금 중 죽은 폴 포트의 흔적이 있는 죽은 사람들의 유골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왓뜨마이다.
우리는 가이드 없이 자유여행이기에 우리가 알아서 주변에 있는 가이드들의 해설을 들으며 다녔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했고 특히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어찌 이렇게 비참하게 할 수 있는지 나는 물론 내내 귀를 막고 다녔지만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들의 뇌구조를 보고 싶었고 그대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도저히 글로 담을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그 중 하나만 듣는다고 해도 나와 같은 마음이 들 거다. 더더욱 울분이 났던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현정부에도 관련된 사람들이 있기에 처벌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죽어야 할 사람들이다. 이 나라에서 지도층에 있다는 게 과연 떳떳할까?
너무 징그러웠다. 하지만 유골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은 너무 아름다웠다. 옆에 절같이 생긴 건물이 있었다. 들어가 보니 어느 여자아이와 엄마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의 아줌마 영어가 시작되는 군, 하지만 정말로 둘이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꼬죄죄하게 생긴 이쁜 여자아이가 기둥 옆에서 몸을 비틀며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배고파요, 엄마 아빠 없어요’등의 말들을 하고 있었다. 옆에는 낙엽들을 모아놓은 듯한 자루들이 수북히 있었고 그 위에는 네 다섯의 남자 아이들이 있었다. 먹을 게 없었고, 특히 먹을 걸 주면 이 아이들은 여기가 더 편하다는 것을 알기에 학교가 아닌 이 곳에서 구걸을 할 게 뻔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준비한 색종이들을 줬다. 예희가 옆에서 공을 접는 시범을 보여줬다. 그런데 정말로 놀랍게도 손재주가 있는지 여자아이가 깔끔하게 모두 따라 접어서 공을 완성했다. 우리가 볼,볼(ball)을 외쳐대니 한참을 알아듣지 못하다가 마침내 알아들으며 한다는 말이 “아,발?”이라며 좋아했다. 참, 캄보디아 발음도, 언제 공이 냄새나는 발꼬락이 됐는지;;
그러고는 정말 귀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의 얼굴이면 뒤에 남자아이들이 꽁무니를 따라다닐 텐데;; 나중에 알게 된 건물의 정체인 절은 너무 어두워서 사진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너무 이뻤다. 먹을 걸 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지만 그래도 색종이로 인해서 재미를 얻었으니 좋았다. ㅎㅎ 우리가 절을 나가려 하니 여자 아이가 감사합니다, 조금은 서툴지만 진심이 묻어난 인사를 했다.
이 때 부터 카메라의 효능을 보았다. 저번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쯤 되서 이미 내가 폭팔해 있었을 것이다. 줌도 너무 편하게 되어서 즉각 즉각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엄마아빠 카메라 선물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절에서 나와 보니 삐쩍 마른 고양이가 돌아다녔다.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도 안타까우셨는지 좀처럼 떠나질 못하셨다. 이 나라는 도대체 왜 사람도 고양이도 다 마른 거지?..
그 다음으로 가면서 실컨 거리 구경을 했다. 중간에 백화점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아름다우신 엠마 왓슨 양이 ‘무서운’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남동생과 화보를 찍었다는데 그건가 보다. 꺄! 역시 엠마의 인기는 전 세계를 날아다닌다. 이히히-그거 기억하라, 엠마와 harry의 인기는 비례한다는 것!(솔직히 Harry potter가 100배 더 유명하긴 하지 히히)-
여기의 신호등은 정말로 귀엽다. 도보의 신호등 뿐 아니라 도로의 신호등까지 1,2,3.. 숫자로 나타내고 빨간 불은 x로 표시한다. 그 뿐인가, 도보의 초록색 불은 신호등 안의 아저씨가 정말로 걸어다닌다. 문제가 있다면야, 이 부근에는 신호등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
와, 가다 보니 오토바이, 자전거를 타면서 전화하는 사람도 다 보인다. 이 지방 사람들은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건 기본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오토바이 뒤에 살아있는 돼지 두 마리를 눕혀서 묶어 실어 가는 것 까지 목격했다..
계속 방글라데시와의 비교를 하게 된다. 교통상황은 방글라데시보다는 훨배 더 낳다. 그건 사실이다. 만약, 방글라데시보다 더 안 좋은 교통상황에 처해 있다면 툭툭이를 타고 돌아다닐 생각은 절대로 못할 거다. 역주행은 기본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는 자그마한 릭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는 절대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캄보디아가 그렇게 교통상황이 좋은 건 아니였다. 툭툭이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역주행도 해 보고 차들을 비집고 추월도 해 보았다. 엄마아빠예희, 특히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나는 진심으로 즐겼다. 적어도 방글라데시보단 낫지, 뭐.
