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주님과" 연재 / 코람데오3 투고

                                코람데오(3)
                                                        유해무
        우리는 두 번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또는 神前意識으로 번역되는 코람데오를 ‘정직’으로 팍악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부분적으로만 옳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을 보편적인 명령 정도로 여기는 것은 코람데오를 윤리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2년 벽두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벤처 기업을 중심으로 한 3대 게이트의 수사를 접하면서, 관련자들이 정직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 분개하고 있다. 간간이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한국종교인연합회가 있다. 아마 이들이 모이면,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탄식하면서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정직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면, 이 질문에 대한 접근 방식이나 해답은 각자의 종교적 배경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낼 것이다. 불자는 마음이 부처니까 마음을 잘 닦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유학자도 인간은 수양을 통하여 자기 속의 천성(天性)을 바르게 발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학교도라면 경천사상(敬天思想)에 기초하여서 성,경,신(誠,敬,信)의 덕을 잘 쌓아야 한다고 역설할 것이다.
        우리는 코람데오의 관점에서 정직을 말해야 한다. 정직은 행동과 삶에서 나타나는 윤리적인 자세이다. 그런데 정직이라는 열매를 이루는 정직의 뿌리가 무엇인가. 개혁자 루터의 신앙적 투쟁에서 나타났듯이,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죄인인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이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직을 운운할 수 없다. 따라서 정직은 윤리적이기 전에 종교적이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은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은 정직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자만이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자는 하나도 없다. 우리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오직 은혜이다.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코람데오를 ‘죄인과 동시에 의인’이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죄인이었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리적으로 의인이 되었다. 그렇다 하여서 우리가 한번만 예수를 덧입고 의로워지면, 계속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를 벗으버리려고 발버둥친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부단히 애써야 한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예수님이 사시게 하여야 한다(갈 2:20). 이제부터는 죄인 아무개가 아니라 예수라는 성을 가진 ‘예수 아무개’가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야 한다. 예수를 떠난 우리는 죄인이요, 예수가 떠난 우리의 삶은 지옥의 삶이다.
        ‘죄인과 동시에 의인’인 삶은 예수 때문에 가능하여졌다. 새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삶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계속될 수 있다. 예수께서 어떻게 내 안에서 살 수 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서”(요 16:14) 우리 속에 살아 임재하고 계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든 것을 말하신다(요 16:13). 예수님도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명하신대로 말씀하셨다(요 12:49).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동질성과 연속성을 가진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제하기 위함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사귈 수 없다. 말씀을 깨닫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 동시에 의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살아가야 한다.
        비록 코람데오를 윤리적인 정직으로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이 말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 동시에 의인’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코람데오의 결실 중에 정직이라는 윤리적 결실도 있다. 어쨌든 우리 사회가 부정직한 것은 윤리적 차원에서만 치유될 수 없다.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오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루터는 교회 개혁이라는 대업을 완수하였지만, 이것이 그의 일차적 목표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바꾸려고 하였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려 하였다. 아니, 자신이 말씀과 성령으로 바꾸어졌다. 개혁은 제도 개혁 이전에 ‘사람 개혁’이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며 그 속에서 교회도 부패하여질 때, 사람들은 개혁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제도조차라도 개혁할 수 있는 개혁 세력이 어찌 하루 아침에 솟아날 수 있겠는가. 개혁의 주체 세력이라 자칭하였던 어떤 정권은 자기들만이 개혁 주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던지 ‘개혁신앙’이라는 우리의 잡지를 폐간시켰다. 일반적으로 개혁 세력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세력을 조직적으로 규합하고 이전의 이른바 反개혁 세력을 보다 더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때로는 비개혁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군사 정권과는 달리 민의에 의한 정통성을 확보하였다는 최근의 정권들에게서도 개혁의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개혁을 운위하는 세력들이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도 예외 없이 제도적 개혁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안이한 인상을 풍긴다.
        그런데 과연 누가 개혁의 주체 세력으로 세상과 교회의 무대에 등단할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개혁은 제도 개혁 이전에 사람 개혁이라면, 우리 스스로는 일차적으로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다! 우리를 개혁시킬 인간은 없으며 의로우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를 개혁시키는 주체이시다. 아주 놀랍게도 칼빈은 인간을 개혁의 주어로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설교와 저서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또는 함께 우리를 개혁시키는 주어로 삼고 있다.
        우리를 개혁하실 분이 오직 코람데오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남을 개혁시킬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며, 끔찍하다 할 결론이다. 다만 개혁의 하나님이 ‘파송’하는  자가 사람을 개혁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파송을 받은 자들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은 파송 받아서 세상을 개혁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감을 지칭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개혁할 수 있다. 하루 아침에 솟아난 개혁 주체라고 자청할 수 없기에, 우리는 매일 말씀으로서 자신을 개혁시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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