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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을 통한 하나님 사랑
진주 신광교회 유영옥
길고 긴 정말 다사다난했던 2000년 말과 2001년 초.
남편은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쉬고 싶어했다. 부교역자로 9년 동안 교회들을 섬겨오면서, 교역의 고충과 정신적인 부담감을 많이 가졌는지 얼마 간 쉬고 싶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해 왔다. 더구나 기침이 잦고, 비염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콧물이 심해서 매우 힘들어했다.
중학교 때 모(母)교회 전도사님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고 그 후 대학 때까지 예수님에 빠져버린 남편은,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요나가 가기 싫어한 니느웨 성을 향해서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고등학교 때 서약한 교역 길과는 다른 방향을 대학생활 후반에 걷다가, 여러 해 방황한 후에 뒤늦게 과거의 그 열정을 회복하여 신대원을 입학했었다. 대학원 시절, 새로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밤에 잠이 오지 아니할 정도로 기뻐서, 동료들이 다 자는 새벽 2시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부흥회를 자주 했었단다.
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남편은 설교 준비를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할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는데,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몸도 약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정신적인 어려움들 때문에 여건이 되면 쉬면서 자신을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이는 당시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갈등을 겪어오던 터라 여기저기 다른 사역지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임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면서, 경북 예천의 어느 미자립 교회까지 선을 보고 왔는데도 연락이 오지 앉자, 드디어 임지가 결정되지 않더라도 연말에는 무조건 사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남노회의 한 교회를 후임지로 예비하셨는지, 12월 마지막 주간 그것도 29일 금요일 밤에 지금의 교회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명을 위해 걸리는 최소한 몇 달간만이라도 쉬기로 작정하고 마지막 주일예배(31일)와 송구영신 예배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임지를 사임했다. 더구나 후임지에도 사정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이사를 해야 했기에, 우리의 쉼은 그야말로 이유 있는 명분이 되었다.
임시로 이삿짐을 푼 곳은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7년 정도를 비워 둔 경남 합천의 고향집이었다. 이사한 날은 새 해가 시작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 추웠다. 오랫동안 사람이 거처하지 않던 집이라 쥐들의 전장이 되어 있었고, 외풍이 너무 심해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바람막이를 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그 해 따라 눈은 얼마나 자주 많이 오는지, 새해 첫 주일도, 전날 토요일에 이웃마을에 있는 모(母)교회의 목사님을 찾아뵙고 함께 예배할 마음에 들떠서 인사까지 드렸는데, 가정기도회로 대신해야 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답답하고 불편한 우리의 칩거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사실, 쉬려고 했던 것은 남편의 바램이었지만 내가 더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교역자 아내의 미숙함이 세 아이를 기르면서 누적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과로 등이 겹쳐, 이미 나의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3개월 전부터 메스꺼움과 식욕부진으로 식사를 거의 못한 상태로 수유를 해온 데다, 2년 터울로 가진 세 아이의 임신으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보였던 탈장증세의 악화와 자반증(주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다는 피부에 좁쌀크기의 붉은 반점이 돋는 증세), 거기다가 막내를 거의 업고 키우다 시피 했기에 요통에다 종아리까지 저리고 아파서 기어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와 추위 등으로 인해, 나의 몸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히 집안 일은 모두 남편의 차지가 되었고, 나는 검사와 진단을 위해서 병원 다니기에 바빴다. 몹쓸 병에 걸린 줄 알았으나 위 내시경 검사에서는 급성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컴퓨터 단층촬영 상에서는 수술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당분간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요추 디스크로 진단을 받았다.
나의 심각한 상태를 인지한 남편은 엄마 몸에만 붙어 있겠다는 딸을 대신 봐주면서, "아이가 울어도 절대 안아주거나 업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엄포를 놓았다. 위로 여섯 살과 네 살 난 두 아들은 그런 대로 견뎠으나, 문제는 10개월 된 막내 딸 예영이었다.