한 가지 더 비교를 하자면, 방글라데시는 아이들이 원달라, 원달라 소리치며 다니지는 않는다. 캄보디아야 다행히 앙코르 왕조라는 떼돈이 굴러오는 유적지가 덩그라니 있지만 방글라데시는 유적지라야 관광지도 없다. 그래서 외국인은 외계인 보듯이 한다. 그러니 방글라데시에서는 영어나 외국어를 유창하게 쓰며 구걸하지는 않지만 현지인을 상대로 꽉 막힌 도로를 비집고 장애아들이나 고아들이 껌팔이나 음식을 팔거나, 구걸 혹은 도로가에 앉아서 본드를 마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캄보디아는 깔려있는, 돈 많은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거고. 그래서 캄보디아는 조금 더 심각한 증세를 보인다. 물론 아이들이 알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다행인 면도 있지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학교를 가지 않고 오직 쉽게 돈 벌 생각을 한다. 야생 동물들이 동물원에 가면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의해 더 이상 제 스스로 먹이를 잡을 힘이 없어지 듯, 이 아이들도 어느 아이들은 골목에 앉아 원달라만 요구하면 돈이 스스로 굴러들어 오는 것이다.
여러 모습들을 구경하는 동안 정말로 프싸라라는 큰 시장에 도착했다.-이름이 왜 이런지, 캄보디아어는 진짜 이상하다- 처음에는 정말로 놀랐다. 길이만 해도 서울 수산물 시장보다 훨씬 더 길었다. 안의 넓이 또한 수산물 시장의 2배는 될 듯 보였다. 툭툭이 기사가 시장 앞에 내려주고는 차들이 삑삑 거리는 도로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으이? 이 많은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데 우리 보고 이 곳을 건너라고 하다니;;-참고로 여기는 ‘정말’신호등이 없다.- 이 시장은 과일이 싸다고 한다. 시장은 정말로 컸다. 일자로 쭉 갔더니 끝도 없었다. 엄마가 가져온 정보들 중 시장에 프라이드 파인애플이 파는데 정말 맛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영어를 못하는 건지 프라이드 파인애플이란 게 아예 없는 건지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정도 포기할 때 즈음,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한 쪽에서는 바나나를 찧고 있었고 또 한 쪽에서는 찧은 바나나와 그냥 말린 바나나를 튀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엄마가 가져온 정보의 출처가 잘못 된건가 보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였다. 이 시장은 외국인 주위로 파는 시장이 아닌 현지인들이 다니는 현지인들을 위한 시장이었다. 그래서 아까 프라이드 파인애플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첫째, 프라이드 파인애플이라는 거 자체가 없었기 때문. 둘째, 프라이드라는 영어 자체를 몰랐기 때문. 결국 둘 다 해당 되었다. 다행히 그 집의 어린 여자아이를 중간에 놓고-그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듯한 심플 잉글리쉬를 통해- 약 10분 정도를 알 수 없는 영어,통역,캄보디아어가 오고 간 끝에 1달러를 캄보디아 돈인 4000리엘로 바꿔서 바나나를 살 수 있었다. 바나나는 정말, 정말, 정말 맛있었다. 나오면서 다시 열대 과일을 사느라 씨름한 후 ‘비싸게’ 사고 왔다. 나중에 보니 엄마는 시장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단다. 그래서 정문의 가게라서 더 비쌌을 것이다.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무단횡단을 한 후-이 나라에서는 그냥 횡단을 한 후- 툭툭이 기사에게 바나나를 건네 줬다. 좋아했다. 진짜로 달고 맛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거 하나 팔면 잘 되겠다-음흉한 생각 히히-.
엄마가 열대과일을 먹더니 기겁했다. 한국에서도 엄마가 좋아하던 건데 여기와 한국은 맛이 다르다며. 그건 확실했다. 방글라데시에서도-다시 비교하게 되어 미안하다, 캄보디아야.-내가 망고를 싫어한다고 했더니 선교사님이 한국의 망고와 이곳의 망고는 다르다며 여름에 와서 망고를 못 먹어서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그나마 여기는 더 더워서 겨울‘이라는’이 날씨에 와 맛을 보게되어 진짜 다행이다. 나도 한국에서는 안 먹던 과일이었으나 호텔까지 가는 길에 다 먹어치웠다. 아마 우리가 먹는 소리를 듣고 툭툭이 아저씨도 상당히 먹고 싶었을 게다.. -당연히 너무 많이 먹어서 일차로 놀랐을 거고.
