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50주년을 향하여” / 기독교보(2002-09-14) 투고
2002.09.20 06:05 Edit
http://www.kidokkyobo.com/special/xinu_view.php3?SN=66&CP=0“새로운 50주년을 향하여”
1.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고신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 서있다. 총회적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기념 행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신학발표회나 논문집은 빠
져 있다. 이것이 고신신학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든다(‘고신
신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월간 고신, 9월호, 42-46).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50주년을 과연 축제 분위기 속
에서 맞이할 수 있느냐는 염려도 안팎에서 들려온다. 우리가 감사하고 잔치를 벌이기 전에
다루어야 할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산적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길로 돌아가
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이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하고 용서받아
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을 펴고서 차분하게 토론하고 정리해야 할
현안들도 있다.
우리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굳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제자가 더 많아
졌던 예루살렘 교회는 소란하여질 수밖에 없었다(행 6:1-7). 마찬가지로 교회가 부흥하는
곳에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를 교회가 잘 반성할 때에 좋은 신학이 형성되었다. 신
학의 교과서는 성경이고 현장은 교회이다. 우리 고신교회도 교회 성장을 기초로 하여서 고
신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현장을 맡은 목사와 교인, 그리고 반성을 맡은 신
학교수들의 상호 교호적인 관계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준비가 되었다 하여서 신학
이 곧장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제는 많으나 제대로 반성하고 논의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룩하지 못했다. 이제는 지나온 50주년이 아니라 앞으로 올 50주년
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 후배들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현안
들을 제시하면서 성령께서 주신 지혜를 받은 자들로서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의견을 수렴하
고 합의된 공론을 형성하는 전통을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 50주년을 향하는 고신신학의 과제
만약 새로운 50주년을 준비하기 위하여 고신교회 50주년 특집 신학발표회나 논문집을 구상
할 양이면,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1). 먼저 신사참배 반대 정신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다.
더러는 이제 이것을 더 우려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우
리는 참배 반대를 주로 신앙적으로 설명하는 반면에, 민중신학의 일각에서는 정치적으로 해
석한다. 이 측면을 다루면 한 논문이 될 것이다. 또 왜 반대를 결심하고 어떻게 운동을 전
개하였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성경관과 구체적인 본문 이해가 이들
로 하여금 하나님, 예수님과 성령님을 어떻게 깨닫고 섬기도록 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분들이 해방 이후 사역에서도 반대 정신을 어떻게 계속 구현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
들의 교회관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정말로 고려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그런 주장이 성경적으로 얼
마나 합당하며, 이후 고신교회의 50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를 다룰 수 있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면서 대체로 70년대 중반까지 생존하였던 이
분들이 교회 성장 운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를 살피는 것도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신사
참배 반대 정신을 신학화하기 위하여 이 정신이 50주년을 맞는 지금 고신교회 안에 어떤 형
태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살피려면 여러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 붙이자면 ‘반대 정신과 지
금’이라고나 할까.
주일 성수 문제는 어떤 한 노회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박윤선목사는 자기가 신학과
교육의 기초를 놓았던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를 1960년 9월에 영구히 떠났다. 이면적인 여
러 이유들이 있었으나, 표면적 문제는 그가 선교사를 전송하려다 부득이 하게 배에서 예배
드렸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역사적 과거로만 묻어둘 것이 아니라 이제는 후배
들이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와 비슷한 문제로 인하여 목사 제
명이 결의되는 현재까지 신학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겠다.
2). 우리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삶의 체계인 개혁주의를 신봉한다고 자부한
다.
실제로 개혁주의라는 말은 한국교회에서 박윤선목사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거나 널리 보급하
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가 기초한 것으로 여겨지는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
(1946)’에서 이미 ‘개혁교 신학’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간에 개혁신학과 그 전통에 대하
여 많이 논의하였지만, 본격적인 논의를 담은 표준 연구서가 없다. 50주년을 맞이하여 ‘개
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기념 논문집이 간행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많은 교인들
과 교파들이 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애용한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서는 이 개혁주의
전통을 의심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고신대학교의 원형으로서 제네바 아카데미가 거론되지만, 우리 학자가 쓴 칼빈 연구서가 없
으며 제네바와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연구 논문조차도 없다. 고신대학교가 ‘명실상부한 신
앙과 학문의 공동체로서 기독교대학의 기본 요건을 확립’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진정한 기독교대학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 경
주하고 있는 대학’이라면, 각 전공 영역에서 신앙과 학문의 통합 노력이 개혁주의 전통에
서 어떻게 가능하며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전교회와 교인들에게 알리는 별도의
논문집을 증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 역사의 중요한 시점은 세속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송사로 얼룩져있다.