예영이는 이미 2000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일주일 가량을 홍역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었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과 추위로 인하여 이사한 이후부터 기침이 계속되었다. 심한 기침이 심상치 않아 근처의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홍역 후 폐렴」이라는 진단과 함께, 응급사태가 발생할 지 모르니 바로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홍역 치료 후 아이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할 수 없이 위로 아이 둘을 손위 시누이 댁에 맡기고, 이사 한지 일 주일만에 홍역으로 입원했던 대구의 병원에 예영이를 다시 입원시키면서도, 그 때까지는 우리 가족이 추위를 이기는 기회로 삼으며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예영이는 폐렴에 장염까지 동반해서 계속 설사를 했고, 잦은 진찰과 병원생활로 인해 흰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기겁을 했기에, 눈만 뜨면 업히려고 했다. 나는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통증을 줄이기 위하여 팔꿈치로 복도의 난간을 짚으며 견디거나, 고통이 심할 때는 병동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상비용 진통제를 얻어먹으면서 간호를 해야 했다.
그렇게 일 주일 간의 입원 후 퇴원할 즈음에, 위의 아들 둘을 맡긴 김에 탈장수술을 받으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어서, 다시 예영이를 맡길 곳을 수소문하다가 천안에서 목사후보생들을 가르치는 큰오빠 댁에 연락을 하니, 올케언니가 바쁜 중에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퇴원을 하면서 시누이 댁에 맡겼던 두 아들을 다시 포항의 시숙 댁으로 보내고 천안으로 떠나면서, 가족들이 흩어져서 지내야 하는 현실의 답답함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천안에 도착하자마자 올케언니는 이 기회에 젖을 떼어야 한다면서 나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았다. 낯선 집에, 낯선 사람에, 젖까지 뗐으니 아이의 긴장은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선 딸 때문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휴식을 즐길 수 있었기에 오히려 시원섭섭했다.
다음날 큰오빠 댁에서 꽤 멀리 떨어진 단국대학병원으로 갔다. 구정을 앞둔 대학병원은 일주일 정도 남은 설이 지나야 수술이 가능하단다. 같이 간 올케언니는 "탈장수술을 위해 위의 두 아들을 떼어놓고 왔고, 젖먹이 젖까지 떼고 왔기에, 선처를 부탁한다."고 사정사정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틀 뒤 그것도 첫 시간인 오전 8시로 수술 시간이 잡혔다.
수술 전날인 그 다음날 수술준비를 위해 미리 입원했고, 외숙모에게 안겨서 병실을 나가는 딸을 보내면서 마치 영영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많이도 울었지만, 내가 건강을 회복해야만 가족들을 돌볼 수 있고 딸도 잘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실로 너무 오랜만에 편안하게 누어서 쉴 수 있었고 남편의 간호를 받으며 수술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그 날 밤은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술 당일 오전 7시 45분 경, 침대차에 아주 편안히 누워 수술실에 도착했고, 누군가 "기도하자"는 말에 대답하고는 마취에 들어갔는데, 그 사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천안 역시 작년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는데, 딸이 올케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수술한 엄마를 만나러 오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났던 것이다. 차가 하천으로 떨어지면서 유리창이 깨어졌고, 딸은 창문 밖으로 떨어져 물 속에 빠졌다고 한다. 그 일로 차는 너무 많이 부서져서 폐차되었고, 운전한 올케언니는 늑골골절과 여기저기에 타박상이 있었는데, 다섯 명이 같이 차를 탔지만, 유독 우리 애만 쇄골골절과 얼굴과 머리에 심하게 유리가 박히고 얼굴 살점도 떨어져 나가는 등 가장 많이 다친 것이다.
피를 많이 흘렸고 유리가 상당히 박혔지만 뇌에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본래는 수술시간이 오후 4시로 정해졌는데 그날 따라 더 위급한 환자가 너무 많아 다음날 오전 10시에야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이 계속 연기되자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화가 난 남편의,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는 강한 항의와 독촉으로 그나마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수술할 때까지 응급실에서 엄마인 내가 입원한 옆 병실로 입원시켰지만, 나는 아이를 보지 않기로 했다. 아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리가 박힌 채로 26시간을 방치해 둔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어찌 본단 말인가! 간간이 옆방에서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울었다. 애처로워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살아있으니 감사요, 머리에 이상이 없다니 또 감사가 아닌가.
삼일 째 되던 날, 아이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로 인한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서 있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아이를 만나러 옆방으로 갔다. 머리에 흰 스타킹 모양의 천을 두르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데, 엄마를 봐도 아는 척도 않을 정도로 아이는 지쳐 있었다. 아빠에게는 좀처럼 가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아빠와 떨어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물 한 방울조차도.