엄마아빠가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가지러 호텔로 가지고 간 사이에 나랑 에희는 툭툭이 아저씨앞에서 별 쌩쇼를 다 했다. 툭툭이가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우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우리의 상당한 무게에 의해 툭툭이가 흔들렸다.
드디어 엄마아빠가 왔고 -시계가 없으니 몇분이 지났는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드디어 맛난 점심을 먹으러 장원식당으로 갔다. 맛은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국음식을 먹는다는 그 자체로도 너무너무 좋았다.-자슥이 며칠이나 한국을 떠나왔다고 벌써 한국음식을 찾아?!-
장원식당은 글로벌과 같다. 말 그대로 글로벌이라는 한국 관광객들을 이어주는 건물에 장원식당이라는 식당을 같이 운행하는 거다. 김갑수 아저씨께서-어느새 예희도 나도 리차드 권 아저씨보다는 김갑수 아저씨로 부른다- 점심식사는 여기서 점심을 먹으라고 하셔서 그대로 순종해서 먹는다. 그런데, 예상 외로 정말 맛있었다. 된장찌개와 갈비를 시켰다. 된장찌개에 딸려 나오는 반찬들은 한정식의 반찬들보다 많이 나온 것 같았다. 반찬들 하나하나가 예술이었고 특히 된장찌개가 정말로 맛이 있었기에 갈비는 무슨, 갈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갈비가 맛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정식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역시 한정식이 짱이다♡♡ -사실 갈비가 타긴 했다-
예희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다 보고 나왔더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마침 아침에 김갑수 아저씨가 말해 주셨던 똘렌샵에 가는 버스가 왔길래 빨리 갔다. 사실 예희가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못 탈 뻔했다. 그 정도로 아슬아슬..
관광버스를 타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김갑수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며 똘렌샵으로 향했다. 사실 캄보디아의 관광버스 안에도 마이크가 있다는 자체로도 엄청 신기했다. -캄보디아야, 너무 수준 낮게 봐서 미안;;- 김갑수 아저씨는 우리와 다름 없는 반팔을 입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땀을 ‘주루룩’흘리고 계셨다. 밖의 온도보다 버스 안 에어컨의 힘으로 인해 몇 십도는 올라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더우셨나보다.
앞좌석에는 운전사, 김갑수 아저씨 외에도 우리나라 말을 능통하게 하는 현지인과 나가사끼 아저씨 정도 몸매의 아저씨가 계셨다. 김갑수 아저씨가 가기 전에 그 아저씨를 무슨 소장님인가 소개해 주셨다. 똘렌샵에 도착하면 마을이나 수상촌에 몇 군데 들를 건데 거기의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서 사진을 나눠줄 거라고 하셨다. 여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사진이 없는 경우가 많다. 몇 년 동안 이런 사업을 하고 계신 분이라고 하셨다.
똘렌샵, 샵이라는 이름과 캄보디아어로 호수라는 똘렌을 합친 단어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똘렌샵 호수라고 하는데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말로 하자면 샵 호수 호수, 호수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된다. 우리 갔을 당시는 건기라서 똘렌샵에 물이 많이 말라있다. 마른 상탠데도 불구하고 톨렌샵 전체 크기는 제주도의 두배라고 한다. 현재, 물이 60%정도 말라서 이 정도지, 우기 때는 도대체 얼마나 클까;; 이 정도로 끝낸다면 모를까 김갑수 아저씨의 설명은 계속 됐다. 캄보디아의 가장 긴 강인 메콩강, 메콩이라는 건 4000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대로 해석하여서 메콩강에는 정말로 4000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4000개라니, 버스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게다가 곳은 폭이 40KM라고 한다. 길이도 아니고 폭이 40KM라면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도 구분 못 하겠네;; 그걸로 됐지, 끝이 아니였다. 비가 많은 우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강이 역류한다고 한다. 다시 똘렌샵으로 넘어와서 물고기들이 400만톤이 잡힌다고 한다. 그게 1년이라면 모를까. 얼마 전에 kbs에서 똘렌샵에 대한 다큐를 찍는 동안 촬영을 위해 3,4달 잡은 것만 친 양이라고 한다. 3,4달이 이 정도니. 구지 비교를 해 보자면 우리 나라 1년에 40만톤을 잡는다고 한다. 이번엔 3,4달도 아니고. 와. 놀랄 것도 한 두가지가 아니네.. 이것들 외에도 많이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요즘은 물고기들을 너무 많이 잡고, 환경을 위해서 어업을 중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예전보다는 많이 준 양이니, 또 다시 계산해 보면 예전에는 1달에 400만톤이 잡혔던 건가?