때로는 이사회가 송사 당사자였고, 신학교수회는 이 송사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는 식의 성
경 해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 해석은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주석이라고 보기 힘들다. 바울은 이런 송사에 휘말리는 교회와 교인이 종말론적인
교회의 특징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서로 송사하고서 천국의 어린양의 혼인 잔
치에 과연 동석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잔치를 예표하는 성찬 자리에 어찌 함께 앉을 수 있
겠는가.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또 교회법과 교회 정치적으로 다루는 논문들
이 나와야 할 것이며, 특히 신학교수회가 이전 교수회의 입장을 재론하는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법정 송사의 계기를 제공한 이른바 ‘가(假)이사회’ 문제도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할 중요
한 사안이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분이 이 가이사회의 이사장
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어찌 해석해야 할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은 교회
법을 무시하고 교육법에 매달리는 비개혁주의적인 전례를 만들었고, 교회법과 세속법의 우
선 관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에 의학부의 인가를 위하여 고려신학대학을
일반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하였는데, 당시 일반대학으로의 승격은 총회의 결정이 아닌, 당
시 몇몇 행정 책임자들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이사회와 총회와의 관계가
종종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나타난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세속법과 교회법의 관계 등에
대해서 교회사, 교회법(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4). 고신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강한 도전은 교회 성장 운동 쪽에서 왔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 자생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교수들
의 성장론이 소개되면서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 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전대미문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고신교회의 성장은 한국교회 평균 성장률에 미치지 못하였
다. 그러자 신사참배 정신에 기초한 고신교회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
아졌고, 정체성의 위기가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즉 성장하지 않는 교회의 신학과 역사의 정
체성에는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었고, 이런 비판적인 태도는 지금도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이 때에 고신신학은 이런 성장 운동의 신학적 배경에 있는 아르미니안적인 요소가 위험하다
는 정도의 지적 외에는 안타깝게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교회 성장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
어나기 전에 이미 수천명의 교세를 가졌던 여러 교회들이 고신교회를 떠났다는 사실은 잊혀
지고 말았다.
그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초기 고신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
에 전념하던 아주 전형적인 목회자들이었다. 만약 고신교회가 송사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고신신학이 말씀 위에서 건실하게 부흥했던 교회들의 목회를 신학화하였다면, 고신교회 밖
에서 유행하던 성장운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취사선택하여, 전혀 새로운 교회성장론을
한국교회에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교회 개척을 통한 건실한 성장의 본보기가 고
신교회가 선도하고 있는 울산 지역과 광주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자긍심을
전체 교회가 갖지 못하는 것은 정체성 위기의 관점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측면들을 살펴보려면 한 권의 논문집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5). 이 정체성의 위기는 교회론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 적극성은 칭찬 받을만하다. 그러나 아무 강사
나 세우고, 시찰이나 노회에서 검증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서 갖가지 방법과 프로그램이 도
입되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앙과 고백을 따르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직
영 신학대학원이 필요하며, 굳이 고신교회라는 울타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
마저 들 지경이다. 어쨌든 과거의 고려파가 아니라는 것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
다. 이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듯 참 교회에 대한 열심도 사라지고 말았다. 참 교회
에 대한 열정은 남을 정죄하고 자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하는 신앙
의 미덕인데도 말이다. 성장 운동 이후 많은 제도와 새로운 것들이 고신교회에도 들어왔
다.
그중에는 복음송과 열린 예배가 있다. 이런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은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이다. 건전한 연합 운동에는 참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의 정결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교회들이 다 정결한지
신학적으로 많이 대화하여야 한다. 사랑에 기초한 연합도 선지자적인 경고와 함께 수행되어
야 한다. 그러나 현재 여기에는 냉담한 제도적 일치운동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
해서도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치리회로서의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치리회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깊
이 반성해야 할 점들이 많다. 우리는 장로교 정치가 성경적인 기초를 가장 많이 가진 제도
임을 확신한다. 이 정치가 성경적이지만 인간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다. 고신
교회가 과연 장로교 정치가 형성될 때의 그 원래 정신과 취지를 제대로 존중하면서 이 제도
를 운용하고 있는지를 토론하고 연구하고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합운동을 무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다른 장로교 교파에서 자생한 잘못된 제도가 고신교회 안에도
소리 없이 도입되고 있지는 않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이사회 제도도 점검해볼
요소가 있다. 십계명과 산상보훈을 먼저 지켜야 하는 교회의 기관으로서 이사회는 교육법
이 규정하는 조직과 권한과 기능을 잘 운용하기 위하여 전문인을 대거 가담시키는 방안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큰 쟁점인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과 신학대학원이다.
