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를 개탄함 - 기독교보 투고
2002.07.17 22:57 Edit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를 개탄함-유해무교수(상)
<기독교보>
영하 십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가운데, 한국 정치 또한 신년 벽두부터 꽁꽁 얼
어붙었다. 말이 좋아 상생(相生)의 정치이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
명분’ 찾기에만 급급한 듯 하니, ‘정치판’이라는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
국가와 백성을 안위하려는 정치의 대의와 원리를 따르지 않고, 당리당략과 인
간의 근원적인 모습인 이기주의적 행태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교회 안에서도 신조와 원
리를 따라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기보다는 때로는 자기의 주장을 강
하게 내세울 뿐 아니라 명분을 따라서 형제를 세속법정에 끌고 가는 일이 비일
비재하단다. 이러고서도 어찌 예물을 제단에 드릴 수가 있겠는가? 조변석개하
는 정치가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형제를 세속법정에 송사하는 성도
들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1. 최근의 몇 가지 사건들
작년 10월 24일에 주요 일간지는 짧지만 성도들에게는 교훈적인 기사롤 보도하
였다. 즉 1999년 자신의 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목사가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되었다면서, 한 장로가 당선무효확인청구의 訴를 제기했었다. 재판부인 서
울지법의 민사 28부는 기독교 교리와 신의 명령을 어기면서 교회 문제를 세속
법정으로 가져올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신으로 처리해야 한다
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총회장의 임기가 그 해 9월로 끝난 만큼 訴의 실
익이 없다며 원고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재판부는 선거과정의 비민주성도 강하
게 비판하면서, 이는 국회가 국회법을 무시하면서 의사를 진행하는 것과 마찬
가지의 불법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런 차제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고려)총회, 이른바 ‘반고소파’는 우리 제50
회 총회가 그들과 합동을 위하여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데 대해서, 성명서
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기독교신문, 2000년 10월 29일자). 먼저, 제26회
고신총회는 성도간의 소송은 부득이한 경우와 교회법에 불복하는 경우 외에는
사회 법정에서 소송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라고 결의 천명하면서, 제7회
및 제23회 총회의 결의를 번복하였으니,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로, 소송을 반대하는 목사들을 징계하였는데, 해벌
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고신교단이 고려신학교 설립 당시의 본
래의 신앙과 이념을 퇴색시키고 있는 것을 크게 우려하며, 합동을 운운하는 대
세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본 교단의 한 목사님께서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의 업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부산지법에 제출하였다(기독교보, 2000년 12월 23일자). 그것은
작년 총회에서 행한 이사 선거 시에, 특정 계파가 자기 계파에 속한 후보의 명
단을 적은 쪽지를 돌렸다는 선거부정행위가 이유다. 이 기사의 바로 위에는 ‘
그렇게’ 구성된 새 이사회가 벽두부터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기사도 실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처분건으로 피소된 현 이사장
은 작년 3월에 이사의 자격으로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 교수 1인과 전
공의 1인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부산지방 검찰청에 고발하였
고, 이 두 사람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신문, 2001년 1월 6일자).
이 글의 목적은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
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입장을 개진하려 함에 있다. 그것은 우리 고려파
가 역사적으로 그 문제를 공개적이고 진솔하게 정리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민사, 형사를 막
론하고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이런 성도들이 송사건을 재고하도록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목적이라 하겠
다.
2. 역사적 개요
2-1. 세속 법정에서의 예배당 명도청구소송과 이에 대한 응소(1950년대)
우리 고려파는 출범 초기에 교회당 양도 문제로 인하여 성도간의 소송 문제에
직면하였다. 경남노회가 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있은 제36회
총회에서 축출 당한 뒤에, 총회측은 경남(법통)노회에 속한 교회들에게 교회당
양도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한상동목사는 교인들의 80%
의 지지를 받았으나, 자신의 당회의 당회원인 양성봉장로도 접수위원인 것을
안 뒤, 교회당 쟁탈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교회
당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총회측이 진주, 거창, 마산문창교회에 대해서는 세속
법정에서의 명도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므로, 이 교회들은 개교회의 재산을 보
호하기 위하여 응소(應訴)하였다. 문창교회의 경우, 교회 재산은 총회 소유가
아니라 “교인들의 총유(總有)”라는 유리한 법정 판결이 나왔으나, 소수의 지
지만을 확보하고 있던 송상석목사는 수년간의 법정 투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법정비용과 영적 생활의 피해를 본 후에 교회 별관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목사는 “신자가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1953). 그는 고려파운동 10년을 기념
하면서, 교정해야 할 첫 문제로 ‘예배당 쟁탈’을 들었다. 1957년 2월 박목사
는 교장직을 사임하고서, 특히 [파수군]을 통하여 소송건은 고린도전서 6:1-8
을 어기는 행위이며, 이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으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송목사는 응소하면서 교회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은 성경적, 교리적, 역사적으로 잘못됨이 없다는 취지의 장문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박목사의 입장은 대체로 월남한 교역자로 구성된 경
기노회가 강하게 지지하였다. 그 노회는 1957년 9월에 모인 고려파 제7회 총회
에다가 예배당 쟁탈전은 비성경적이므로 그런 쟁탈전은 중지시켜 달라는 건의
안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자신들의 상정안에 대하여 선한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경기노회는 예배당 소송 문제를 그만둘 때까지 총
회와의 행정관계를 보류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국 그들은 합동(1960) 이후에 합
동측에 합류하였으며, 환원(1962)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총회가 열리기 전인 1957년 9월 13일에, 고려신학교 이사회와 교수회는 박목사
를 교수로 재영입하기 위하여, 예배당 쟁탈을 위하여 세속법정에서의 소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므로, 고려신학교는 그런 소송을 하지 않기로 한다
는 요지의 결정을 하고서 공동명의로 성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그러한 입장을 결의한 적이 없다.
