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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주일, 그리 심하게 앓지 않은 감기인데도 힘이 없어서 혼자 집에 남았다. 어제 아이들에게 시편 1편 설교를 듣겠다고 했더니 모두 나를 놀렸다.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직접 들었다. 94년 봄에 이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전개방식과 내용은 같지가 않았다. 그 이후 구약 성경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시편 1편을 이 관점에서 많이 묵상하였다. 목사들이 1편을 읽고서 심방받는 자를 향하여 하는 축사는 성경이 기록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1편의 주인공으로 많은 인간들을 대입시키지만,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것은 기독론적 해석일 것이다. 의인의 회중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이지만, '의'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우리는 의인 예수님으로 인하여 의인들이 되었다. 또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이 의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1편의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성령론적 해석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복있는 자요 이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고, 시냇물을 들이키게 하신다.
문제는 1절의 상황이 교회 안에도 있으며 성도들끼리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작년 이후 이 때문에 심히 괴로웠다. 이것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요 핍박이다. 시편은 이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있는 자의 삶은 형통하다고 선언한다. '한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안팎으로 고독한 자들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도 동생들 모두가 이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의인의 회중에 속한 우리는 먼저 우리 가정을 의인의 회중으로 만들고 이웃을 다시 끌어들이는 복있는 의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직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을 끈기 있게 지켜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설교를 들으면서 즐거워하고 감사를 드렸다.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직접 들었다. 94년 봄에 이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전개방식과 내용은 같지가 않았다. 그 이후 구약 성경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시편 1편을 이 관점에서 많이 묵상하였다. 목사들이 1편을 읽고서 심방받는 자를 향하여 하는 축사는 성경이 기록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1편의 주인공으로 많은 인간들을 대입시키지만,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것은 기독론적 해석일 것이다. 의인의 회중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이지만, '의'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우리는 의인 예수님으로 인하여 의인들이 되었다. 또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이 의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1편의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성령론적 해석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복있는 자요 이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고, 시냇물을 들이키게 하신다.
문제는 1절의 상황이 교회 안에도 있으며 성도들끼리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작년 이후 이 때문에 심히 괴로웠다. 이것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요 핍박이다. 시편은 이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있는 자의 삶은 형통하다고 선언한다. '한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안팎으로 고독한 자들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도 동생들 모두가 이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의인의 회중에 속한 우리는 먼저 우리 가정을 의인의 회중으로 만들고 이웃을 다시 끌어들이는 복있는 의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직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을 끈기 있게 지켜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설교를 들으면서 즐거워하고 감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