우리 모두는 복음병원 파업으로 인하여 관선이사도 파송될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 할
말을 잃고 있다. 이것은 장로교 원리의 하나인 정교분리를 훼손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의 교인들은 복음병원의 파업과 이에 따른 이사장 승인 취소, 그리고 피하고 싶은 관선이
사 파송 등의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위 세 기관의 일은 교수회의의 건의를 받아서 치리회인 총회가 결의하고 이사를
선임하여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는 그러한 새로운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교단적 이해와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새로운 학과 증설의 취지를 설립정신에 근거하
여 교회 앞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학교의 기독교 종합대학을 향한 원대한
비전을 교단교회를 향해서는 물론 대학 구성원들에게조차 충분히 인식시키지 못함으로써 학
교와 교단 안의 갈등과 혼란은 더하여져 갔다. 그렇다면 고신대학교가 어떤 의미에서 ‘교
회의 대학’인가? 미국 기독개혁교회(CRC)는 칼빈대학의 교회의 직영 여부를 만 30년간 총
회 안팎에서 논의하였다. 앞으로 고신대학교가 개혁주의의 문화적 이상을 따라 언약의 자녀
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유능한 지도자로 양성할 수 있는 ‘교회의 대학’이 되기 위해
서는 진지한 반성과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학의 본질에 대해서나, 복음 병원이 수익기관인지 아니면 헌금을 하여 복음을 전하
고 구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나 교회의 본질에 근거한 신학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
근본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게다가 정관의 개정으로 신학대학원도 총장체제로 일원화되었
다. 신학교로 출발하여 대학이 확장되었는데, 이제는 대학 속에 신학교가 소속되는 주객 전
도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우리는 서구의 많은 기독교대학과
신학교육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의과대학을 가지
고 있는 기독교대학은 많지 않다. 우리만이 처한 독특한 상황인 셈이다. 이런 구체적인 현
실 문제를 염려하여 성명서를 낼 수도 있겠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기독
교대학의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살리기 위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열의를 가지고 머리
를 맞대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과 교육적인 책임에 대해서 전교회적인 토론과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치리회인 총회와 이사회의 임무에 속하지만, 모든 교회와 교인
들을 이 토론에 가담시키면서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고등교육이 교회의 사명인
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인지도 다루어 볼만한 주제이다. 고신대학교의 인가와 확장,
그리고 대학병원인 복음병원의 역사에 신학교수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에, 현재의 신학
교수들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대학과 신대원의 장래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기독교보는 이런 토론의 장을 마
련하고서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 특집 ‘고신 50년을 말한다’를 연재하였다. 그 중에는
‘고신 50년과 대학 교육’이라는 주제도 있는데, 그 글의 필자는 대학 자체가 아니라 대학
과 신대원의 분리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동안 잘못된 학사 분리 운영으로 정부
의 감사를 받아야 했고”라는 말은 집필 의도가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해하기 나름이겠지만, 지난 교육부 감사에서 분리 자체가 지적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또 기독교보의 한 사설에서는 “신대원 분리가 우리 공동체의 내분의 소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맺는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적지 않은 내분이 있지만, 분리가 내분의 원
인이 아니라 도리어 여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원인(原因)과 원인(遠因)을 분별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리고 그 사설이 제시한 공존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전문대학원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이다. 건설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공정하고 정확한 정보가 아주 중
요하다.