2-2.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건(1970년대)
우리는 1970년대에 성도간의 세속법정 송사를 또 경험하게 된다. 1973년 6월,
고려신학대학을 운영하며, 김희도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는 송상석목사를 ‘사문서 위조의 혐의’로 부산 검찰청에 고발하였고,
‘이사장직권정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었다. 발단은 1972년 제22총회에서
이사회가 개편되었는데, 송목사는 총회의 내규를 따라서 임기 4년이 만료됨과
동시에 이사장직에서도 퇴임하여야 하였고, 후임 이사장을 새로 선임하였다.
그런데 송목사는 자신이 가진 이사장직이 계속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즉 총회
내규의 관점에서 보자면, 송목사의 임기는 1968년 총회에서 선임되어 1972년
총회에 만료되었지만, 그의 이사장직에 대해서는 문교부가 1971년 9월부터 197
5년 9월까지 4년간의 임기를 승인한 바가 있다. 그 와중에서 송목사는 자기 편
의 이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이사가 모여서 이사회를 열고 마치
다른 두 사람도 참석한 것처럼 꾸며서, 또 다른 두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였다
는 식으로 이사회 회의록을 작성하였고, 이 회의록을 근거로 하여서 이사 승인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세상법에 호소하는 송목사 자신도 세상법을 어
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셈이다.
이 사건은 5년 전인 1967년, 당시의 고려신학교 당국이 당시에도 이사장인 송
목사 몰래 신학대학의 인가를 위하여 ‘假이사회’를 조직하여 문서를 위조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 당시에는 송목사가 피해자였으나, 이제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송목사가 세상법에 호소하여 자신의 직권을 주장하므로, 이사회도 세상
법에 호소하여 해결을 모색하게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대학 교수
회는 1973년 6월 13일에 발표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 문제”라는 논문에
서, 특히 로마서 13장과 고린도전서 6장의 주석에 기초하여, 사법권이 없는 교
회가 형제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논지를 밝
히면서, 이사회의 세속법정 소송을 신학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런데에도 1973년
9월에 모인 제23회 총회는 “성도간의 법정 제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앙
적이 아니며, 건덕상 방해됨으로 (제소)하지 아니 하는 것이 본 교단 총회 입
장”임을 밝혔다. 법정 소송을 제기한 김목사와 다른 한 사람이 총회 앞에서
사과하였다.
결국 송목사는 법정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사장 직무정지를 당
하였다. 게다가 1974년의 제24총회는 소송문제에 관한 제23총회의 결의는 우리
교리표준(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에 위배된 결의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수정,
가결하였다: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결정은
성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을 허용한 결정이며, 이전 총회의 결정을 파기하였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제24총회는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였고, 이 재판국은
그해 12월에 송목사의 ‘목사직 면직’을 결정하였다. 송목사가 속해 있던 경
남노회는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고, 1975년 제25총회는 경남노회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경남노회는 행정 보류를 선언하였고, 스스로를 ‘反고
소파’라 칭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모인 제26총회는 제24총회 결정을 “부득
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송하지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라고 再수
정, 결의하였다. 訟事件으로 인한 교단 분열이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송목사는 1975년 초에 당시 이사들을 상대하여 형사상의 고소를 하
기도 하였다. 이 쯤에 경기노회에 속해 있는 몇 교회들도 ‘반고소파’에 가담
하여서, 1976년 1월에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하였다. 복교선언서는 교수회
의 논문이 고린도전서 6:1-11을 명백하게 위배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문
교부의 인가를 받고서 개혁주의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신학대학
이 아니라, 교역자 양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1967년 이전의 고려신학교로의 복
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1976년 10월에 통합 총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경기노회측 인사들은 송목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순전히 정치적인 갈
등에서 고신총회로부터 제명된 단체이므로 결코 ‘反고소‘와는 무관하다는 입
장을 밝히면서, 1980년에 독자적인 총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경
남노회를 중심으로 한 ‘반고소파’와는 1982년 제32총회에서 아름답게 연합하
였다. 그러면서도 이전 총회의 결정을 재론하지는 않았다.
3. 사안의 복잡성
우리 교단의 역사에 점철되어 있는 이 두 사례의 주제는 성도간의 세속법정 앞
에서의 송사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다양한 요인들과 인간 관계 및 교회법
에 대한 해석들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1950년대의 예배당 양도건의 경우, 세속 법정에 명도청구소송을 제기한
총회측 교회들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많지 않다. 그 당시의 총회
는 신사참배에 대한 총회적인 회개를 선포한 적도 없고, 게다가 우리 선배들을
법정에까지 끌고 갔다. 이 외에도 송상석, 한상동, 박윤선 목사 등 인간 관계
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새로 형성되는 신학교와 교단의 형편에서, 인적 사
항, 출신 지역, 신학 수업 등 다양한 배경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 경기노회가 보류를 선언함과 동시에, 이북 출신의 교역자들이 대부분 고려
파를 떠나고 말았다. 조금 확대하여 보면, 이것은 고려파가 당분간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분기점이었다.
1970년대의 이사회건은 더 복잡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송목사가 문제의 중심
에 있었다. 또 이 때에도 한상동목사와의 관계가 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게
다가 경기노회의 결정으로 1975년 9월에 그 노회의 젊은 목사들이 작성한 “성
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에 대한 연구위원 보고”는 교단 내의 세대 간의 알력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같은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재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위에 언급한 합동을 거부하고 있는 고려총회와 그 핵
심 인사인 석원태목사의 위치는 대단히 미묘한 주제라 하겠다.