앙코르 왕조가 살아남는 것, 그리고 크메르 인들이 살아있었던 것의 1/3은 호수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다. 많은 이유들이 있었는데 벼농사를 1년에 몇 번 할 수 있고, 같은 시기에 추수하고, 심는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큰 호수가 역할을 안 할 리는 없다.
똘렌샵 주위의 집의 종류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한다. 흔히 수상가옥이라고 하는 물 위의 집들, 그리고 말뚝을 박아놓은 집들, 그리고 가장 하층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동식 주택인 호수 도로가의 집들. 이 도로가의 집들은 물이 들어오면 이동하고 물이 빠지면 다시 가까이 오는 식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김갑수 아저씨가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할 거 있냐고 물었다. 어느 아주머니가 왜 소는 다 하야냐고 물어봤더니 웃으시면서 자, 지방마다 소 색깔은 다를 수 있답니다라며 얘기해 주셨다. 질문한 아주머니도 참. 또 다른 아저씨가 질문하셨다. ‘여기는 집에 화장실이 없던데 볼 일은 어떻게 보나요?’질문부터 답변까지, 짱이었다. ‘네,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서는 볼 일을 아무데서나 봅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뒷마당에..’ㅋㅋ 뒤로 갈 수록 더 웃겼지만 생략하겠다. 중간에 운전사네 집에 잠깐 들렸다. 김갑수 아저씨가 화장실 가고 싶으시면 지금 가라고 했다. 다른 버스에서는 가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넓은 들판에 차를 세워 준다고.. 버스 운전사 아저씨에게 감사해 지는 순간, 그래도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나 보다.
뭐 별 말씀 다 하시고 계시는데 아까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아이들에게 사진한 장씩을 나눠주신다는 분이 마이크를 가지고 가시더니. “후진타오 주석도 앙코르 와트 볼 땐 그냥 봤는데 이명박 대통령님께서는 앙코르 와트 전체를 빌려서 봐서 세계적인 욕을 얻어먹으셨지요.” 정말, 우리 나라 대통령님, 국제적으로 유명하신 분이시네요.
설명이 대충 끝나신 후 자려고 했지만 이미 똘렌샵에 다 와 있었다. 점점 들어갈 수록 길은 좁아졌다. 결국에는 버스가 들어가기 조차 힘들어졌지만 김갑수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 “여기는 걷기 힘드니 최대한으로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 길로 차를 빼는 건 운전사가 알아서 하겠죠.”ㅋㅋ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차 빼기. 어휴, 우리끼리 왔으면 큰일날 뻔 했네.
우리는 똘렌샵 가의 마을 쪽으로 갔다. 버스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집들과 모두 우리에게 시선을 맞춘 몇 백명의 사람들, 그곳에 내리기 전 아이들에게 사진을 나눠준다는 분이 한가지 말씀을 해 주셨다. 사진은 아이들에게는 일생에서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또한 이 아이들에게는 별도의 선물을 주면 안된다고 하셨다. 하나라도 많이 주거나 하나라도 적게 주면 아이들이 가서 자랑하거나 어떻게 하여 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로 사진 한 장, 공책 하나, 그리고 별도의 선물을 하나씩 주신다고 한다. 그러니 제발, 절대로, 아이들이 너무 이쁘더라도 별도의 선물은 주면 안 된다고 당부하신 후에 한 시간 후에 만나자고 하셨다.-무슨 한시간은 한시간,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서 같이 있을 건데.-
그 아저씨는 내리자 마자 아이들 사진을 찍게 줄을 세우시고 사진 찍기를 곧장 시작하셨다. 아저씨도 캄보디아어가 안 되시는지 영어, 한국어, 바디어(바디 랭귀지나 바디어나 뭐, 거기서 거기지.) 등 다 사용하셨다. 그래도 아이들은 바로바로 알아들었다. 저 멀리서도 아이들과 엄마들이 달려와서 줄을 서고, 그럴 동안 우린 구경하러 갔다. 엄마아빠가 어느 분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 분의 가족은 무려 1달을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와우. 짱이다. 부럽다. 자식들이 다 커 보였다. 엄마 아빠 좀만 기다려요, 나도 20년 후 계획에 가족 여행은 많아요.
