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와 현실적 무신론"(기독교보, 2013년 8월) 투고

이슈 따라잡기 / 고신교회와 현실적 무신론
2013.08.28 15:29 입력

▲유해무 교수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고신언론사 사장 선출 과정에서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 목사와 장로에게 돈봉투를 돌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드러나고 숨긴 수많은 궤계가 담겨있는 고범죄이다.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숨겨져 있는 일을 꾀할 때 하나님은 죽으셨는가!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이런 분명한 죄를 죄라 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아!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성령훼방죄가 멀지 않도다!

 

l.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

 

어찌 장로가 목사와 장로에게 돈을 건넨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목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써 교인을 낳는 막중한 일을 맡았고(고전 4:15), 모든 교인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양육해야 한다(엡 4:13). 목사가 교인을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기에 교회 안에 있는 지위를 얻기 위하여 돈을 공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시몬이 돈을 주고 하나님의 선물을 살려고 하는 일과 비견된다(행 8:20).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는 목사들이 더욱 경성하여 고신교회를 파수할 때이다.

 

필자는 이미 10여 년 전에 구체적 제보를 받은 적이 있다. 목사 부총회장 후보가 각각 10만 원, 5만 원, 3만 원씩 총회 총대에게 뿌리고 있으니, 경종을 울리는 글을 본지에 기고하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설마’ 하였다. 돌아보니 얼마나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는지 후회가 막심하다. 목사가 복음으로 낳은 성도들에게 이런 악한 본을 보여도 되는가? 어찌하여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왔는가!

 

 

2. 세상만도 못한 교회

 

사회는 각종 공직자의 선거에 관하여 공직자선거법으로 지나치리만큼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금품 수수는 액수의 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엄격하게 다룬다. 공직자선거사범의 경우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고발하거나 검찰이 직접 수사하여 기소하지만, 교회의 직분자 선거의 경우에는 선거를 주관한 당회가 직접 조사하고 권징까지 한다.

 

이번의 경우 돈봉투 공여를 받은 투표권자인 이사들은 후보자의 자격에 대한 문제를 투표 전에 제기하고, 이사회는 선거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총회 선거 조례 제 15조 참조). 정황이 분명하다면 이사회는 투개표의 합법만을 애써 고수하지 말고, 후보 등록부터 당선 결정까지의 정당성 여부를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사회가 불신을 당할 수도 있다.

 

왜 그런가? 사회법은 모법과 파생법 그리고 시행 세칙 등으로 가능한 경우를 상세하게 예상하고 규정한다. 이에 비하여 교회법은 허술할 정도로 단순하다. 세상은 증거를 기초로 삼아 모든 법 절차를 시행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믿음을 따라 양심에 먼저 호소한다.

 

그러나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재판할 수 없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산상보훈은 천국 백성의 헌법이다. 교회는 범죄 이전에 죄를 꾀하는 정욕조차 경고하며 자복하고 회개할 것을 가르치는 천국의 관문이다. 그래서 교회법은 사회법보다 단순하다.

 

이제 교회가 신앙과 양심을 따라 살기보다는 증거를 더 중시하면서 죄를 은밀하게 꾀하고 자기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면서 교회법을 확장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만들고 온갖 조례를 만든다. 교회가 이 세대를 본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허술할 정도로 단순한 교회법을 각자의 정욕을 따라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법을 따지는, 구리와 꽹과리 소리는 난무하되 사랑은 사라지고 있다. 교회가 세상만도 못한 모습이다.

 

3. 교회법은 단순해야 한다

 

최근 새 권징조례의 해석 문제로 곳곳에서 법 적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 새 권징조례가 사회법을 닮아 3배나 확장시켜 세세한 규정까지 넣었는데도 질서 유지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는가? 그렇다면 새 권징조례의 재개정을 고려해야 한다.

 

교회법은 단순해야 한다. 복잡한 교회법은 유대교와 중세교회가 세상에서 배운 것이다. 성경적 교회법의 정신은 정죄와 시벌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화평과 사과와 용서이다(마 5:25). 이것을 세상은 가르치지 않는다.

 

천국 백성은 이미 보혈로 사죄 받은 자로서 법조문을 따지기 전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야 은혜로 사는 자의 복된 모습을 증거 할 수 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위협하지도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신”(벧전 2:23)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4. 왜 노회는 목사의 범죄를 권징하지 않는가?

 

그런데 고신교회 안에는 노회가 목사의 분명한 범죄가 있음에도 권징을 행하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담임목사가 있어도 시찰이 시찰도 하지 않고 노회는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사가 7계명을 범하여도 사임만 하면 권징하지 않는 희한한 일이 현재 고신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대로부터 교회는 간음을 살인, 그리고 배교와 더불어 아주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런데 노회는 새 권징조례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서 왈가왈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해당 교회는 영적으로 피폐하여지고 교인들은 하나둘씩 교회를 떠난다. 언젠가부터, 담임목사가 문제가 있어 사임하기 전에 오래 버틸수록 교회로부터 재정적 보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항간에 노회가 목사 ‘노조’라 비아냥대는 소리가 돌고 있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노회가 목사의 범죄를 권징조례에 앞서 성경 말씀을 따라 엄하게 시벌하지 않는 한, 장로나 교인들에게 범죄를 경고하거나 권징할 수 없다. 직분자들, 특히 목사들은 법조문에 집착하기 전에 교회와 목사의 이런 행태를 불신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는 교인들, 결국 불신자가 되고 말 것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토하신 경고를 특히 목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5. 세상 관행과 현실적 무신론