이처럼 소송문제만이 순수하고 유일한 주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을 다 평가할 수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기 때문에, 오
직 불신법정에서의 소송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본 필자가
그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영적,
육적 곤비를 겪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입장이 혹 그
들과 다른 이들을 정죄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도 충분히 있
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유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다만 성경의 교
훈을 밝히고 따르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우리 총회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에 대하여 여러 번 입장을 밝혔으나
,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1950년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소송은
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던 신학교수회가 20여년이 지나기도 전에, 입장을 바꾼
것도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고려파의 한 교인이요, 위 교수회
를 계승하고 있는 교수회의 한 회원으로서, 이제는 성도간의 세상법정에서의
송사에 대해서 성경적인 확고한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이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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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를 개탄함-유해무교수(하)
<기독교보>
지난호에 이어
무엇이 ‘세속법정’ 인가?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 문제를 두 사건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세속법정’은 무엇인가? 교회당 양도건에서, 세속법정은 교회당
이라는 재산권 분쟁을 다룬 법원이었다. 그리고 이사회 사건을 다룬 것도 법원
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의 사건에서 비록 법정의 의미는 아니지만, 검찰청이
성도간의 분쟁을 수사하고 심판하는 입장에 선 적도 있었다. 게다가 학교법인
의 문제인 만큼, 당시의 문교부도 교회와 성도들의 이견을 판단하는 권위적 기
관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법원뿐 아니라 행정기관인 검찰청과 문교부가 성도
간의 대립을 판단하는 권세를 행사한 셈이다. 세속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에
있어서 판단의 권세를 일차적으로는 사법기관인 법원으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두 사례에서는 더 광범위한 세속 권세들임을 알 수 있다.
4.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
4-1. 세상 사건으로 성도를 불의한 자 앞에서 송사하지 말라!
두 역사적 사례에 있어서,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한 해석이 토론의 중심에 있었
다. 교수회의 논문은 “바울 사도는 이 본문에서 신자끼리는 사랑으로 모든 문
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해서 일반 법관들의 판결을
바랄 수 없다”라고 바르게 천명한다. 그리고는 화란 주석가 흐로쉐이드와 칼
빈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모든 법적 송사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소송의
남용(만)을 금한다는 식으로 논조를 바꾼다. 또 “교회가 위임받은 사항이 아
닌 사법권의 행사는 국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라고 함으로써 당시에 제기된
이사회의 송사 사건 자체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
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한 요지는 무엇인가? 성도의 소송 개입 여부나
사법권의 인정 여부인가? 그렇지 않다. 이사회의 송사 사건은 바울이 세상의
권세 일반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과는 일차적으로 관계가
없다. 물론 우리는 세속법정 자체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자나 평화주의자가 아
니다. 바울도 세상의 권위와 법정을 인정하여서, 스스로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
지 않았던가. 본문의 요지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소송’이다. 바울은
성도들간에 있는 문제는 성도들끼리 해결해야지, 불의한 자 앞에 문제를 들고
가지 말라고 교훈한다(6:1). 왜 교수회는 이런 주장을 한 박윤선목사의 [고린
도전후서] 주석(1962년)이나 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파수군](1957년)에 여러
차례 발표한 글들은 인용하지 않고 있는가? 성도들이 ‘세상 사건’(고전 6:4)
을 가지고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형제를 송사하며, 교회 안에 있는 다
른 형제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 문제이다. 이렇게 송사
하는 이들은 ‘나’라는 개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으면서, 세상을 향하여서는
‘우리’, 곧 교회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아주 격한 어조로 그런 세속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차라리 불의를 당
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전 6:7)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4-2. 하물며 영적인 일이랴!
그런데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측면이 두 가지가 더 있다. 먼저, 우리 고려파
역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성도들이 법적인 ‘자연인’으로서 법정에서 소송하
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성도들이지만 ‘교회’가 소송을 당하거나 제기한 것
이었다. 또는 법적인 지위를 가진 자가 자신이 대표하는 기관을 대표하여 소송
을 내었다. 둘째로, 재산권 문제였고, 이사장의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였으나,
이것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사안들’이 아니었다는 점
이다. 즉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하는 사안과 성격상 다른 문제를 가지고 세속
법정 앞에 섰던 것이다.
우리 고려파의 문제는 세속적 사안들이 아니라, 교회적 사안이었고, 세상 사건
이 아니라 영적 사건이었다. 바울은 교회가 장차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터인데
, 이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일을 가지고서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세속법
정에 가는 것을 강하게 질책한다. 그는 성도들이 가진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특
권과 안목에 호소하면서, 성도들이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 세상 법관 앞에서 심
판받으려 하는 영적인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하물며 나중에 우리의 심판을 받
을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영적인 사안들을 가지고서 재판을 받는 것은 엄청난
자가 당착이요, 영적인 수치라는 것이다.
교회당은 재산권 행사의 목적물이기 이전에, 예배를 위한 영적인 측면을 가지
고 있다. 교회당 명도 소송은 어떤 주택이나 건물을 가지고 성도가 불신자나
성도들끼리 다투면서 법정에 호소하는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럴 경우
라도 바울은 불의를 당하고 속을 것을 권한다.
하물며 교회가 교회당의 명도와관련하여 세상 법정에 송사를 제기하는 것은 교
회당을 재산권 행사의 목적물로전락시키는 행위이므로 영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한심한 짓이라는 웅변적인 해석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짓은 법은 의
지하되, 그 법을 주신 법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경건한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성도는 종말론적 심판의 관점에서 현재의 사안들을 평가할 수 있
는 영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4-3. 총회 내규냐 교육법이냐?