연거푸 세 번의 입원으로 정맥주사 유지가 힘들어 소아과 병동으로 가서 소아 전문 간호사에게 주사를 맞기도 했지만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주사를 중단할 때도 많았다. 억지로 주사기를 가지고 입에다 물을 넣어주어도 짜증만 낼 뿐, 다치기 전의 왕성한 식욕은 사라지고 없었다.
예영이와 나흘만에 병원 구내식당을 찾았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휠체어를 타고 가는 내 모습이 너무도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입맛회복을 위해 갔으나, 여전히 먹을 수 없는 나에 비해 딸은 밥을 보자마자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서 밥이 잘 들어가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울기까지 하면서 정신 없이 먹었다. 안쓰러움과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 '이제야 딸이 정말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남편과 딸을 병원에 두고, 나는 퇴원을 하여 큰오빠 댁에서 쉬고 또 쉬고 먹고 또 먹었다. 나의 몸 회복은 아주 느렸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쉬어도 쉬어도 앉을 기운조차 없었다. 먹는 것도 쉬는 것도 힘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도 품고만 지냈던 아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후련할 정도로 지치고 약해져 있었다. 모두들 설을 거꾸로 쉬었다.
드디어 딸은 퇴원을 했고, 아이의 간호에 지친 남편은 처가댁의 불편함과 남겨 두고 온 두 아들을 생각해서 온 가족이 포항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냉정해지기로 했다. 아직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이 들었기에 자신이 없었다. 나 스스로를 아이들에게 맞추어 완벽을 요구하다보니 내 몸이 이 지경까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허락된 시간이기에,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더 돌보고 싶었고, 내친김에 나는 서울로 올라가 디스크 전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기로 했다.
결국 남편과 예영이만 큰댁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갔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예약을 해야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어 당일 진료를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면서 아플 때 오라는 반가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동안 너무 잘 먹고 잘 쉬었기 때문인가?' 사실은 진료 받으러 가기 이틀 전부터 이상하게 기지개가 켜지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디스크를 회복하실 줄이야. 걸리는 것 없이 평온함을 누리는 가운데 자반증도 어느 사이 나아 있었다. 벼랑끝에 서서 대롱대는 나를 이런 방법으로나마 강권적으로 쉬게 하심이, 그래서 내 몸의 모든 불편함을 회복하게 하심이 너무도 감사했다. 할렐루야.
포항으로 내려간 남편은 아들 둘과 딸을 돌보느라 너무 지쳐서 견딜 수 없었는지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예영이가 거의 24시간 잠도 안 자고 울어서 도저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우니 쉬는 것도 좋지만 빨리 내려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친정 식구들은 만류했지만 남편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포항을 내려가니, 예영이에게 시달린 남편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밤마다 우리 부부는 딸을 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야간 드라이브를 즐겼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참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무조건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한밤중에 응급실로 가서 쇄골 골절을 치료하기 위해 감았던 붕대를 풀었더니, 겨드랑이의 발적이 심하고 살갗이 벗겨져 헐어 있었다. '큰 사고로 인한 정신적 부담감에다 그런 불편함으로 말도 못하는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후로도 예영이는 한밤중에 화들짝 깨어나 이유 없이 심하게 울어대기가 예사였다. 아마도 머리 여기 저기에 박혀 있던 자그마한 유리 파편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또 다시 시작된 예영이와의 부대낌으로 부담이 되었는지 내 수술 부위에는 피가 고였고, 통증이 있었으며, 피를 빼내는 치료를 계속해서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불평하기보다,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주어지는 여건에 감사하며 지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쉼 아닌 쉼 석 달이 지난 후, 작년 4월 초에 이곳 임지로 와서, 지금까지 우리는 허락하신 교회를 최선을 다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돌아보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 같은 좌절의 순간들이었지만 그 어두운 동굴을 지나니 안개는 걷히고 따사롭고도 밝은 찬란한 햇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의 얼굴엔 여전히 흉터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분께, 가능하면 다시 수술하지 않아도 되도록 낫게 해 주시라고, 또 만약 수술하게 된다면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면서, 그 흉터자국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절대로 앞서서는 안 된다."는 채찍으로 다가온다. 하나님 사역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몇 달만이라도 쉬어보자고 했던 것이 결과적으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제대로 쉬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지 1년이 지난 요즈음, 나는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몸도 회복이 되었고 마음마저 평안을 찾았다. 26개월 된 예영이는 지금의 사역지에 와서 많이 자랐다.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애교를 부리면서 안기기도 하고 동요를 곧잘 부르고 춤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오빠들이 성경 암송을 하면 발음도 안 되는 소리로 따라할 때는 얼마나 귀여운지.