김갑수 아저씨가 현지인의 집에 들어갈 때 말하는 법을 분명히 차 안에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새 까먹었다. 그래서 아까 차 앞에 타고 있던 한국어에 능통한 현지인에게 집에 들어가도 되는지 좀 물어달라고 그랬다. 사람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와, 그런데 올라가는 것부터 장난이 아니였다. 다리는 후덜덜거렸고 계단을 타고 드디어 집으로 도착하자, 와, 한층 더 업그레이드. 정말, 정말, 무서웠다. 아래가 뻔히 보였고 나는 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그냥 놓아 둔 나무 위에 서 있었다. 물이 보이는 건 괜찮은데, 나무가 움직인다. 삐걱삐걱 소리도 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부실 공사다;; 설마, 이 많은 가족들이 다 걷고 생활하는데 나라고 무너지진 않겠지?-아기들이 걸음마하는 느낌을 체험했다.-
부엌 쪽으로 가니 정말 물 바로 위였다. 우리가 한 발짝 내미는 것도 힘들어 하는 것을 보던 식구들이 마구 웃었다. 이봐요들, 이건 정말 무섭다고요. 그 집에는 여자 애기가 한 명 있었는데 역시나 눈은 또랑또랑, 얼굴은 순진하게 생긴 사랑스런 인간이었다. 너무 이뻤다. 아기는 너무 어려서 사진 받는 것도 못 하니 조용히 가지고 있던 색종이를 줬다. 그러고는 표정 없이 신기해 하길래 옆에 앉아서 애를 안았다. 같이 사진을 찍고 난 후 사진을 보여줬더니 애 엄마가 나에게 뭐라뭐라 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웃으면서 계속 사진만 보여줬다. 미안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내 생각에 쉽게 색종이는 밑으로 빠질 것 같다. 집안 식구들은 꽤나 많았다. 아이는 아기 한 명 밖에 없었고 노인네들이 많았다. 계속 뭐라 뭐라 해샀는 할머니는 담배를 물고 계셨다. 그 할머니인 것 같아 보이는 할아버지는 우리가 올라갈 때 다시 내려갈 때 손을 잡아서 움직이는 걸 도와주셨다. 내려가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땅이여, 고맙도다. 우리가 멀리 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어 줬다.
다시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갔다. 사진 찍기는 한참 진행되고 있었고 한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옆에 보니 우리나라의 경운기의 확대형이랄까, 그 정도 크기의 차에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도 타고 싶다고 했더니 태워 줬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할 일이 없나보다. 김갑수 아저씨가 부르니까 그냥 와서 우릴 태웠다. 재밌었다. 멀리까지 가서 내려주고는 가버렸다. 처음에는 뭐야, 왕복 아니야?하면서 킬킬 댔지만 오히려 집들 사진 찍을 기회가 있었기에 나중에는 내려준 게 고마웠다.
캄보디아는 예술이다. 사진가가 없어도 어느 누가 찍어도 예술이 되는 그 자체로도 예술이다. 그래서 -물론 내 사진 실력이 없어서일지도ㅋㅋ(부인하는 중)- 모든 곳을 다 찍어댔다. 막 찍어대다 보니 걸어왔더니 대충 1시간이 되었다. 앞에서처럼 정말 시원했는데 한 번 걸어갔다 오니 몸이 찔 것 같이 더웠다. 햇빛도 장난 아니게 셌다. 우리가 버스 근처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사진을 프린트 했던지 사진들을 나눠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가 싶더니 여자아이들에게 근래에 한국에서 유행하던 머리끈들이 담겨있는 비닐봉지를 주며 여자아이들에게는 이걸 주라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게 시작됐다. 조금은 떨렸다.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다. 어떤 식으로 줘야 될지도 몰랐고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결국에는 두 손도 한 손도 아니게 그냥 줬다. 가끔씩 성별 구분이 안 되는 얘들도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남자애에게 머리끈을 줬다;; 미안.. 계속 나눠주다 보니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없는 아이들은 그냥 넘기고 또 줬다.