이사회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검찰에 고발하고 법원에 가는 이런 수치스러운
처신의 배후에는, 더 큰 문제가 깔려 있다. 이제는 이 문제가 교회적 사안인가
, 아니면 교육의 제문제에 관한 세상적 사안인지를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 총회나 송목사는 동일하게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총
회는 교회법이라는 내규를 내세웠고, 송목사는 세상법을 내세웠다. 그런데 총
회는 이사회를 통하여 세상법에 호소하였고, 세상법을 내세웠던 송목사는 세상
법의 정죄를 받았다. 만약 총회가 교회법을 내세웠다면, 교회 안에서 모든 문
제를 해결하는 것이 正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법정에 호소한 것은 자
가 당착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고려파 안에는 불의한 자의 판단을 능가
하는 종말론적 지혜와 판단력을 가진 형제들이 없었다는 말인가. 이사회나 송
목사나 다 같이 교수회의 지적처럼, “바울은 복수심과 적의와 악감정을 가지
고, 형제를 해칠 목적으로 (소송)하니, 이것이 잘못이라”는 질책을 받아야 마
땅하다. 영적 안목을 찾기 힘들고, 종말론적 대망에서 나오는 판단력을 발휘한
흔적도 없다. 이것은 영적 빈곤이고 영적 수치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엄청난 범죄행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은 자기들 사이에 있는
영적인 문제를 검찰권이나 사법권이 개입하고 심판하도록 내어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그런데도 고려파의 두 사건은 저급한 세상적 사
안이 아니라 영적 사안을 세상의 심판에 내어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즉 교육법과 교육부의 존재
이다. 고려신학대학이 설립되고, 고려신학교가 폐교됨과 동시에, 신대원을 포
함한 대학은 교육부의 지시와 감독을 받아야만 하였다. 세상 감독권보다 먼저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는 우리가 ‘私租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권세를 굴복해야 할 의무
를 가졌으나, 그 권세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편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마치
그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이 不在中이라고 착각이나 한 듯이 말이다. 1967년 5
월 17일에 ‘학교법인 고려학원’이 인가를 취득한 이후 지금까지, 당시의 문
교부와 지금의 교육부는 형제들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심판하는 권세의 위치를
확고하게 점하고 있다. 총회가 구성한 이사회와 이사회가 관장하는 학원은 지
속적으로 교육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으며, 교육부로부터 법적 자격과 권리와
임무를 부여받는다. 세속법정에서 성도간에 영적인 사안으로 송사하던 두 사건
들 이후, 이제는 고려파 성도들간에 발생하는 큰 이견들을 판단하는 주요한 귄
세가 교육부이다. 이 권세를 중심으로, 검찰에 고소도 하고, 이사장 직무집행
정지가처분도 신청한다.
4-4. 이사회는 세상 사건을 다루느냐 아니면 영적 사건을 다루느냐?
이제 이사회가 관장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영적이며, 어떤 점에서 세상적인지
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보의 보도처럼, 이사
회의 회의와 운영의 난맥상은 굳이 법정에 가는 극한 상황을 상정할 필요도 없
이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는 바울의 꾸중을 상기시킨다. 우리 이사회는 영적인 일을 관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적인 일을 관장하고 있는가? 이것은 이미 제소된 가처분건
을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사회를
구성한 총회와 총회에 총대를 파송한 교회가 이사회를 통하여 하고 있는 일의
성격을 규명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실은 1967년을 전후하여서 학교법인 설립과
대학 설립을 위한 범교단적인 토론이나 의견 수렴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책
적인 토론을 통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기초보다는 교회 치리기관을 통한 행정
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을 통하여 법인과 대학과 의과대학은 인가를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반고소파’가 고려신학대학이 아니라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
언한 사실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즉 성경에 입각하
여 교회와 인류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할 개혁주의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을 운영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영적이며, 어떤 점에서 세상적인 일이
라는 데에 대한 신학적 토론과 이를 통한 공감대가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별도의 논의를 요하기에, 여기서는 이만 약한다.
5. 글을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한 교역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이를 가지고 우
리의 정체성을 삼으면서, 고려파의 우월성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다른 교파들에게 그들이 신사참배 문제를 청산할 것을 촉구하고 원한다
면, 우리가 먼저 이 소송건에 대해서 한국교회 앞에서 자복하고 통회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지만, 먼저 이 사
안 자체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기 위하여, 소송과 연관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안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한 신앙고백과 성도
의 교제 안에서 성령님의 지혜를 의지하면서 성도간에 격조 높은 토론 문화가
정착되기를 제안하며 실현되기를 염원한다. 엄청난 노력과 상호 이해의 자세를
가지고서, 이 사안에서도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죽는 개혁주의 전통을 정착
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에 관한 우리 총회의 이전 결정과 신학교
수회의 논문을 재론하여야 한다. 아니,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우리는 과거
에 실수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속히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
하고, 한국교회 앞에 이를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불화하여서 세속적
인 권세의 심판을 호소하고 의지하려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태도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사안뿐 아니라, 영적인 사안을 가지고 세속법정에 소송하
는 행위를 단호하게 금하며, 필요하다면 교회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1973년의 ‘이사장직권정지가처분신청’을 연상시키는 세속 법정에의 청구가 2
000년 후반기에 개인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필자는 e-메일을 통하여 해 신청인
에게 여러 차례 취하를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분은 필자의 요청을
정중하게 수긍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응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실로 금
할 수가 없다.
