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주님과" 연재 / 코람데오2 투고
2002.02.08 00:37 Edit
코람데오(2)
유해무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폭로된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두 번째 의미가 있다. 즉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가?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도피하여 그를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을 당당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정면으로 대면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고 소집하셨다. 아담은 피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출두하였다. 그들은 애굽의 고깃가마 곁으로 피하려고 하였다. 이런 충동은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고립 중에 살려고 한다.
루터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놓지 않으셨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셨다. 준엄한 심판의 하나님이 그를 놓지 않으셨다. 그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수도자가 되어서 흠없이 살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자기 의를 쌓으려고 애를 썼고, 다른 편으로는 교인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으나 정작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아무리 정직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그 순간과 잠자리에서 남는 것은 후회 뿐이었다. 루터가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대면했지만,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없는 것은 도피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죄인을 징벌하는 하나님을 그는 사랑하지 않고 실상은 미워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지는 않았으나, 불평 가운데서 모든 용기를 잃고 말았다.
이때에 루터가 깨달은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었다. 즉 그는 이런 내면적인 문제를 혜탈의 방식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 그 말씀의 바른 이해로부터 해결하였다. 이것이 ‘오직 성경’의 내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의이다. 이전의 루터는 의를 자신의 의로 생각하였다. 준엄한 하나님이 루터 자기에게 의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에게 무언가 보여줄 것이 있어야 상관이나 연장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같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뇌물이라는 것이 이런 의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고 나타난다고 하는가? 의는 인간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복음에서 계시하셨다. 그런데 그 의를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다. 의는 인간의 행위 없이 은혜로 죄인인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므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다(고전 1:29).
핵심은 ‘의’이다. 루터는 성경이 말씀하는 의가 인간의 자기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시편을 강해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구원하소서”(시 71:2).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피난처로 삼는 자, 그는 야웨의 의로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의가 바로 복음에 계시되었다. 복음에 계시된 이 의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22). 이 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化身)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 있는 옷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옷을 입고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이라는 것이 코람데오의 첫 의미였다. 이제 이 예수님을 옷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의인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서면 의인이다. 코람데오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의인이라는 진리이다. 이처럼 코람데오는 루터가 깨달은 이신칭의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고 의인이 된다.
루터가 코람데오로써 오직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주장하였다면, 그는 영원한 비관론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죄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깨닫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라는 이 영원한 낙관론으로 인하여 자신이 죄인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다. 이제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의인으로서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고 이겨야 한다(히 12:4).
이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아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가 아주 좋은 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는 항상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것은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들면서 하나님 앞에 서며 살아간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산다. 다만 이 ‘하나님 앞에’ 자기 혼자 서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덕에 서느냐의 차이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일 수밖에 없다. 예배 후에 선포되는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우리를 덮어 감추지 않고서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삶에서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아가기 일쑤이다. 우리도 예수님 없이 살며, 예수 장이로서 살지 않을 위기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서있다. 이름만 올려놓은 신자가 많으며, 유명무실한 교회가 적지 않은 것은 코람데오의 고백을 철저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우리는 하나님 앞을 떠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죄인과 의인으로서 지속적으로 살아간다.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어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며, 남을 헤치는 인신공격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 부정을 꾀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행각을 벌이겠는가. 그런 순간 우리는 어느 존전 앞에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사는 자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 되며, 동시에 무신적(無神的)이기게 된다. 우리의 범죄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하게 욕보이는 처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히 6:6).
코람데오, 이것은 우리가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유해무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폭로된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두 번째 의미가 있다. 즉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가?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도피하여 그를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을 당당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정면으로 대면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고 소집하셨다. 아담은 피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출두하였다. 그들은 애굽의 고깃가마 곁으로 피하려고 하였다. 이런 충동은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고립 중에 살려고 한다.
루터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놓지 않으셨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셨다. 준엄한 심판의 하나님이 그를 놓지 않으셨다. 그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수도자가 되어서 흠없이 살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자기 의를 쌓으려고 애를 썼고, 다른 편으로는 교인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으나 정작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아무리 정직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그 순간과 잠자리에서 남는 것은 후회 뿐이었다. 루터가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대면했지만,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없는 것은 도피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죄인을 징벌하는 하나님을 그는 사랑하지 않고 실상은 미워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지는 않았으나, 불평 가운데서 모든 용기를 잃고 말았다.
이때에 루터가 깨달은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었다. 즉 그는 이런 내면적인 문제를 혜탈의 방식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 그 말씀의 바른 이해로부터 해결하였다. 이것이 ‘오직 성경’의 내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의이다. 이전의 루터는 의를 자신의 의로 생각하였다. 준엄한 하나님이 루터 자기에게 의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에게 무언가 보여줄 것이 있어야 상관이나 연장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같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뇌물이라는 것이 이런 의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고 나타난다고 하는가? 의는 인간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복음에서 계시하셨다. 그런데 그 의를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다. 의는 인간의 행위 없이 은혜로 죄인인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므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다(고전 1:29).
핵심은 ‘의’이다. 루터는 성경이 말씀하는 의가 인간의 자기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시편을 강해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구원하소서”(시 71:2).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피난처로 삼는 자, 그는 야웨의 의로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의가 바로 복음에 계시되었다. 복음에 계시된 이 의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22). 이 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化身)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 있는 옷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옷을 입고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이라는 것이 코람데오의 첫 의미였다. 이제 이 예수님을 옷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의인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서면 의인이다. 코람데오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의인이라는 진리이다. 이처럼 코람데오는 루터가 깨달은 이신칭의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고 의인이 된다.
루터가 코람데오로써 오직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주장하였다면, 그는 영원한 비관론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죄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깨닫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라는 이 영원한 낙관론으로 인하여 자신이 죄인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다. 이제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의인으로서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고 이겨야 한다(히 12:4).
이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아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가 아주 좋은 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는 항상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것은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들면서 하나님 앞에 서며 살아간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산다. 다만 이 ‘하나님 앞에’ 자기 혼자 서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덕에 서느냐의 차이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일 수밖에 없다. 예배 후에 선포되는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우리를 덮어 감추지 않고서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삶에서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아가기 일쑤이다. 우리도 예수님 없이 살며, 예수 장이로서 살지 않을 위기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서있다. 이름만 올려놓은 신자가 많으며, 유명무실한 교회가 적지 않은 것은 코람데오의 고백을 철저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우리는 하나님 앞을 떠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죄인과 의인으로서 지속적으로 살아간다.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어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며, 남을 헤치는 인신공격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 부정을 꾀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행각을 벌이겠는가. 그런 순간 우리는 어느 존전 앞에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사는 자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 되며, 동시에 무신적(無神的)이기게 된다. 우리의 범죄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하게 욕보이는 처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히 6:6).
코람데오, 이것은 우리가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