3. 글을 맺으면서
이 외에도 50주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50주년을 바라보는 마당에서 더 살피고 반성하고 토론
하고 중지를 모으고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할 주제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군선교, 해
외 선교, SFC, 교회의 현실 참여, 노동운동 등도 있고 지극히 신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
들도 많다. 그런 주제들은 위에 거론된 중요한 문제들이 토론되는 과정에서 노출되고 알맞
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토론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런 현실을 직면하
고 있는 신학교수들은 쟁점을 제시하고 토론을 선도하고 교회 중에 여론을 형성하고, 나아
가 반성적 작업을 통하여 신학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수들은 경기를 공정하게 운용
하여 선수를 보호하고 관중들의 흥미도 유발하는 심판처럼 공정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토론함에 있어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전통을 세웠으면 좋겠다. 신사참배 거부와 이에 따르
는 분위기는 이견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심성을 형성시켰다. 이런 배타성은 결국
‘우리 것은 없다’ 또는 ‘우리는 안 된다’라는 부정적 사고방식을 고착시키기도 하였
다.
앞으로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에 기초하여 자긍심을 회복하고 남을 사랑으로 품는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며, 장래의 고신신학이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디디고서 새롭게 형성될 고신신학이 한국교회에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배들처럼 진리를 위하여 때로는 무시와 조롱을
달게 받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파들은 한국교회에 기여할 만한 어떤 일을 하기에는 규
모가 적고, 어떤 교파들은 너무 커서 서로 협력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신교회의 규모는 작지도 않고 분열될 정도로 혼란스럽지도 않다. 비록 우리가 주체적으
로 토론하고 신학하는 전통을 세우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선배들을 축출했던 한국교회
를 향하여 할 일이 많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로서의 개혁신학을 신사
참배를 거부한 선배들의 정신을 따라 성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면, 우리는 한국교회 전체의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이다.
위에 제시된 문제들은 지극히 고신교회에 국한된 문제 같지만, 세계교회사를 훑어보면 이전
의 교회나 다른 지역에 있던 교회들도 대동소이하게 겪었던 문제들도 많이 있다. 이것들을
참조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토론을 전개하면,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고신신학은 공교회성
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었음을 인지하고 물려받은 개혁주의에 기초하여
서 우리가 구현하고 살아가는 개혁주의를 확립하고 제시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세계 개혁교회 가운데서 고신교회가 지닌 위치와 책임은 막중하다. 앞으로의 개혁신학
의 발전과 세계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명을 인지할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장래에 대한 소망
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우리 소망의 근원은 종말론적이다. 비록 고신신학의 현재
가 바람직하지 않다 하더라도 고신신학의 아름다운 과거에 기초하여 소망 가운데서 우리 신
학의 장래를 바라보자.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복 주실 것을 확신
하며 기도드린다.
유 해 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1.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고신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 서있다. 총회적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기념 행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신학발표회나 논문집은 빠
져 있다. 이것이 고신신학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든다(‘고신
신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월간 고신, 9월호, 42-46).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50주년을 과연 축제 분위기 속
에서 맞이할 수 있느냐는 염려도 안팎에서 들려온다. 우리가 감사하고 잔치를 벌이기 전에
다루어야 할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산적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길로 돌아가
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이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하고 용서받아
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을 펴고서 차분하게 토론하고 정리해야 할
현안들도 있다.
우리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굳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제자가 더 많아
졌던 예루살렘 교회는 소란하여질 수밖에 없었다(행 6:1-7). 마찬가지로 교회가 부흥하는
곳에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를 교회가 잘 반성할 때에 좋은 신학이 형성되었다. 신
학의 교과서는 성경이고 현장은 교회이다. 우리 고신교회도 교회 성장을 기초로 하여서 고
신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현장을 맡은 목사와 교인, 그리고 반성을 맡은 신
학교수들의 상호 교호적인 관계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준비가 되었다 하여서 신학
이 곧장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제는 많으나 제대로 반성하고 논의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룩하지 못했다. 이제는 지나온 50주년이 아니라 앞으로 올 50주년
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 후배들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현안
들을 제시하면서 성령께서 주신 지혜를 받은 자들로서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의견을 수렴하
고 합의된 공론을 형성하는 전통을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 50주년을 향하는 고신신학의 과제
만약 새로운 50주년을 준비하기 위하여 고신교회 50주년 특집 신학발표회나 논문집을 구상
할 양이면,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1). 먼저 신사참배 반대 정신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다.