남편은 두 아들이상으로 딸을 예뻐하여 '보물 덩어리'라고 부르는데, 바른 목회의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교량역할을 그 딸이 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우리를 들어서 당신의 나라 일꾼으로 세우셨으나, 우리의 고집과 생각이 앞섰을 때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딸을 들어서 무지한 우리를 깨닫게 하셨을까?
우리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는 남편의 첫 단독 목회지이자 특수한 지역이다. 이곳으로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영이의 사고를 통해서 상처 난 성도들을 쓸어안고 감싸는 방법을 단시간에 훈련받게 하신 것 같다. 무능하고 무지한 우리라도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당신의 방법으로 연단 시키셔서 당신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황송하도록 고맙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부부의 입에서 '주의 사역을 쉬어봤으면 ….' 하는 소리를 다시는 내지 않으리라.
부족함 투성이지만 우리 부부를 자신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세우시고, 그 사역에 충실하도록 다양하게 채찍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끝)
진주 신광교회 유영옥
길고 긴 정말 다사다난했던 2000년 말과 2001년 초.
남편은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쉬고 싶어했다. 부교역자로 9년 동안 교회들을 섬겨오면서, 교역의 고충과 정신적인 부담감을 많이 가졌는지 얼마 간 쉬고 싶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해 왔다. 더구나 기침이 잦고, 비염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콧물이 심해서 매우 힘들어했다.
중학교 때 모(母)교회 전도사님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고 그 후 대학 때까지 예수님에 빠져버린 남편은,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요나가 가기 싫어한 니느웨 성을 향해서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고등학교 때 서약한 교역 길과는 다른 방향을 대학생활 후반에 걷다가, 여러 해 방황한 후에 뒤늦게 과거의 그 열정을 회복하여 신대원을 입학했었다. 대학원 시절, 새로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밤에 잠이 오지 아니할 정도로 기뻐서, 동료들이 다 자는 새벽 2시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부흥회를 자주 했었단다.
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남편은 설교 준비를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할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는데,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몸도 약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정신적인 어려움들 때문에 여건이 되면 쉬면서 자신을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이는 당시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갈등을 겪어오던 터라 여기저기 다른 사역지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임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면서, 경북 예천의 어느 미자립 교회까지 선을 보고 왔는데도 연락이 오지 앉자, 드디어 임지가 결정되지 않더라도 연말에는 무조건 사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남노회의 한 교회를 후임지로 예비하셨는지, 12월 마지막 주간 그것도 29일 금요일 밤에 지금의 교회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명을 위해 걸리는 최소한 몇 달간만이라도 쉬기로 작정하고 마지막 주일예배(31일)와 송구영신 예배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임지를 사임했다. 더구나 후임지에도 사정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이사를 해야 했기에, 우리의 쉼은 그야말로 이유 있는 명분이 되었다.
임시로 이삿짐을 푼 곳은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7년 정도를 비워 둔 경남 합천의 고향집이었다. 이사한 날은 새 해가 시작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 추웠다. 오랫동안 사람이 거처하지 않던 집이라 쥐들의 전장이 되어 있었고, 외풍이 너무 심해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바람막이를 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그 해 따라 눈은 얼마나 자주 많이 오는지, 새해 첫 주일도, 전날 토요일에 이웃마을에 있는 모(母)교회의 목사님을 찾아뵙고 함께 예배할 마음에 들떠서 인사까지 드렸는데, 가정기도회로 대신해야 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답답하고 불편한 우리의 칩거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사실, 쉬려고 했던 것은 남편의 바램이었지만 내가 더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교역자 아내의 미숙함이 세 아이를 기르면서 누적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과로 등이 겹쳐, 이미 나의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3개월 전부터 메스꺼움과 식욕부진으로 식사를 거의 못한 상태로 수유를 해온 데다, 2년 터울로 가진 세 아이의 임신으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보였던 탈장증세의 악화와 자반증(주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다는 피부에 좁쌀크기의 붉은 반점이 돋는 증세), 거기다가 막내를 거의 업고 키우다 시피 했기에 요통에다 종아리까지 저리고 아파서 기어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와 추위 등으로 인해, 나의 몸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히 집안 일은 모두 남편의 차지가 되었고, 나는 검사와 진단을 위해서 병원 다니기에 바빴다. 몹쓸 병에 걸린 줄 알았으나 위 내시경 검사에서는 급성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컴퓨터 단층촬영 상에서는 수술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당분간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요추 디스크로 진단을 받았다.