아이들에게 사진들을 나눠준 후 드디어 똘렌샵으로 배 타고 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중간 사이즈의 배를 타고 갔다. 아무래도 집에서 사진으로 봤을 때 다 나룻배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타서 걱정 됐는데 그나마 크기가 있는 배라서 다행이었다. 배를 타고도 모든 곳이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배 안에서도 카메라에서 손을 떼지 못 했다. 아빠는 맨 뒷 자석에서 우아하게 앉았다. 그럼 그렇지, 우리 아빤데. 정말로 수상집에서 샤워하는 사람도 봤고, 힘겹게 노를 저어 고기를 잡는 할아버지들, 아이들도 봤고, 아예 물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잡는 사람도 봤다. 정말로, 여긴 예술이다.
우리 앞자리에는 사진기를 가지고 있는 사진사 같이 생긴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정말 한 번 씩만 찍었다. 나는 계속 찍는데도 좋은 사진이 나올까 말깐데 그 사람은 확실한가보다. 아직 나는 훌륭한 사진가가 되려면 멀었나.
중간에 간식도 나눠주셨다. -물론 돈은 다 냈지만- 내가 싫어하는 망고도 여기서는 짱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대과일을 먹어놓고 맛 없다고 하면 몹쓸 말이다. 진짜 열대과일도 안 먹어봤으면서 어디서 우리 열대과일의 욕을 해? 열대과일의 효과를 봤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배의 엔진소리가 갑자기 꺼졌다. 30분은 더 온 것 같았다. 엔진을 끄니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그 대신 모터로 인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던 파도의 움직임은 더해서 조금의 멀미가 있었다. 똘렌샵에서 일몰을 보고 간다고 했기에 주변에 수상가옥이 없는 쪽에서 배를 세웠다. 주변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일몰은 무슨, 그냥 이 자체로도 아름다운 걸.
한참 수다를 떨다가 아이들에게 사진을 나눠주시던 아저씨께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엄마가 물어 본 킬링필드에 대한 이야기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스토리였기에 관심 있게 들었다.
원래는 일몰을 볼 계획이었으나 바람이 너무 셌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다시 엔진을 켜고 돌아왔다. 돌아와도 똑같은 길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김영갑 씨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똑같은 장소다. 방향과 시간이 바꿨을 뿐 그래도 미세한 차이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어느 새 배를 탔던 장소로 돌아왔다. 약 1시간은 더 보낸 것 같았다. 땅이 보이는 동시에 뭔가가 보였다. 어떻게 알았던지, 아니면 아까 전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지 사진을 찍어줬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있었다. 그 바로 뒤에는 버스가 있었다. 이렇게 환영받기는 또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1시간 전에 또 본 고마운 똥빼 아저씨와 그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히히 기분이 좋았다. 다 쓰담쓰담해주고 싶었다. 차에 탔더니 드디어 일몰이 확실히 보였다. 졸려서 도저히 사진 찍을 힘이 없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똘렌샵에 갔다가 다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식당은 캄보디아 전통식당인데 거기서 매운 소스만 뺀 곳이었다. 역시 불은 예상대로 어두침침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무래도 자다 깼는데 어두침침하니 여기가 꿈인가 생신가. 분간할 수가 있어야지.
같이 아이들에게 사진을 나눠주고 배에서 가족 사진을 찍어줬던 오빠 2명과 사진 나눠주는 똥배 아저씨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음식은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입맛도 없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데다 졸리고 정신도 없어서 도저히 먹는 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랑 엄마, 예희는 정말 못 먹었다. 아무리 매운 그 향신료를 뺏다 하지만 여기 전통적인 향신료가 따로 있었기에 나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먹으면서 2명의 오빠들과 함께 얘기를 나눴다. 그 오빠들도 몇 주 동안 여행중이다고 했다. 외대의 아랍어과라고 해서 엄마가 우리 조카도-경훈이 오빠도- 이번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점잖고 엄청 착했다. 완전 신기했다. 그리고 얼굴, 키 어느 곳에서 빠지는 곳이 없었다. -소개해 줄 아는 언니라도 없나;;- 그 오빠 둘은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어댔다. 정말 잘 먹었다. 배낭 여행 수준으로 오니 마음 편히 먹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빠가 돈만 있으면 음식 한 번 사주고 싶다고 했다.
밥 먹으며 아이들에게 사진 나눠 주셨던 분에게 내일 일정을 알려드리며 고칠 것 있는지 여쭤봤다. 안타깝지만 고마운 소식이 하나 있었다. 오늘 같이 요즘 날씨가 흐리고 시원해져서 -캄보디아 맞춰 주자면 너무 추워져서- 일출이 보이지 않으니 아침부터 무리해서 하지 말고 잠이나 실컨 자서 편안히 나머지 여행을 하라고 하셨다. 하마터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껌껌한 하늘 구경할 뻔 했다.