더러는 이제 이것을 더 우려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우
리는 참배 반대를 주로 신앙적으로 설명하는 반면에, 민중신학의 일각에서는 정치적으로 해
석한다. 이 측면을 다루면 한 논문이 될 것이다. 또 왜 반대를 결심하고 어떻게 운동을 전
개하였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성경관과 구체적인 본문 이해가 이들
로 하여금 하나님, 예수님과 성령님을 어떻게 깨닫고 섬기도록 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분들이 해방 이후 사역에서도 반대 정신을 어떻게 계속 구현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
들의 교회관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정말로 고려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그런 주장이 성경적으로 얼
마나 합당하며, 이후 고신교회의 50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를 다룰 수 있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면서 대체로 70년대 중반까지 생존하였던 이
분들이 교회 성장 운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를 살피는 것도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신사
참배 반대 정신을 신학화하기 위하여 이 정신이 50주년을 맞는 지금 고신교회 안에 어떤 형
태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살피려면 여러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 붙이자면 ‘반대 정신과 지
금’이라고나 할까.
주일 성수 문제는 어떤 한 노회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박윤선목사는 자기가 신학과
교육의 기초를 놓았던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를 1960년 9월에 영구히 떠났다. 이면적인 여
러 이유들이 있었으나, 표면적 문제는 그가 선교사를 전송하려다 부득이 하게 배에서 예배
드렸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역사적 과거로만 묻어둘 것이 아니라 이제는 후배
들이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와 비슷한 문제로 인하여 목사 제
명이 결의되는 현재까지 신학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겠다.
2). 우리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삶의 체계인 개혁주의를 신봉한다고 자부한
다.
실제로 개혁주의라는 말은 한국교회에서 박윤선목사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거나 널리 보급하
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가 기초한 것으로 여겨지는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
(1946)’에서 이미 ‘개혁교 신학’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간에 개혁신학과 그 전통에 대하
여 많이 논의하였지만, 본격적인 논의를 담은 표준 연구서가 없다. 50주년을 맞이하여 ‘개
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기념 논문집이 간행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많은 교인들
과 교파들이 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애용한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서는 이 개혁주의
전통을 의심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고신대학교의 원형으로서 제네바 아카데미가 거론되지만, 우리 학자가 쓴 칼빈 연구서가 없
으며 제네바와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연구 논문조차도 없다. 고신대학교가 ‘명실상부한 신
앙과 학문의 공동체로서 기독교대학의 기본 요건을 확립’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진정한 기독교대학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 경
주하고 있는 대학’이라면, 각 전공 영역에서 신앙과 학문의 통합 노력이 개혁주의 전통에
서 어떻게 가능하며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전교회와 교인들에게 알리는 별도의
논문집을 증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 역사의 중요한 시점은 세속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송사로 얼룩져있다.
때로는 이사회가 송사 당사자였고, 신학교수회는 이 송사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는 식의 성
경 해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 해석은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주석이라고 보기 힘들다. 바울은 이런 송사에 휘말리는 교회와 교인이 종말론적인
교회의 특징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서로 송사하고서 천국의 어린양의 혼인 잔
치에 과연 동석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잔치를 예표하는 성찬 자리에 어찌 함께 앉을 수 있
겠는가.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또 교회법과 교회 정치적으로 다루는 논문들
이 나와야 할 것이며, 특히 신학교수회가 이전 교수회의 입장을 재론하는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법정 송사의 계기를 제공한 이른바 ‘가(假)이사회’ 문제도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할 중요
한 사안이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분이 이 가이사회의 이사장
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어찌 해석해야 할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은 교회
법을 무시하고 교육법에 매달리는 비개혁주의적인 전례를 만들었고, 교회법과 세속법의 우
선 관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에 의학부의 인가를 위하여 고려신학대학을
일반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하였는데, 당시 일반대학으로의 승격은 총회의 결정이 아닌, 당
시 몇몇 행정 책임자들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이사회와 총회와의 관계가
종종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나타난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세속법과 교회법의 관계 등에
대해서 교회사, 교회법(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4). 고신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강한 도전은 교회 성장 운동 쪽에서 왔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 자생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교수들
의 성장론이 소개되면서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 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전대미문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고신교회의 성장은 한국교회 평균 성장률에 미치지 못하였
다. 그러자 신사참배 정신에 기초한 고신교회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
아졌고, 정체성의 위기가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즉 성장하지 않는 교회의 신학과 역사의 정
체성에는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었고, 이런 비판적인 태도는 지금도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이 때에 고신신학은 이런 성장 운동의 신학적 배경에 있는 아르미니안적인 요소가 위험하다
는 정도의 지적 외에는 안타깝게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교회 성장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
어나기 전에 이미 수천명의 교세를 가졌던 여러 교회들이 고신교회를 떠났다는 사실은 잊혀
지고 말았다.