나의 심각한 상태를 인지한 남편은 엄마 몸에만 붙어 있겠다는 딸을 대신 봐주면서, "아이가 울어도 절대 안아주거나 업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엄포를 놓았다. 위로 여섯 살과 네 살 난 두 아들은 그런 대로 견뎠으나, 문제는 10개월 된 막내 딸 예영이었다.
예영이는 이미 2000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일주일 가량을 홍역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었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과 추위로 인하여 이사한 이후부터 기침이 계속되었다. 심한 기침이 심상치 않아 근처의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홍역 후 폐렴」이라는 진단과 함께, 응급사태가 발생할 지 모르니 바로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홍역 치료 후 아이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할 수 없이 위로 아이 둘을 손위 시누이 댁에 맡기고, 이사 한지 일 주일만에 홍역으로 입원했던 대구의 병원에 예영이를 다시 입원시키면서도, 그 때까지는 우리 가족이 추위를 이기는 기회로 삼으며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예영이는 폐렴에 장염까지 동반해서 계속 설사를 했고, 잦은 진찰과 병원생활로 인해 흰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기겁을 했기에, 눈만 뜨면 업히려고 했다. 나는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통증을 줄이기 위하여 팔꿈치로 복도의 난간을 짚으며 견디거나, 고통이 심할 때는 병동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상비용 진통제를 얻어먹으면서 간호를 해야 했다.
그렇게 일 주일 간의 입원 후 퇴원할 즈음에, 위의 아들 둘을 맡긴 김에 탈장수술을 받으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어서, 다시 예영이를 맡길 곳을 수소문하다가 천안에서 목사후보생들을 가르치는 큰오빠 댁에 연락을 하니, 올케언니가 바쁜 중에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퇴원을 하면서 시누이 댁에 맡겼던 두 아들을 다시 포항의 시숙 댁으로 보내고 천안으로 떠나면서, 가족들이 흩어져서 지내야 하는 현실의 답답함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천안에 도착하자마자 올케언니는 이 기회에 젖을 떼어야 한다면서 나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았다. 낯선 집에, 낯선 사람에, 젖까지 뗐으니 아이의 긴장은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선 딸 때문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휴식을 즐길 수 있었기에 오히려 시원섭섭했다.
다음날 큰오빠 댁에서 꽤 멀리 떨어진 단국대학병원으로 갔다. 구정을 앞둔 대학병원은 일주일 정도 남은 설이 지나야 수술이 가능하단다. 같이 간 올케언니는 "탈장수술을 위해 위의 두 아들을 떼어놓고 왔고, 젖먹이 젖까지 떼고 왔기에, 선처를 부탁한다."고 사정사정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틀 뒤 그것도 첫 시간인 오전 8시로 수술 시간이 잡혔다.
수술 전날인 그 다음날 수술준비를 위해 미리 입원했고, 외숙모에게 안겨서 병실을 나가는 딸을 보내면서 마치 영영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많이도 울었지만, 내가 건강을 회복해야만 가족들을 돌볼 수 있고 딸도 잘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실로 너무 오랜만에 편안하게 누어서 쉴 수 있었고 남편의 간호를 받으며 수술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그 날 밤은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술 당일 오전 7시 45분 경, 침대차에 아주 편안히 누워 수술실에 도착했고, 누군가 "기도하자"는 말에 대답하고는 마취에 들어갔는데, 그 사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천안 역시 작년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는데, 딸이 올케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수술한 엄마를 만나러 오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났던 것이다. 차가 하천으로 떨어지면서 유리창이 깨어졌고, 딸은 창문 밖으로 떨어져 물 속에 빠졌다고 한다. 그 일로 차는 너무 많이 부서져서 폐차되었고, 운전한 올케언니는 늑골골절과 여기저기에 타박상이 있었는데, 다섯 명이 같이 차를 탔지만, 유독 우리 애만 쇄골골절과 얼굴과 머리에 심하게 유리가 박히고 얼굴 살점도 떨어져 나가는 등 가장 많이 다친 것이다.