 

관행이 문제이다. 성도는 불신자의 관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전에 행하였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를 죽여야 한다(골 3:5). 그런데 이런 세상 관행이 교회 속에 들어와 있다. 어두움의 자녀들이 은밀히 행하는, 그래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엡 5:12)을 성도가 고의로 획책하고 행하면서 “악한 동무”(고전 15:33)를 만드는 관행이 교회 안에서도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스러운 현실적 무신론이다(딛 1:16). 이렇게 교회가 관행으로 이 세상을 닮아간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내치실 것이다(계 3:16).

 

예수님께서 이런 관행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더 이상 “세상 풍조”(엡 2:2)의 종이 아니다. 만약 성도가 천국 헌법이 아니라 세상 풍조와 관행을 다시 따른다면, 이전의 구토나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는 꼴이니 의의 도를 애초부터 알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벧후 2:21-22). 그러면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 진짜 무신론자가 된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이전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된 것을 보고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면, 그 삶의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다(마 12:43-45). 예수님께서 우리를 씻고 소제하여 주셨으니 우리 속사람을 예수님으로 꽉 채워야 한다. ‘비워 두면’ 옛사람의 관행에 종노릇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할 것이다.

 

6.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노회와 총회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야 한다. 노회나 총회에서 돈봉투가 사라져야 한다. 공직자 선거법도 식사 대접과 여비 지급의 관행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금하고 있는데, 어찌 세상을 갱신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이런 관행을 태연하게 행하고 있는가! 목사와 장로가 “더러운 이를 탐한다면”(딤전 3:8; 신 16:19, 뇌물!), 어찌 교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장로교의 발생과 특징을 주목하자. 총회는 폐회하면 파회한다(교회정치 149조). 총회장의 권한도 동시에 파한다. 그러면 총회장은 권세가 될 수 없고 돈봉투도 없을 것이고, 총회의 기관에도 선거운동이 없을 것이다. 왜 장로교 선배들이 이 조항을 넣었겠는가? 부당한 교권의 형성이나 횡포를 막기 위한 지혜로운 조치이다.

 

그런데도 총회장이 총회를 대표한다는 것(정치 148조)은 내적 모순을 지닌다. 장로회 정치는 감독정치가 아니다! 합신은 이를 지키고 있다. 이점이 합신과의 합동 논의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교권이 없다. 있다면 ‘섬기도록’ 주신 권리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섬기는 자로 오셨다(눅 22:27). 바울 선생은 사도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권리를 자랑한다(고전 9:12). 그러나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마 20:25).

 

중세교회가 이런 주관과 권세 부림을 교회 안에 끌고 왔을 때, 개혁자들은 이것을 다 훼파하였다. 게다가 웨스트민스터수도원에 모였던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법을 최소화하고 교권의 형성과 집중을 막기 위하여 총회를 상설회의가 아닌 임시회의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이 선배들의 투쟁을 묵과하면서 중세의 길로 도로 돌아가고 있다.

 

치리회인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교리와 예배이다. 교리와 예배로 교인을 낳고 양육하도록 직분과 행정(교회정치)이 필요하고, 권징조례는 제일 마지막에 온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총회의 직무에 교리와 예배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하여 노회와 총회를 행정기구로만 보거나 총대의 임무를 정치와 행정으로만 여기는 오해가 생겨난다. 치리회는 교회가 아니다. 치리회가 말씀과 성례와 권징으로 교인과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도록 위임받은 권한은 주관하는 권세가 아니라 ‘섬기는 권리’이다.

 

7. 현실적 무신론을 훼파하라!

 

이제 우리는 목사가 7계명을 범해도 놀라지 않고 교권을 얻으려고 돈봉투를 돌려도 마음을 찢지 않는다. 노회와 총회 그리고 곳곳에 이른바 ‘물타기’ 현상이 즐비하다. 성경말씀을 따라 ‘예, 아니오’를 말하지 않고 상황을 따라 상대방만 비판하고 자신은 쏙 빠진다. 범죄한 사실 자체는 난외에 부치고, 부대 상황에만 집중하거나 문제 제기를 발설로 폄하하거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권징조례의 법조문에만 집착한다.

 

우리 신조는 권징을 교회의 3번째 표지라 부른다. 교회는 구체적인 범죄를 ‘동무’의 집단 이해를 따라 해석하거나 주장하지 말고, 죄에는 시벌하고 해벌을 기다리면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관행의 모습으로 우리 중에 둥지를 튼 현실적 무신론이라는 우상숭배를 성령님의 능력으로 태우고 훼파하여야 한다.

 

고신교회는 세상의 풍조와 한국교회의 관행을 따르되 ‘조금’ 선명하게 살도록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분열의 시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신교회의 선배들이 회개를 촉구하였던 기존 교회에 편입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고신교회의 노회와 총회가 본연의 임무를 확인하고 몰두하여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이 마당에 온 교회와 교인이 합심하여 진리의 깃발을 들고 한국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정화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 유해무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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