필자는 본의 아니게 지난 1995년에 ‘세속적인 사안’으로 성도와 법정 소송을
한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종중을 대표하는 종손과 송사를 하였는데, 나중에
신자요 목사인 그 종손이 종중 재산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재산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긴 재판을 개의치 않고, 나는 여섯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분과 법정
화해를 하였다. 그분이 토지의 2/3를, 우리가 1/3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
금도 그것이 종중의 재산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1994년도에 교통사고로
소천하신 선친께서 그 때 이미 30년 전에 그 종중으로부터 구입한 토지였는데,
不信 동민들은 이런 우리를 향하여 부모의 피땀이 어려있는 땅을 함부로 허비
하는 작자들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양보하고 손해를 즐겨 감
내하셨던 믿음의 맹장이신 선친의 믿음을 지켰다. 만약 우리가 법대로 승소를
고집하였다면, 재산은 지켰겠지만, 동민들은 우리의 믿음을 비난하면서, 선친
께서 섬겼던 삼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짓밟았을 것이다. 우리는 차라리 속
는 것이 낫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랐고, 이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전말을 전해들은 어떤 목사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1970년대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총회의 결정을 재론해야 할 것이고, 필자같은 소장 신학자가 앞
장 설 것을 권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얼마 전에 자신의 교인들을 여러 건수의
세속 법정에의 송사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만이 성도간의 법정 소송에 대한
명확한 답을 깨닫게 하며,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
실 한 분 재판장만이 계실 뿐이다. 그 분으로 인하여 종말론적 특권을 소유하
였으니, 하챦은 세상 사건으로 형제를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혜로우며, 지혜로운 형제들이 우리 중에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 송사문제에 있어
서도 이방인과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명분에 빠져서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정치판을 향하여 반성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
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끝>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기독교보>
영하 십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가운데, 한국 정치 또한 신년 벽두부터 꽁꽁 얼
어붙었다. 말이 좋아 상생(相生)의 정치이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
명분’ 찾기에만 급급한 듯 하니, ‘정치판’이라는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
국가와 백성을 안위하려는 정치의 대의와 원리를 따르지 않고, 당리당략과 인
간의 근원적인 모습인 이기주의적 행태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교회 안에서도 신조와 원
리를 따라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기보다는 때로는 자기의 주장을 강
하게 내세울 뿐 아니라 명분을 따라서 형제를 세속법정에 끌고 가는 일이 비일
비재하단다. 이러고서도 어찌 예물을 제단에 드릴 수가 있겠는가? 조변석개하
는 정치가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형제를 세속법정에 송사하는 성도
들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1. 최근의 몇 가지 사건들
작년 10월 24일에 주요 일간지는 짧지만 성도들에게는 교훈적인 기사롤 보도하
였다. 즉 1999년 자신의 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목사가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되었다면서, 한 장로가 당선무효확인청구의 訴를 제기했었다. 재판부인 서
울지법의 민사 28부는 기독교 교리와 신의 명령을 어기면서 교회 문제를 세속
법정으로 가져올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정신으로 처리해야 한다
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총회장의 임기가 그 해 9월로 끝난 만큼 訴의 실
익이 없다며 원고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재판부는 선거과정의 비민주성도 강하
게 비판하면서, 이는 국회가 국회법을 무시하면서 의사를 진행하는 것과 마찬
가지의 불법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런 차제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고려)총회, 이른바 ‘반고소파’는 우리 제50
회 총회가 그들과 합동을 위하여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데 대해서, 성명서
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기독교신문, 2000년 10월 29일자). 먼저, 제26회
고신총회는 성도간의 소송은 부득이한 경우와 교회법에 불복하는 경우 외에는
사회 법정에서 소송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라고 결의 천명하면서, 제7회
및 제23회 총회의 결의를 번복하였으니,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로, 소송을 반대하는 목사들을 징계하였는데, 해벌
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고신교단이 고려신학교 설립 당시의 본
래의 신앙과 이념을 퇴색시키고 있는 것을 크게 우려하며, 합동을 운운하는 대
세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본 교단의 한 목사님께서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의 업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부산지법에 제출하였다(기독교보, 2000년 12월 23일자). 그것은
작년 총회에서 행한 이사 선거 시에, 특정 계파가 자기 계파에 속한 후보의 명
단을 적은 쪽지를 돌렸다는 선거부정행위가 이유다. 이 기사의 바로 위에는 ‘
그렇게’ 구성된 새 이사회가 벽두부터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기사도 실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처분건으로 피소된 현 이사장
은 작년 3월에 이사의 자격으로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 교수 1인과 전
공의 1인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부산지방 검찰청에 고발하였
고, 이 두 사람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신문, 2001년 1월 6일자).
이 글의 목적은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
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입장을 개진하려 함에 있다. 그것은 우리 고려파
가 역사적으로 그 문제를 공개적이고 진솔하게 정리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민사, 형사를 막
론하고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이런 성도들이 송사건을 재고하도록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목적이라 하겠
다.
2. 역사적 개요
2-1. 세속 법정에서의 예배당 명도청구소송과 이에 대한 응소(1950년대)
우리 고려파는 출범 초기에 교회당 양도 문제로 인하여 성도간의 소송 문제에
직면하였다. 경남노회가 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있은 제36회
총회에서 축출 당한 뒤에, 총회측은 경남(법통)노회에 속한 교회들에게 교회당
양도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한상동목사는 교인들의 80%
의 지지를 받았으나, 자신의 당회의 당회원인 양성봉장로도 접수위원인 것을
안 뒤, 교회당 쟁탈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교회
당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총회측이 진주, 거창, 마산문창교회에 대해서는 세속
법정에서의 명도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므로, 이 교회들은 개교회의 재산을 보
호하기 위하여 응소(應訴)하였다. 문창교회의 경우, 교회 재산은 총회 소유가
아니라 “교인들의 총유(總有)”라는 유리한 법정 판결이 나왔으나, 소수의 지
지만을 확보하고 있던 송상석목사는 수년간의 법정 투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법정비용과 영적 생활의 피해를 본 후에 교회 별관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목사는 “신자가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1953). 그는 고려파운동 10년을 기념
하면서, 교정해야 할 첫 문제로 ‘예배당 쟁탈’을 들었다. 1957년 2월 박목사
는 교장직을 사임하고서, 특히 [파수군]을 통하여 소송건은 고린도전서 6:1-8
을 어기는 행위이며, 이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으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송목사는 응소하면서 교회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은 성경적, 교리적, 역사적으로 잘못됨이 없다는 취지의 장문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박목사의 입장은 대체로 월남한 교역자로 구성된 경
기노회가 강하게 지지하였다. 그 노회는 1957년 9월에 모인 고려파 제7회 총회
에다가 예배당 쟁탈전은 비성경적이므로 그런 쟁탈전은 중지시켜 달라는 건의
안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자신들의 상정안에 대하여 선한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경기노회는 예배당 소송 문제를 그만둘 때까지 총
회와의 행정관계를 보류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국 그들은 합동(1960) 이후에 합
동측에 합류하였으며, 환원(1962)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총회가 열리기 전인 1957년 9월 13일에, 고려신학교 이사회와 교수회는 박목사
를 교수로 재영입하기 위하여, 예배당 쟁탈을 위하여 세속법정에서의 소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므로, 고려신학교는 그런 소송을 하지 않기로 한다
는 요지의 결정을 하고서 공동명의로 성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그러한 입장을 결의한 적이 없다.