피를 많이 흘렸고 유리가 상당히 박혔지만 뇌에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본래는 수술시간이 오후 4시로 정해졌는데 그날 따라 더 위급한 환자가 너무 많아 다음날 오전 10시에야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이 계속 연기되자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화가 난 남편의,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는 강한 항의와 독촉으로 그나마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수술할 때까지 응급실에서 엄마인 내가 입원한 옆 병실로 입원시켰지만, 나는 아이를 보지 않기로 했다. 아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리가 박힌 채로 26시간을 방치해 둔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어찌 본단 말인가! 간간이 옆방에서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울었다. 애처로워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살아있으니 감사요, 머리에 이상이 없다니 또 감사가 아닌가.
삼일 째 되던 날, 아이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로 인한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서 있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아이를 만나러 옆방으로 갔다. 머리에 흰 스타킹 모양의 천을 두르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데, 엄마를 봐도 아는 척도 않을 정도로 아이는 지쳐 있었다. 아빠에게는 좀처럼 가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아빠와 떨어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물 한 방울조차도.
연거푸 세 번의 입원으로 정맥주사 유지가 힘들어 소아과 병동으로 가서 소아 전문 간호사에게 주사를 맞기도 했지만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주사를 중단할 때도 많았다. 억지로 주사기를 가지고 입에다 물을 넣어주어도 짜증만 낼 뿐, 다치기 전의 왕성한 식욕은 사라지고 없었다.
예영이와 나흘만에 병원 구내식당을 찾았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휠체어를 타고 가는 내 모습이 너무도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입맛회복을 위해 갔으나, 여전히 먹을 수 없는 나에 비해 딸은 밥을 보자마자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서 밥이 잘 들어가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울기까지 하면서 정신 없이 먹었다. 안쓰러움과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 '이제야 딸이 정말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남편과 딸을 병원에 두고, 나는 퇴원을 하여 큰오빠 댁에서 쉬고 또 쉬고 먹고 또 먹었다. 나의 몸 회복은 아주 느렸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쉬어도 쉬어도 앉을 기운조차 없었다. 먹는 것도 쉬는 것도 힘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도 품고만 지냈던 아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후련할 정도로 지치고 약해져 있었다. 모두들 설을 거꾸로 쉬었다.
드디어 딸은 퇴원을 했고, 아이의 간호에 지친 남편은 처가댁의 불편함과 남겨 두고 온 두 아들을 생각해서 온 가족이 포항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냉정해지기로 했다. 아직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이 들었기에 자신이 없었다. 나 스스로를 아이들에게 맞추어 완벽을 요구하다보니 내 몸이 이 지경까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허락된 시간이기에,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더 돌보고 싶었고, 내친김에 나는 서울로 올라가 디스크 전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기로 했다.
결국 남편과 예영이만 큰댁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갔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예약을 해야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어 당일 진료를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면서 아플 때 오라는 반가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동안 너무 잘 먹고 잘 쉬었기 때문인가?' 사실은 진료 받으러 가기 이틀 전부터 이상하게 기지개가 켜지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디스크를 회복하실 줄이야. 걸리는 것 없이 평온함을 누리는 가운데 자반증도 어느 사이 나아 있었다. 벼랑끝에 서서 대롱대는 나를 이런 방법으로나마 강권적으로 쉬게 하심이, 그래서 내 몸의 모든 불편함을 회복하게 하심이 너무도 감사했다. 할렐루야.
