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추달 선생님 생애 요약


◎ 주남선 전기 '해와 같이 빛나리' 중에서 발췌


5. 순교자 배추달 집사

배추달 집사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었기에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였다.

당시 화양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이십리 밖, 관기리에 교회가 있었다. 관기교회였다. 추달은 어머니와 관기교회를 출석하였다.

추달은 학교를 하지 못했고 집에서 한글을 좀 익혔다. 집이 가난하여 먹는 문제가 항상 염려였다.

추달이 뼈가 굵어지자 남의 집일을 도와 주었다.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달은 남의 집 머슴으로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부지런히 잘 하므로써 교회에서 일찍 집사로 임명이 되었다. 관기교회 집사로서 그는 열심으로 신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1950년 3월이었다. 거창에서 주남선 목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관기교회에도 날아왔다. 소식을 들은 추달집사의 가슴이 뛰었다. 배우고 싶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부모보다 열정적이었다.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추달 집사는 거창으로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생이 된 추달 집사는 너무나 기뻤다.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성경을 체계 있게 배우는 일은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감격할 뿐이었다.

머슴살이로 천대받으며 지내야 했던 그가 성경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주로 학과를 가르쳤다.

성경학교의 수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6·25동란이 터졌다. 성경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식 날, 주 목사님의 설교에 추달 집사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신앙으로 살되 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싶었다. 산 순교자 주 목사님의 행동 하나 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신앙의 길은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품위를 한결 높혀 준다고 생각하였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추달 집사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노트를 훑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군들이 묘산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순경들이 피난을 가라고 호령을 했다.

화양리 사람들은 봇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추달 집사도 어머니와 함께 피난에 나섰다.

피난민들은 낙동강 철교가 있는 합천과 창녕의 경계선까지 갔다. 적포철교가 파손되어 끊어져 통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건너 갈 수가 없었다. 화양리 사람들은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화양으로 돌아온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밤, 가정에서 추달 집사와 교인들은 구역 기도회를 가졌다. 예배는 정운택 선생이 인도하였다.

정운택 선생(현재 부산시 이사벨여고 교사)은 당시 묘산국민학교 교사였다. 정 선생은 하동 사람으로 사범학교 졸업 후, 묘산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나서 와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자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선생은 배추달 집사와 함께 뒷산으로 도망갔다. 배 추달은 24살이었는데, 다섯 살은 아래로 볼 정도로 몸이 가늘고 뼈대가 가늘었다.

얼굴이 검고, 죽은 깨가 조금 깔아져 있었다. 그는 관기교회 청년 집사였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는 뒷산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 숯을 굽던 굴이 있었다. 숯굴에 자리를 정했다.

다음 날, 종일을 숯 굴에 있다가 밤이 되어 내려와 먹을 것을 얻어서 올라갔다.

며칠을 지내니 배 집사 어머니가 걱정을 하여 아들을 타일렀다.

“내려와서 집에 있거라. 뒤는 어찌되든 그냥 지내보는 거지.”

“안되요. 정 선생이 그러는데 잡히면 큰일난데요. 괴뢰군은 지독하답니더.”

줄곧 배 집사는 정 선생과 함께 숯 굴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정 선생과 배 집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정 선생 사촌 누나집에 들렸다. 이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정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부인들이 몇이 참석하였다.

예배가 끝나고 나자 인민군을 앞세우고 지방 치안대원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인부동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예배를 끝낸 이 집 마루에는 청년이라곤 두 사람뿐이었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였다. 치안대원 중에 정 선생을 잘 아는 분이 있었다. 해서 정 선생은 차마 가자하지 못하고 배추달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따라갑시다. 일을 해야 하겠는데······”

“안됩니다.”

“안되다니?”“오늘은 주일이빈다. 주일은 일을 못합니다.”

“예배는 끝났지만, 주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야! 나라를 구해야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은 죄가 만항서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들여야 합니다.”

“이 새끼 아주 악질이구나!”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의 길이다.

“가자!”

배 추달 집사는 그들에게 끌려 내무서까지 갔다.

“저 벼 한 가마를 방앗간까지 져다 주고 가!”