그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초기 고신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
에 전념하던 아주 전형적인 목회자들이었다. 만약 고신교회가 송사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고신신학이 말씀 위에서 건실하게 부흥했던 교회들의 목회를 신학화하였다면, 고신교회 밖
에서 유행하던 성장운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취사선택하여, 전혀 새로운 교회성장론을
한국교회에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교회 개척을 통한 건실한 성장의 본보기가 고
신교회가 선도하고 있는 울산 지역과 광주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자긍심을
전체 교회가 갖지 못하는 것은 정체성 위기의 관점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측면들을 살펴보려면 한 권의 논문집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5). 이 정체성의 위기는 교회론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 적극성은 칭찬 받을만하다. 그러나 아무 강사
나 세우고, 시찰이나 노회에서 검증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서 갖가지 방법과 프로그램이 도
입되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앙과 고백을 따르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직
영 신학대학원이 필요하며, 굳이 고신교회라는 울타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
마저 들 지경이다. 어쨌든 과거의 고려파가 아니라는 것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
다. 이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듯 참 교회에 대한 열심도 사라지고 말았다. 참 교회
에 대한 열정은 남을 정죄하고 자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하는 신앙
의 미덕인데도 말이다. 성장 운동 이후 많은 제도와 새로운 것들이 고신교회에도 들어왔
다.
그중에는 복음송과 열린 예배가 있다. 이런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은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이다. 건전한 연합 운동에는 참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의 정결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교회들이 다 정결한지
신학적으로 많이 대화하여야 한다. 사랑에 기초한 연합도 선지자적인 경고와 함께 수행되어
야 한다. 그러나 현재 여기에는 냉담한 제도적 일치운동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
해서도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치리회로서의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치리회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깊
이 반성해야 할 점들이 많다. 우리는 장로교 정치가 성경적인 기초를 가장 많이 가진 제도
임을 확신한다. 이 정치가 성경적이지만 인간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다. 고신
교회가 과연 장로교 정치가 형성될 때의 그 원래 정신과 취지를 제대로 존중하면서 이 제도
를 운용하고 있는지를 토론하고 연구하고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합운동을 무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다른 장로교 교파에서 자생한 잘못된 제도가 고신교회 안에도
소리 없이 도입되고 있지는 않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이사회 제도도 점검해볼
요소가 있다. 십계명과 산상보훈을 먼저 지켜야 하는 교회의 기관으로서 이사회는 교육법
이 규정하는 조직과 권한과 기능을 잘 운용하기 위하여 전문인을 대거 가담시키는 방안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큰 쟁점인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과 신학대학원이다.
우리 모두는 복음병원 파업으로 인하여 관선이사도 파송될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 할
말을 잃고 있다. 이것은 장로교 원리의 하나인 정교분리를 훼손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의 교인들은 복음병원의 파업과 이에 따른 이사장 승인 취소, 그리고 피하고 싶은 관선이
사 파송 등의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위 세 기관의 일은 교수회의의 건의를 받아서 치리회인 총회가 결의하고 이사를
선임하여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는 그러한 새로운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교단적 이해와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새로운 학과 증설의 취지를 설립정신에 근거하
여 교회 앞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학교의 기독교 종합대학을 향한 원대한
비전을 교단교회를 향해서는 물론 대학 구성원들에게조차 충분히 인식시키지 못함으로써 학
교와 교단 안의 갈등과 혼란은 더하여져 갔다. 그렇다면 고신대학교가 어떤 의미에서 ‘교
회의 대학’인가? 미국 기독개혁교회(CRC)는 칼빈대학의 교회의 직영 여부를 만 30년간 총
회 안팎에서 논의하였다. 앞으로 고신대학교가 개혁주의의 문화적 이상을 따라 언약의 자녀
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유능한 지도자로 양성할 수 있는 ‘교회의 대학’이 되기 위해
서는 진지한 반성과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학의 본질에 대해서나, 복음 병원이 수익기관인지 아니면 헌금을 하여 복음을 전하
고 구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나 교회의 본질에 근거한 신학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
근본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게다가 정관의 개정으로 신학대학원도 총장체제로 일원화되었
다. 신학교로 출발하여 대학이 확장되었는데, 이제는 대학 속에 신학교가 소속되는 주객 전
도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우리는 서구의 많은 기독교대학과
신학교육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의과대학을 가지
고 있는 기독교대학은 많지 않다. 우리만이 처한 독특한 상황인 셈이다. 이런 구체적인 현
실 문제를 염려하여 성명서를 낼 수도 있겠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기독
