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기독교보, 2005,4,9 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2005,4,9 기독교보

        누구나 맞는 죽음임에도, 이렇게 엄청난 관심 속에서 죽음을 맞은 인간은 흔치 않을 것이다. 교황은 임종 전부터 외신을 타기 시작했고, 임종하는 순간에는 10만여명이 광장에 운집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출생, 교육, 反나치 투쟁, 사제 서품과 교수, 주교 및 추기경으로서의 사역도 보도되었다. 26년의 교황 사역은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몸에 요약하고 있다.
        그는 역대 262명의 교황 가운데서 3번째로 긴 재위 기간을 누렸고, 52명의 非이탈리아 출신 중에서 최초의 슬라브족 출신이며, 가장 많이 여행했으며, 시성과 시복한 수는 지난 4세기보다 더 많았다. 그는 이스라엘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회교사원을 방문했고, 동방교회, 성공회, 루터교회와도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냉전을 종속시키고, 모국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2000년에는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를 발표하여, 동서방교회의 분열(1054년), 중세의 종교재판, 갈릴레오 재판, 종교개혁,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대항하지 못한 교회의 책임을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는 한국도 두 번 방문하여, 각각 40만명 앞에서 강연하였고 6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4백만명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현대문명과 대중문화를 소화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국의 한 언론사는 9년 전부터 그의 죽음을 준비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시성했던 성자의 반열에 교황을 앉혀 놓고 있다.
        그의 인생 여정이 화보와 함께 실리고, 임종 순간이 상세하게 보도되었고, 시신도 공개되었다. 이제는 교황의 장례와 후임 선정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임종확인에서부터 9일간의 애도기간, 장례절차 결정과 매장지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임을 결정하는 추기경단의 비밀회의(conclave)에 관심이 쏠린다. 나아가 물망에 오르는 추기경의 프로필과 후임 교황이 져야 하는 책임과 가톨릭교회의 장래를 예견한다. 언론의 찬사 일변도와는 달리, 그가 낙태, 피임 그리고 인공수정을 반대하여 많은 여성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안락사와 동성애를 반대했고,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할 뿐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독신제도를 고수하여 사제의 수가 격감하여 영세가 지체되고, 남미의 해방신학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것들을 해결하고 전임 교황의 대중성까지 겸비한 후보자가 과연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추모 행렬에 제일 유보적 입장은 개신교회가 취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권은 물론, 불교나 원불교 등 非기독교인들도 성당에 차려진 빈소를 찾아 조문한다. 그의 삶과 업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먼저 긍정적인 측면을 들자면, 그가 현대 사회의 세속화와 윤리 부재 현상, 자본주의의 폐단과 물질만능사조를 맹렬하게 비난 한 것이다. 그는 ‘생명의 문화’를 제창하면서 세계의 평화와 정치적 공의를 독려했으며,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죽음의 문화’인 낙태와 안락사를 반대하였다. 유럽연합의 헌법에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것도 비판하였다. 결혼을 개인적 선택의 차원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사회의 기초로 보면서 결혼의 순결을 강조하고 동성애를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발언과 업적은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로 확립된 교황권 때문에 가능하였다. 교황권이 세속권력과의 투쟁에서 빚어낸 수많은 오점을 거론할 게재가 아니어서 생략한다 하더라도, 교황이 파견하는 교황청대사는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그곳 로마교회를 감독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위계 질서적인 교권과 가톨릭 교리의 대변자로 자임했다. 그는 사제 독신제도를 고수했고, 고해성사를 강조했으며, 사제의 사죄 선언은 하나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통상적인 방편이라고 천명하였다. 성찬에 있어서 그는 화체설을 확고하게 믿었다.
        무엇보다도 요한 바오로 2세는 보기 드문 마리아 숭배자였다. 교황 선임 직후 그는 ‘온전히 마리아를 위해’를 모토로 정하였고, 그에 걸맞게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의 성쇠 이외에, 교황청이 오랫동안 숨겼던 파티마 제 3의 계시(1917년)는, 1981년에 있었던 저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명을 유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고 한다. 그 후 그의 마리아 신심은 더 확고해졌고, 작년 8월에는 Lordes에서 마리아무흠수태설 교의 선포 15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교황무오설을 교의로 받아들인 가톨릭교회로서는 그의 참회선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겠지만, 이 교의가 있기 때문에 그는 같은 인간을 복자와 성자로 선언하였다. 2002년 조국을 방문한 그는, ‘부활의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죽기까지 수행하도록 영육의 힘을 달라’고 마리아에게 기도하였고, 같은 해에는 보수 성향의 31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여 가톨릭교회의 쇄신 운동에 쐐기를 박았다. 그의 가톨릭적 정통성은 확고했고 보수성은 난공불락이었다.
        평화의 사도요 화해의 전도사라는 찬사와 공개적 참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렌트종교회의에서 종교개혁을 향하여 공포한 저주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로마교회가 체코의 개혁자 죤 후스에게 선고한 화형(1415년)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 루터에게 내린 출교조치에 대해서는 참회하지 않았다. 그의 정통성은 로마의 주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의 후계자요 보편교회의 머리로서 행한 의식적인 삶으로 나타났다.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주교회의와 함께 인도하는 로마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기 때문에, 자기 교회와 더불어 주교직분과 미사를 공유하지 않는 교회, 가령 개신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고 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로서 구원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을 지녔었다. 그의 삶과 교황으로서의 사역은 바로 이 관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교황은 동시에 우리가 고민하고 반성해야 할 뼈아픈 숙제를 던져 주고 갔다. 루터의 후예인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천사들이여,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를 외치는 베드로광장의 무리들처럼, 천사들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까지 인도하게 만드는 병자성사(종유성사)와 같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개신교의 상례에서도 행해지고 있지 않는가. 이른바 선종(善生福終)의 찬사를 받을 만한 개신교도가 얼마나 되는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였지만, 비권력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은 비밀은 무엇일까. 한국개신교회는 교권을 함부로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가. 로마교회의 현대화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사제직을 박탈당한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소비에트연방이 일격에 무너지듯이, 교황권의 힘으로 단속된 로마교회도 한 순간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교황 조문객 대열에 자발적으로 합류한 2백만명의 쇄도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는, 개혁교회가 로마교회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조롱을 받지 않게 하려면, 속히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활의 주님께서는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