밥을 배부르지 않게 먹은 후(;;)나왔다. 껌껌한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 같았다. 밖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연적인 어두움이 훨씬 더 나았다. 다시 버스에 탄 후 이제는 또 다른 어딘가로 고고. 가면서 상점들이 나오자 이것들은 갤러리들이고 이런 곳에 그림 좋은 게 많다며 꼭 둘러보라고 하셨다. 안으로 길게 뻗어진 길이 보이자 갑수아저씨가 여기서 구경을 할 사람들은 내리라고 하셨다. 솔직히 피곤해서 호텔에서 뻗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무이 아부지가 내리시는 난들 어떻하나. 분명히 몇 초 전 눈으로 갤러리들의 위치를 모두 훑었는데 막상 내리니 갤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우선은 올드 마켓이란 그 곳으로 고고!
올드마켓과 그 옆에 있는 나이트 마켓은 오전에 갔던 프싸라와는 달리 명백한 외국인들을 위한 시장이었다. 모든 상점의 직원들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이들 역시 예희 말에 의하면 ‘돌무더기’의 존재감으로 인해 사는 사람들이었다.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엄마가 미리 검색해 놓거나 찾아 놓은 것들이 많아서 도움이 되었다. 유명한 식당이라는 red piano는 크기의 웅장함만을 보곤 지나쳤다. 역시나 직원들 외에는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외국인이었다. 곳곳에 한국말이 자주자주 들려왔기에 프싸라 처럼 소통의 걱정은 오히려 없어서 이상했다. 특별한 물건이 있는 건 아니었고 우리나라의 인사동 같이 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을 파는 많은 상점들에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물건들의 값은 예상보다 너무 비쌌다. 그래서 처음 2~3집은 모두 지나쳤다. 많은 상점들을 계속 보다보니 상점들의 종류를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갑수 아저씨께서 소개해 주신 갤러리 혹은 작은 그림 가게, 한국에도 있건만 여기서 유독 많이 보이는 닥터 피쉬, 유별나게 시원하다는 마사지 집들, 은이 무지 싸다는 금은방들, 현지 음식이 아닌 대부분 외국 음식들인 음식점들, 그리고 보통 상점들. 아휴, 이게 적은 것은 아니지만 반복되고 반복되니 이제 조금은 지겨웠다.
가다보니 우리 엄마 부류의 아주마 영어를 하시는 진짜 한국 아줌마를 만났다. 상점에서 목도리를 파는데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현지인에게 하는 말, “나 저기서 가방도 샀고 스카프도 많이 많이 샀어요! 좀 깍아 줘요~”딱 봐도 얼굴이 검은 현지인이 앞에 떡하니 서있는데 한국말이 술술 나오는 이유는? 그리고 더 웃긴 건 현지인의 반응이었다. 이런 아주머니들을 많이 접해 봤는지 계속 해서 노노노노 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국 아줌마의 힘이다. 아무도 저 정도의 수준에 달하지 못할 것이니라.
다시 상점들을 지나고 지나고 지나 엄마의 예비 조사에 의한 ‘블루 펌킨스’라는 올드마켓에서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 역시나 여기도 외국인들로 북적북적. 안에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실내보다 오히려 테라스(?)가 더 시원했다. 실내에 발을 들이자 마자 낯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외국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이고나. 아까 배가 곪은 오빠 2명이 이번에는 이곳에서 아이스크림 컵을 각자 하나씩 들고선 즐기고 있었다. 다시 봐도 정말 예의 바르다. 어휴, 짝 없는 이쁜 언니 없나;;
가게의 값이나 내부 인테리어, 아이스크림은 모두 베스킨라벤스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맛있긴 하다만 경제적인 부담감을 안겨주는 나를 유혹하는 맛난 가게. 우리는 초코, 녹차, 그리고 망고 맛을 먹었다. 사실 망고를 정말로 싫어하는데 이 곳의 망고에는 반해버려서 처음으로 내가 자진해서 망고를 먹겠다고 했다. 맛도 있었지만 세 가지 맛이 섞여서 맛이 비교적으로 연한 망고 맛 아이스크림은 초코와 녹차로 덮여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니 엄마가 여자 종업원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영어를 꽤 잘 했다.-발음은 여전히 못 들어줄 캄보디아 발음이었지만- 엄마가 예비조사를 한 곳들의 이름을 대며 위치를 물었다. 바뻐보이긴 했지만 손님들과 대화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었다. 긴 대화를 끝낸 후에도 서빙을 하는 언니를 다시 찾아가서 나이트 마켓의 위치와 올드,나이트 마켓의 차이를 물었다. 올드 마켓, 나이트 마켓은 역시나 모두 외국인을 위한 시장이고 올드 마켓은 보통 낮에 즐기는 반면 나이트 마켓은 말 그대로 야밤의 쇼핑을 위한 시장이라고 했다. 파는 건 별 다를 것 없다고 한다.