2-2.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건(1970년대)
우리는 1970년대에 성도간의 세속법정 송사를 또 경험하게 된다. 1973년 6월,
고려신학대학을 운영하며, 김희도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는 송상석목사를 ‘사문서 위조의 혐의’로 부산 검찰청에 고발하였고,
‘이사장직권정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었다. 발단은 1972년 제22총회에서
이사회가 개편되었는데, 송목사는 총회의 내규를 따라서 임기 4년이 만료됨과
동시에 이사장직에서도 퇴임하여야 하였고, 후임 이사장을 새로 선임하였다.
그런데 송목사는 자신이 가진 이사장직이 계속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즉 총회
내규의 관점에서 보자면, 송목사의 임기는 1968년 총회에서 선임되어 1972년
총회에 만료되었지만, 그의 이사장직에 대해서는 문교부가 1971년 9월부터 197
5년 9월까지 4년간의 임기를 승인한 바가 있다. 그 와중에서 송목사는 자기 편
의 이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이사가 모여서 이사회를 열고 마치
다른 두 사람도 참석한 것처럼 꾸며서, 또 다른 두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였다
는 식으로 이사회 회의록을 작성하였고, 이 회의록을 근거로 하여서 이사 승인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세상법에 호소하는 송목사 자신도 세상법을 어
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셈이다.
이 사건은 5년 전인 1967년, 당시의 고려신학교 당국이 당시에도 이사장인 송
목사 몰래 신학대학의 인가를 위하여 ‘假이사회’를 조직하여 문서를 위조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 당시에는 송목사가 피해자였으나, 이제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송목사가 세상법에 호소하여 자신의 직권을 주장하므로, 이사회도 세상
법에 호소하여 해결을 모색하게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대학 교수
회는 1973년 6월 13일에 발표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 문제”라는 논문에
서, 특히 로마서 13장과 고린도전서 6장의 주석에 기초하여, 사법권이 없는 교
회가 형제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논지를 밝
히면서, 이사회의 세속법정 소송을 신학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런데에도 1973년
9월에 모인 제23회 총회는 “성도간의 법정 제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앙
적이 아니며, 건덕상 방해됨으로 (제소)하지 아니 하는 것이 본 교단 총회 입
장”임을 밝혔다. 법정 소송을 제기한 김목사와 다른 한 사람이 총회 앞에서
사과하였다.
결국 송목사는 법정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사장 직무정지를 당
하였다. 게다가 1974년의 제24총회는 소송문제에 관한 제23총회의 결의는 우리
교리표준(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에 위배된 결의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수정,
가결하였다: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결정은
성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을 허용한 결정이며, 이전 총회의 결정을 파기하였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제24총회는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였고, 이 재판국은
그해 12월에 송목사의 ‘목사직 면직’을 결정하였다. 송목사가 속해 있던 경
남노회는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고, 1975년 제25총회는 경남노회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경남노회는 행정 보류를 선언하였고, 스스로를 ‘反고
소파’라 칭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모인 제26총회는 제24총회 결정을 “부득
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송하지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라고 再수
정, 결의하였다. 訟事件으로 인한 교단 분열이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송목사는 1975년 초에 당시 이사들을 상대하여 형사상의 고소를 하
기도 하였다. 이 쯤에 경기노회에 속해 있는 몇 교회들도 ‘반고소파’에 가담
하여서, 1976년 1월에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하였다. 복교선언서는 교수회
의 논문이 고린도전서 6:1-11을 명백하게 위배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문
교부의 인가를 받고서 개혁주의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신학대학
이 아니라, 교역자 양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1967년 이전의 고려신학교로의 복
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1976년 10월에 통합 총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경기노회측 인사들은 송목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순전히 정치적인 갈
등에서 고신총회로부터 제명된 단체이므로 결코 ‘反고소‘와는 무관하다는 입
장을 밝히면서, 1980년에 독자적인 총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경
남노회를 중심으로 한 ‘반고소파’와는 1982년 제32총회에서 아름답게 연합하
였다. 그러면서도 이전 총회의 결정을 재론하지는 않았다.
3. 사안의 복잡성
우리 교단의 역사에 점철되어 있는 이 두 사례의 주제는 성도간의 세속법정 앞
에서의 송사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다양한 요인들과 인간 관계 및 교회법
에 대한 해석들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1950년대의 예배당 양도건의 경우, 세속 법정에 명도청구소송을 제기한
총회측 교회들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많지 않다. 그 당시의 총회
는 신사참배에 대한 총회적인 회개를 선포한 적도 없고, 게다가 우리 선배들을
법정에까지 끌고 갔다. 이 외에도 송상석, 한상동, 박윤선 목사 등 인간 관계
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새로 형성되는 신학교와 교단의 형편에서, 인적 사
항, 출신 지역, 신학 수업 등 다양한 배경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 경기노회가 보류를 선언함과 동시에, 이북 출신의 교역자들이 대부분 고려
파를 떠나고 말았다. 조금 확대하여 보면, 이것은 고려파가 당분간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분기점이었다.
1970년대의 이사회건은 더 복잡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송목사가 문제의 중심
에 있었다. 또 이 때에도 한상동목사와의 관계가 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게
다가 경기노회의 결정으로 1975년 9월에 그 노회의 젊은 목사들이 작성한 “성
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에 대한 연구위원 보고”는 교단 내의 세대 간의 알력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같은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재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위에 언급한 합동을 거부하고 있는 고려총회와 그 핵
심 인사인 석원태목사의 위치는 대단히 미묘한 주제라 하겠다.