포항으로 내려간 남편은 아들 둘과 딸을 돌보느라 너무 지쳐서 견딜 수 없었는지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예영이가 거의 24시간 잠도 안 자고 울어서 도저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우니 쉬는 것도 좋지만 빨리 내려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친정 식구들은 만류했지만 남편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포항을 내려가니, 예영이에게 시달린 남편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밤마다 우리 부부는 딸을 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야간 드라이브를 즐겼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참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무조건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한밤중에 응급실로 가서 쇄골 골절을 치료하기 위해 감았던 붕대를 풀었더니, 겨드랑이의 발적이 심하고 살갗이 벗겨져 헐어 있었다. '큰 사고로 인한 정신적 부담감에다 그런 불편함으로 말도 못하는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후로도 예영이는 한밤중에 화들짝 깨어나 이유 없이 심하게 울어대기가 예사였다. 아마도 머리 여기 저기에 박혀 있던 자그마한 유리 파편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또 다시 시작된 예영이와의 부대낌으로 부담이 되었는지 내 수술 부위에는 피가 고였고, 통증이 있었으며, 피를 빼내는 치료를 계속해서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불평하기보다,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주어지는 여건에 감사하며 지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쉼 아닌 쉼 석 달이 지난 후, 작년 4월 초에 이곳 임지로 와서, 지금까지 우리는 허락하신 교회를 최선을 다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돌아보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 같은 좌절의 순간들이었지만 그 어두운 동굴을 지나니 안개는 걷히고 따사롭고도 밝은 찬란한 햇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의 얼굴엔 여전히 흉터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분께, 가능하면 다시 수술하지 않아도 되도록 낫게 해 주시라고, 또 만약 수술하게 된다면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면서, 그 흉터자국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절대로 앞서서는 안 된다."는 채찍으로 다가온다. 하나님 사역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몇 달만이라도 쉬어보자고 했던 것이 결과적으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제대로 쉬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지 1년이 지난 요즈음, 나는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몸도 회복이 되었고 마음마저 평안을 찾았다. 26개월 된 예영이는 지금의 사역지에 와서 많이 자랐다.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애교를 부리면서 안기기도 하고 동요를 곧잘 부르고 춤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오빠들이 성경 암송을 하면 발음도 안 되는 소리로 따라할 때는 얼마나 귀여운지.
남편은 두 아들이상으로 딸을 예뻐하여 '보물 덩어리'라고 부르는데, 바른 목회의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교량역할을 그 딸이 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우리를 들어서 당신의 나라 일꾼으로 세우셨으나, 우리의 고집과 생각이 앞섰을 때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딸을 들어서 무지한 우리를 깨닫게 하셨을까?
우리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는 남편의 첫 단독 목회지이자 특수한 지역이다. 이곳으로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영이의 사고를 통해서 상처 난 성도들을 쓸어안고 감싸는 방법을 단시간에 훈련받게 하신 것 같다. 무능하고 무지한 우리라도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당신의 방법으로 연단 시키셔서 당신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황송하도록 고맙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부부의 입에서 '주의 사역을 쉬어봤으면 ….' 하는 소리를 다시는 내지 않으리라.
부족함 투성이지만 우리 부부를 자신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세우시고, 그 사역에 충실하도록 다양하게 채찍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끝)
2003.03.25 06:12:14 (*.78.245.209)
쑥이 지천이라 저건네 식구들의 얼굴이 떠오르네.
쑥국 두번, 냉이,달래 무침 등 그리고 머구(?)도 어제 뜯었는데 오늘 반찬 할 건데. 언제 올거니?
우리는 이렇게 근래 채식주의자가 되었답. 먹는 얘기만 해서 좀...
그래도 봄 얘기 하니 자연히...
쑥국 두번, 냉이,달래 무침 등 그리고 머구(?)도 어제 뜯었는데 오늘 반찬 할 건데. 언제 올거니?
우리는 이렇게 근래 채식주의자가 되었답. 먹는 얘기만 해서 좀...
그래도 봄 얘기 하니 자연히...
2003.03.25 13:42:26 (*.81.91.185)
내가 동생의 입상을 축하하지 못했던 것 같네.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하네. 원래 있던 글솜씨 이제는 시간을 내어 더 다듬기를 바라고. 봄소식에 나 역시 가슴이 설레네. 아직 여기는 그 정도는 아니거든. 많이 뜯어 택배로 좀 보내려무나, 하하. 집집마다!!! 큰 오빠
하나님께서 자형을 통해서 신광교회를 더욱 굳건히 세워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누나도 보고 싶고, 송영, 찬규, 예영이 모두 보고 싶군요.
지금쯤 신광교회 주변에는 봄기운이 물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