교대학의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살리기 위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열의를 가지고 머리
를 맞대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과 교육적인 책임에 대해서 전교회적인 토론과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치리회인 총회와 이사회의 임무에 속하지만, 모든 교회와 교인
들을 이 토론에 가담시키면서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고등교육이 교회의 사명인
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인지도 다루어 볼만한 주제이다. 고신대학교의 인가와 확장,
그리고 대학병원인 복음병원의 역사에 신학교수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에, 현재의 신학
교수들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대학과 신대원의 장래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기독교보는 이런 토론의 장을 마
련하고서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 특집 ‘고신 50년을 말한다’를 연재하였다. 그 중에는
‘고신 50년과 대학 교육’이라는 주제도 있는데, 그 글의 필자는 대학 자체가 아니라 대학
과 신대원의 분리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동안 잘못된 학사 분리 운영으로 정부
의 감사를 받아야 했고”라는 말은 집필 의도가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해하기 나름이겠지만, 지난 교육부 감사에서 분리 자체가 지적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또 기독교보의 한 사설에서는 “신대원 분리가 우리 공동체의 내분의 소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맺는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적지 않은 내분이 있지만, 분리가 내분의 원
인이 아니라 도리어 여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원인(原因)과 원인(遠因)을 분별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리고 그 사설이 제시한 공존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전문대학원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이다. 건설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공정하고 정확한 정보가 아주 중
요하다.
3. 글을 맺으면서
이 외에도 50주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50주년을 바라보는 마당에서 더 살피고 반성하고 토론
하고 중지를 모으고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할 주제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군선교, 해
외 선교, SFC, 교회의 현실 참여, 노동운동 등도 있고 지극히 신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
들도 많다. 그런 주제들은 위에 거론된 중요한 문제들이 토론되는 과정에서 노출되고 알맞
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토론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런 현실을 직면하
고 있는 신학교수들은 쟁점을 제시하고 토론을 선도하고 교회 중에 여론을 형성하고, 나아
가 반성적 작업을 통하여 신학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수들은 경기를 공정하게 운용
하여 선수를 보호하고 관중들의 흥미도 유발하는 심판처럼 공정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토론함에 있어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전통을 세웠으면 좋겠다. 신사참배 거부와 이에 따르
는 분위기는 이견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심성을 형성시켰다. 이런 배타성은 결국
‘우리 것은 없다’ 또는 ‘우리는 안 된다’라는 부정적 사고방식을 고착시키기도 하였
다.
앞으로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에 기초하여 자긍심을 회복하고 남을 사랑으로 품는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며, 장래의 고신신학이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디디고서 새롭게 형성될 고신신학이 한국교회에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배들처럼 진리를 위하여 때로는 무시와 조롱을
달게 받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파들은 한국교회에 기여할 만한 어떤 일을 하기에는 규
모가 적고, 어떤 교파들은 너무 커서 서로 협력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신교회의 규모는 작지도 않고 분열될 정도로 혼란스럽지도 않다. 비록 우리가 주체적으
로 토론하고 신학하는 전통을 세우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선배들을 축출했던 한국교회
를 향하여 할 일이 많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로서의 개혁신학을 신사
참배를 거부한 선배들의 정신을 따라 성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면, 우리는 한국교회 전체의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이다.
위에 제시된 문제들은 지극히 고신교회에 국한된 문제 같지만, 세계교회사를 훑어보면 이전
의 교회나 다른 지역에 있던 교회들도 대동소이하게 겪었던 문제들도 많이 있다. 이것들을
참조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토론을 전개하면,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고신신학은 공교회성
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었음을 인지하고 물려받은 개혁주의에 기초하여
서 우리가 구현하고 살아가는 개혁주의를 확립하고 제시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세계 개혁교회 가운데서 고신교회가 지닌 위치와 책임은 막중하다. 앞으로의 개혁신학
의 발전과 세계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명을 인지할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장래에 대한 소망
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우리 소망의 근원은 종말론적이다. 비록 고신신학의 현재
가 바람직하지 않다 하더라도 고신신학의 아름다운 과거에 기초하여 소망 가운데서 우리 신
학의 장래를 바라보자.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복 주실 것을 확신
하며 기도드린다.
유 해 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