이처럼 소송문제만이 순수하고 유일한 주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을 다 평가할 수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기 때문에, 오
직 불신법정에서의 소송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본 필자가
그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영적,
육적 곤비를 겪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입장이 혹 그
들과 다른 이들을 정죄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도 충분히 있
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유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다만 성경의 교
훈을 밝히고 따르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우리 총회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에 대하여 여러 번 입장을 밝혔으나
,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1950년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소송은
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던 신학교수회가 20여년이 지나기도 전에, 입장을 바꾼
것도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고려파의 한 교인이요, 위 교수회
를 계승하고 있는 교수회의 한 회원으로서, 이제는 성도간의 세상법정에서의
송사에 대해서 성경적인 확고한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이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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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를 개탄함-유해무교수(하)
<기독교보>
지난호에 이어
무엇이 ‘세속법정’ 인가?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 문제를 두 사건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세속법정’은 무엇인가? 교회당 양도건에서, 세속법정은 교회당
이라는 재산권 분쟁을 다룬 법원이었다. 그리고 이사회 사건을 다룬 것도 법원
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의 사건에서 비록 법정의 의미는 아니지만, 검찰청이
성도간의 분쟁을 수사하고 심판하는 입장에 선 적도 있었다. 게다가 학교법인
의 문제인 만큼, 당시의 문교부도 교회와 성도들의 이견을 판단하는 권위적 기
관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법원뿐 아니라 행정기관인 검찰청과 문교부가 성도
간의 대립을 판단하는 권세를 행사한 셈이다. 세속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에
있어서 판단의 권세를 일차적으로는 사법기관인 법원으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두 사례에서는 더 광범위한 세속 권세들임을 알 수 있다.
4.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
4-1. 세상 사건으로 성도를 불의한 자 앞에서 송사하지 말라!
두 역사적 사례에 있어서,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한 해석이 토론의 중심에 있었
다. 교수회의 논문은 “바울 사도는 이 본문에서 신자끼리는 사랑으로 모든 문
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해서 일반 법관들의 판결을
바랄 수 없다”라고 바르게 천명한다. 그리고는 화란 주석가 흐로쉐이드와 칼
빈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모든 법적 송사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소송의
남용(만)을 금한다는 식으로 논조를 바꾼다. 또 “교회가 위임받은 사항이 아
닌 사법권의 행사는 국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라고 함으로써 당시에 제기된
이사회의 송사 사건 자체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
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한 요지는 무엇인가? 성도의 소송 개입 여부나
사법권의 인정 여부인가? 그렇지 않다. 이사회의 송사 사건은 바울이 세상의
권세 일반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과는 일차적으로 관계가
없다. 물론 우리는 세속법정 자체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자나 평화주의자가 아
니다. 바울도 세상의 권위와 법정을 인정하여서, 스스로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
지 않았던가. 본문의 요지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소송’이다. 바울은
성도들간에 있는 문제는 성도들끼리 해결해야지, 불의한 자 앞에 문제를 들고
가지 말라고 교훈한다(6:1). 왜 교수회는 이런 주장을 한 박윤선목사의 [고린
도전후서] 주석(1962년)이나 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파수군](1957년)에 여러
차례 발표한 글들은 인용하지 않고 있는가? 성도들이 ‘세상 사건’(고전 6:4)
을 가지고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형제를 송사하며, 교회 안에 있는 다
른 형제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 문제이다. 이렇게 송사
하는 이들은 ‘나’라는 개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으면서, 세상을 향하여서는
‘우리’, 곧 교회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아주 격한 어조로 그런 세속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차라리 불의를 당
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전 6:7)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4-2. 하물며 영적인 일이랴!
그런데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측면이 두 가지가 더 있다. 먼저, 우리 고려파
역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성도들이 법적인 ‘자연인’으로서 법정에서 소송하
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성도들이지만 ‘교회’가 소송을 당하거나 제기한 것
이었다. 또는 법적인 지위를 가진 자가 자신이 대표하는 기관을 대표하여 소송
을 내었다. 둘째로, 재산권 문제였고, 이사장의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였으나,
이것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사안들’이 아니었다는 점
이다. 즉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하는 사안과 성격상 다른 문제를 가지고 세속
법정 앞에 섰던 것이다.
우리 고려파의 문제는 세속적 사안들이 아니라, 교회적 사안이었고, 세상 사건
이 아니라 영적 사건이었다. 바울은 교회가 장차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터인데
, 이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일을 가지고서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세속법
정에 가는 것을 강하게 질책한다. 그는 성도들이 가진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특
권과 안목에 호소하면서, 성도들이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 세상 법관 앞에서 심
판받으려 하는 영적인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하물며 나중에 우리의 심판을 받
을 불의한 자들 앞에 가서 영적인 사안들을 가지고서 재판을 받는 것은 엄청난
자가 당착이요, 영적인 수치라는 것이다.
교회당은 재산권 행사의 목적물이기 이전에, 예배를 위한 영적인 측면을 가지
고 있다. 교회당 명도 소송은 어떤 주택이나 건물을 가지고 성도가 불신자나
성도들끼리 다투면서 법정에 호소하는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럴 경우
라도 바울은 불의를 당하고 속을 것을 권한다.
하물며 교회가 교회당의 명도와관련하여 세상 법정에 송사를 제기하는 것은 교
회당을 재산권 행사의 목적물로전락시키는 행위이므로 영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한심한 짓이라는 웅변적인 해석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짓은 법은 의
지하되, 그 법을 주신 법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경건한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성도는 종말론적 심판의 관점에서 현재의 사안들을 평가할 수 있
는 영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4-3. 총회 내규냐 교육법이냐?
