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은아, 마감일이 29일인 줄 알았다.

    어제 새벽기도 후 쓰고 다 날려 버렸다. 아무래도 더 분발해야겠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도사가 될 수 있으리라. 아무도 내가 될 수 없으니 내 스스로 터득해야지....
  
   아이들은 지난 학기 내내 비행기 타자고 졸라댔습니다. 그래서 방학하면 꼭 타자고 약속을 했더랬고, 지난 6일에 드디어 거금을 투자하여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이상한 느낌 때문에 예영이는 이내 아빠 보고싶다고, 집에 가자고 졸라대더니 워낙 시간이 조금 밖에 걸리지 않으니 이내 불평은 사라졌습니다. 역시 돈이 좋더라구요. 참 아이들도 무조건 75퍼센트의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사 알았답니다. 저희 가족을 불편없이 지내게 배려해 준 경훈이네와 다희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꽁이와 저 두 자매의 쇼핑 도우미로 저희 아이 셋에다가 다희 자매 그리고 경훈이까지 모두 여섯 명의 대군을 돌보다가 혼이 났던 제부께(다희 아빠) 특별히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과의 말도 전하고 싶습니다.
   목요일인 9일에 형부께서 태워 주신 차를 타고 '2001 아울렛'에서 모두가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인형극장을 보게 하고 꽁이와 저는 쇼핑을 했는데, 물론 제부가 아이들을 맡아 주셨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인형극장이 끝나자 이 진주 촌놈 찬규는 그렇게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일렀건만, 제 하던 방식대로 형들과 일행을 팽개치고 먼저 나가서 미아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제부는 예희가 탄 유모차를 들고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는 꽁이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방송을 부탁하고 한 명은 입구를 지키고 두 명은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저 역시 7층을 계단으로 두 번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는데(워낙 익숙한 제가 그랬는데) 꽁이랑 제부는 정말 많이 혼났겠죠?
   우리의 놀람과는 달리,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인형극장을 본 7층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돌아와서 놀고 있는 찬규를 어찌 표현해 줘야 할까요? 그건 약과였죠. 잠시 뒤에 두레교회에서 놀았는데 또 없어진게 아니겠어요? 그 때는 정말 아득하더라구요. 건물 안이 아니기에, 더구나 진주처럼 거리가 훤히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빼곡이 주차된 공간과 건물들 사이에서 아이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저는 새파랗게 질려서 찬규를 부르고 다녔는데 마침 어떤 분이 엄마를 찾는 아이가 지나갔다고 일러주지 않겠어요? 항상 그랬듯이 두려운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그냥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서울에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이런 엉뚱한 때문에 저는 찬규를 '큰 인물 될 놈'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
    반강제적으로 저는 우리 교단 분들로 구성된 '고려문학회'란 문인들의 모임에 들어가서 지난 20일에 신인으로서 구 회원들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글도 두 편 실린 회지(책)에세 수필가란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앙간증 수기공모에서 은상까지는 자동 가입되는 특전이 주어지게 되었지만,  고려문학회의 사무국장이신 이현찬 장로님(안양일심교회)께서 동상을 받은 저에게 글을 잘 쓴다고 격려하시면서 가입을 강력하게 권유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저는 소위 말하는 글쟁이가 될 자신도 마음도 없답니다. 그렇지만 기회가 주어졌으니 꾸준히 써 보도록 할 생각입니다.  
   어제(22일) 여기 진주도 모처럼 눈이 와서(아주 오랜만의 일이라고 함) 굉장히 많이 쌓였습니다. 제 발목이 다 덮힐 정도니까 아마 10CM정도 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늘 새벽기도회 때는 저희 부부랑 다른 세 분만이 참석 했더랬습니다. 시내에서 저희 마을에 들어오는 두 길목 모두, 월동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통제를 받는다고 하니 저희도 고립상태입니다. 미끄러질 정도로 조금 뿌리는 것은 싫었는데, 함박눈이 쌓여서 너무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천안에 안부전화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사랑방 군불솥에다 한 소쿠리의 고구마를 삶으셨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잠이 들어 오줌이 마려워 깬 시간은 아마 11시나 되었을까요? 머리맡에 놓인 삶은 고구마가,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차가워서 목이 콱 막힐 정도지만 몇 개를 먹고 다시 아침까지 잤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양쪽으로 막대기를 걸쳐서 만든 시렁 위에서 내린 풀기가 빳빳한 빨간 자주 빛나는 꽃무늬 이불의 차가운 촉감, 표면이 거친 판자로 만든 방 안쪽의 고구마 뒤주가 너무너무 그리운 계절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보이는 저건네 산비탈에 덩그마하게 누운 두 개의 산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