“못합니다.”

“그렇게 해! 그러면 내일 부역을 면해 준다.”

부역이란 탄약을 지고 영산까지 가는 일이였다. 화양에서 영산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백리 길을 탄약을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부역을 하겠습니다.”

배추달 집사는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약을 지고 전쟁터를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럼 벼 지고 가는 일은 그만 두고, 저 돼지를 몰고 따라가자.”

내무서 앞 미루나무에 매어 둔 돼지를 가리켰다.

“그럴 바엔 벼를 지고 가지요. 돼지를 몰고 가자 함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다시 인민군은 비를 가지고 왔다.

비를 추다 집사에게 주면서

“자, 그럼 이 마당이나 좀 쓸고 가라!”

“안됩니다. 주일에 마당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쓸라고 명령하심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좋아! 그럼 이 비를 받아 들기만 해! 그럼 용서한다.”

“그것도 못합니다. 내가 비를 받으면 마당을 쓸라 할 것이고, 마당을 쓸면 돼지를 몰라 할 것이고, 돼지를 몰면 벼 지고 가자 할 것이고, 그러면 잡일을 다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썅, 이 간나새끼!”

인민군의 부릅뜬 눈알이 금시 뚝 삐져 나올 것만 같다.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내무서 안으로 끌고 가 유치했다.

다음 날,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을 쏘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 집사 배추달은 순교를 당한 것이었다.

관기교회 이대형 집사가 배추달 집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시체는 두개골과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 총을 맞았지만 그의 시체는 험하지 않았다.

타박상의 상처처럼 보였고 얼굴은 평화롭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찬란한 무엇을 바라보듯 황홀경에 빠진 듯,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이대영 집사는 교회에 알리고 배 집사 어머니에게 통지하여 배 집사 시체를 그곳에 가매장 하였다.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창호지로 곱게 덮어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묻어두었다. 인민군들의 눈이 두려워 정식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 둔 것이었다. 그 날, 배추달 집사가 끌려가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정 선생은 치안대원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윤용환이란 사람의 헛간에 숨어 십오일을 지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에게 발견되어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저녁 무렵, 허술한 틈을 타서 담을 뛰어 넘었다. 뒷산을 향하여 뛰었다. 무사히 숲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나무 뿌리를 파먹고,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 야생동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20일이 지났다. 얼굴을 숲 밖으로 내밀고 마을 쪽을 살피니 인민군들의 행렬이 삼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퇴하는 듯 보였다.

일직이 해가 저물 무렵, 고령 쪽에서 유엔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정운택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정 선생은 수복 후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 일을 봤다.

그 해 12월 중순. 남영환 전도사는 관기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주간에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이야기가 나와 장례를 하도록 주선을 하였다.

관을 준비하여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팠다. 교인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니가 그대로 나왔다. 가마니에 응겨붙은 흙을 털고 가마니를 풀었다. 시체가 창호지에 싸인 채 나왔다.

수분이 빠지고 곱게 말라 있었다. 창호지도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를 풀었다. 시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에 총 맞은 가슴과 등 쪽에 노란물이 번져있을 뿐 시체는 깨끗했다. 관에다 그대로 넣었다. 흰 꽃상여에 관을 실어 청년들이 메었다.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장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성대히 진행되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모든 장례를 집례하였다. 배추달 집사의 관은 그의 집이 있는 화양리 뒷산에 고이 안장되었다.

배추달 집사는 전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화양에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배추달 집사는 머슴사경 받은 것 가운데서 푼푼이 떼어 주인집에 맡겨 둔 것이 있었다. 순교 후 주인집에서 내어놓은 것이 벼 한 섬 반과 돈 15만환이었다. 주인은 배추달 집사 모친에게,

“이것은 추달이 머슴사경 중에 화양에 교회 짓는다고 별도로 맡겨 둔 것입니다.”
벼와 돈을 내밀었다.

이 사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는 이 소식을 듣고 화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당 건축을 서둘렀다.

다음 해, 화양에는 교회당이 서게 되었다. 아담한 교회당이 화양리 마을 중아에 찬란한 십자가 종각을 우뚝 내밀고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