이사회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검찰에 고발하고 법원에 가는 이런 수치스러운
처신의 배후에는, 더 큰 문제가 깔려 있다. 이제는 이 문제가 교회적 사안인가
, 아니면 교육의 제문제에 관한 세상적 사안인지를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 총회나 송목사는 동일하게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총
회는 교회법이라는 내규를 내세웠고, 송목사는 세상법을 내세웠다. 그런데 총
회는 이사회를 통하여 세상법에 호소하였고, 세상법을 내세웠던 송목사는 세상
법의 정죄를 받았다. 만약 총회가 교회법을 내세웠다면, 교회 안에서 모든 문
제를 해결하는 것이 正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법정에 호소한 것은 자
가 당착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고려파 안에는 불의한 자의 판단을 능가
하는 종말론적 지혜와 판단력을 가진 형제들이 없었다는 말인가. 이사회나 송
목사나 다 같이 교수회의 지적처럼, “바울은 복수심과 적의와 악감정을 가지
고, 형제를 해칠 목적으로 (소송)하니, 이것이 잘못이라”는 질책을 받아야 마
땅하다. 영적 안목을 찾기 힘들고, 종말론적 대망에서 나오는 판단력을 발휘한
흔적도 없다. 이것은 영적 빈곤이고 영적 수치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엄청난 범죄행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은 자기들 사이에 있는
영적인 문제를 검찰권이나 사법권이 개입하고 심판하도록 내어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그런데도 고려파의 두 사건은 저급한 세상적 사
안이 아니라 영적 사안을 세상의 심판에 내어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즉 교육법과 교육부의 존재
이다. 고려신학대학이 설립되고, 고려신학교가 폐교됨과 동시에, 신대원을 포
함한 대학은 교육부의 지시와 감독을 받아야만 하였다. 세상 감독권보다 먼저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는 우리가 ‘私租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권세를 굴복해야 할 의무
를 가졌으나, 그 권세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편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마치
그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이 不在中이라고 착각이나 한 듯이 말이다. 1967년 5
월 17일에 ‘학교법인 고려학원’이 인가를 취득한 이후 지금까지, 당시의 문
교부와 지금의 교육부는 형제들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심판하는 권세의 위치를
확고하게 점하고 있다. 총회가 구성한 이사회와 이사회가 관장하는 학원은 지
속적으로 교육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으며, 교육부로부터 법적 자격과 권리와
임무를 부여받는다. 세속법정에서 성도간에 영적인 사안으로 송사하던 두 사건
들 이후, 이제는 고려파 성도들간에 발생하는 큰 이견들을 판단하는 주요한 귄
세가 교육부이다. 이 권세를 중심으로, 검찰에 고소도 하고, 이사장 직무집행
정지가처분도 신청한다.
4-4. 이사회는 세상 사건을 다루느냐 아니면 영적 사건을 다루느냐?
이제 이사회가 관장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영적이며, 어떤 점에서 세상적인지
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보의 보도처럼, 이사
회의 회의와 운영의 난맥상은 굳이 법정에 가는 극한 상황을 상정할 필요도 없
이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는 바울의 꾸중을 상기시킨다. 우리 이사회는 영적인 일을 관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적인 일을 관장하고 있는가? 이것은 이미 제소된 가처분건
을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사회를
구성한 총회와 총회에 총대를 파송한 교회가 이사회를 통하여 하고 있는 일의
성격을 규명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실은 1967년을 전후하여서 학교법인 설립과
대학 설립을 위한 범교단적인 토론이나 의견 수렴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책
적인 토론을 통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기초보다는 교회 치리기관을 통한 행정
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을 통하여 법인과 대학과 의과대학은 인가를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반고소파’가 고려신학대학이 아니라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
언한 사실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즉 성경에 입각하
여 교회와 인류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할 개혁주의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을 운영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영적이며, 어떤 점에서 세상적인 일이
라는 데에 대한 신학적 토론과 이를 통한 공감대가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별도의 논의를 요하기에, 여기서는 이만 약한다.
5. 글을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한 교역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이를 가지고 우
리의 정체성을 삼으면서, 고려파의 우월성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다른 교파들에게 그들이 신사참배 문제를 청산할 것을 촉구하고 원한다
면, 우리가 먼저 이 소송건에 대해서 한국교회 앞에서 자복하고 통회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지만, 먼저 이 사
안 자체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기 위하여, 소송과 연관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안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한 신앙고백과 성도
의 교제 안에서 성령님의 지혜를 의지하면서 성도간에 격조 높은 토론 문화가
정착되기를 제안하며 실현되기를 염원한다. 엄청난 노력과 상호 이해의 자세를
가지고서, 이 사안에서도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죽는 개혁주의 전통을 정착
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간의 세속법정에서의 송사에 관한 우리 총회의 이전 결정과 신학교
수회의 논문을 재론하여야 한다. 아니,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우리는 과거
에 실수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속히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
하고, 한국교회 앞에 이를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불화하여서 세속적
인 권세의 심판을 호소하고 의지하려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태도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사안뿐 아니라, 영적인 사안을 가지고 세속법정에 소송하
는 행위를 단호하게 금하며, 필요하다면 교회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1973년의 ‘이사장직권정지가처분신청’을 연상시키는 세속 법정에의 청구가 2
000년 후반기에 개인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필자는 e-메일을 통하여 해 신청인
에게 여러 차례 취하를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분은 필자의 요청을
정중하게 수긍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응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실로 금
할 수가 없다.
필자는 본의 아니게 지난 1995년에 ‘세속적인 사안’으로 성도와 법정 소송을
한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종중을 대표하는 종손과 송사를 하였는데, 나중에
신자요 목사인 그 종손이 종중 재산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재산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긴 재판을 개의치 않고, 나는 여섯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분과 법정
화해를 하였다. 그분이 토지의 2/3를, 우리가 1/3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
금도 그것이 종중의 재산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1994년도에 교통사고로
소천하신 선친께서 그 때 이미 30년 전에 그 종중으로부터 구입한 토지였는데,
不信 동민들은 이런 우리를 향하여 부모의 피땀이 어려있는 땅을 함부로 허비
하는 작자들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양보하고 손해를 즐겨 감
내하셨던 믿음의 맹장이신 선친의 믿음을 지켰다. 만약 우리가 법대로 승소를
고집하였다면, 재산은 지켰겠지만, 동민들은 우리의 믿음을 비난하면서, 선친
께서 섬겼던 삼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짓밟았을 것이다. 우리는 차라리 속
는 것이 낫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랐고, 이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전말을 전해들은 어떤 목사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1970년대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총회의 결정을 재론해야 할 것이고, 필자같은 소장 신학자가 앞
장 설 것을 권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얼마 전에 자신의 교인들을 여러 건수의
세속 법정에의 송사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만이 성도간의 법정 소송에 대한
명확한 답을 깨닫게 하며,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
실 한 분 재판장만이 계실 뿐이다. 그 분으로 인하여 종말론적 특권을 소유하
였으니, 하챦은 세상 사건으로 형제를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혜로우며, 지혜로운 형제들이 우리 중에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 송사문제에 있어
서도 이방인과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명분에 빠져서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정치판을 향하여 반성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
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끝>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