슝슝 나이트 마켓으로 향했다. 올드 마켓과 나이트 마켓은 정말 가까이 있었다. 나이트 마켓은 정말 컸지만 그냥 한 골목만을 공략해서 봤다. 이곳은 은이 정말로 싸다고 한다. 엄마의 조사에는 무조건 값을 반으로 깍으라고 되어있었다. 엄마가 말하길 외국인들이 모르고 그냥 사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이유는 금방 나타났다.
원래 목걸이나 팔찌, 발찌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예전에 샀던 꽃 귀걸이가 너무 이뻐서 꽃 목걸이와 꽃 팔찌를 사려고 단단히 마음 먹었다.
나이트 마켓은 올드마켓과 달리 가게가 하나하나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재래 시장 같이 텐트 안에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었다. 나이트 마켓에 가자마자 캄보디아 마켓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우선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관찰을 한다. 그런 후 사기로 마음을 먹곤 가격을 물어보면 은근히 비싼 값을 부른다. 손님이 고개를 저으며 너무 비싸다고 하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Ok, discount for you라며 선심을 써주는 듯 하다. 내린 값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 가려고 하면 표정과 몸의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바뀌면서 'no no madam madam. Discount discount!'라고 한다. 많은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은 이렇게 말하며 계산기를 내미며 너가 원하는 가격을 쓰라고 한다. 그런 후 만약 너무 낮은 가격을 부르면 nono라며 정말 안 된다는 건지 동정심을 유발하는지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한두 번쯤 이런 일을 겪는다면 정말 열심히 장사를 하는구나, 영어도 잘하네라며 신기해 하지만 한시간을 쇼핑하며 한 번도 빠짐없이 이런 소리를 듣고 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외국에 비해 캄보디아는 가격이 무지 싼 편이기에 비싸게 불러도 아직 외국에 비해서 싸다는 사실을 알기에 많은 손님들을 접해 본 현지인들은 조금이라도 비싼 값을 받고 파려고 바가지 씌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속아서 며칠 동안 그렇게 사고 간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옆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는 discount, discount 소리를 듣고는 알아채겠지.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캄보디아 사람들의 캄글리쉬 발음을 따라하며 예희와 놀았다. 거기서는 답답하고 짜증나고 힘들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냥 추억이었다. 사실 우리도 몇 십년 전에는 쪼콜릿을 나눠주는 미국 군인들과 외국인들에게 그렇게 장사를 했다.
한 시간을 넘어선 쇼핑을 하고 나니 벌써 팔찌, 컵 밭침대, 그림, 목걸이 펜던트 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은 팔찌들을 사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사기보다는 흥정하는 데-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대충 사야 할 것들은 산 후였다. 사실 하나하나를 살 때 마다의 discount discount라는 소동이 있었지만 하나하나 쓰려면 2페이지는 넘어갈 것 같다. 그 사람들과의 지겨운 흥정을 쓸 필요까지는 없는 듯.
나이트 마켓에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곤 툭툭이를 잡으러 나왔다. 툭툭이를 잡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마지막 흥정이다. 어느 툭툭이 아저씨가 우리에게 끝까지 따라오며 도로 흥정을 해 주어서 그제서야 탔다.
드디어 도착이다. 도착을 했더니 시간이 꽤 되었다. 역시 툭툭이 타는 건 정말 좋았다. 앉아서 바람을 쐐며 온 몸이 덜컹덜컹 거리니 피곤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이번 툭툭이는 나와 아빠 좌석에는 뒷 밭침대가 없어서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와, 정말 이제는 잘 수 있구나. 어제는 12시가 넘어선 시각까지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었지만 오늘은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수건을 두르고 기행문을 조금 쓰고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히히 good night
와우~ 대단한 다희.
존경스럽다.
이렇게 긴 장문을 쓴 것도 대단하지만
글 재주와 재미가 함께해서
마치 지금 같이 여행을 다니는 기분이 드네.
행복을 쥐어 준 다희 아가씨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