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파가 여전히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 "고려파의 바벨론 포로" 투고
2003.04.23 22:51 Edit
고려파가 여전히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유해무
2. "고려파의 바벨론 포로"
2003년 4월 11일(금)에 첫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이 이사들의 파견을 거부하겠다는 움직임은 아무리 동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여도, 로마서 13장과는 배치될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느 압력 단체처럼 거부 서명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그런데 첫 이사회는 "기도와 성경 봉독" 없이 시작되었다. 어찌 이런 일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가. 통곡하며 가슴을 쳐야 할 일이 우리 앞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의도하는 "고신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이 상황을 지적한다. 지금 모든 관심은 복음병원에 쏠려있다. 기껏해야 정치계파간의 알력이 아니라, 매일 부도의 위기를 넘기고 있는 복음병원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임시이사회가 파견되었다고들 생각할 터이다. 그런데 왜 고려파는 임시이사회의 파견이 지닌 의미를 신앙의 안목에서 영적으로 파악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신학교를 관장하는 이사회가 법적으로 신앙과는 관계가 없는 권세라는 사실의 심각성을 왜 통탄하지 않는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겠는가. 우리의 교회는 당분간 신학교육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이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신대원을 지원하는 교회의 헌금은 "기부금"일 뿐이다. 신학교육을 관장하는 회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이런 일을 자초하고도 고려파의 후예라고 나서겠는가.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고려파는 없어지고 말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는 애가의 상황을 재연하는 것이 아닌가.
더러는 우리의 상황을 요나의 형편에 비교하기도 한다.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선장의 질책을 받고 있는 자, 배 밑창에 내려가서 풍랑 가운데서도 잠을 청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이것이 말하자면 불신자의 책망과 관장을 받아야 하는 신자인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의 행적은 비록 직분자이긴 하지만 그의 일개인의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요나가 배에 오르기 전에 엄청난 범죄를 자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향하여서 여호와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실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한 형편은 요나의 범죄, 그리고 그가 당한 낭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요나가 아니라, 유다의 바벨론 포로에 해당되는 사건 가운데 처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미리 언약의 법인 말씀을 주셨고 또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그 법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런 데에도 언약의 백성이 범죄하자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포로를 갈 것이라고 미리 예언까지 하셨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의 입으로 유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셨다. 실로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려파를 향하여 성경을 주셨고, 설교자를 주셨다. 또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갖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허락하셨다.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써 복음병원을 하나님처럼 숭배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고려파의 마음은 말씀에서 많이 떠났다. 마치 유다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애굽 및 앗수르와 맹약을 맺고서,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듯이, 고려파도 그렇게 중히 여기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따라 헐떡거렸다. "기도와 말씀"으로 개회는 하고 나서 계파를 따라서 싸움을 하고 분열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였으니, 하나님의 법과는 상관이 없는 세속 권세의 지배 아래에 놓여도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 때문에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기회를 내어 차버렸다. 경고에 따르는 징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음병원만을 되돌려 받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다. 고려파가 살아 있다면, 옛적 같은 회개 정신이 건재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충에 대해서 더 큰 국난이 아니라 "겨우" 복음병원 정도로 징계를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회개할 것이다. 비록 복음병원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회개하고,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여서, 옛적과 같게 되기를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애가 5:21). 병원으로 인한 관선이사 파견이 아니라, 고려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범죄가 아닌가 한다.
이 충격이 크다고들 하지만, 충격의 여파를 직접 당하지 않으니까, 느끼지도 못할 뿐이다. 대개 복음병원의 향방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병원"이라는 관점에서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은 충격에 분노하지만, 일단은 자기들의 일상적인 삶에는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나타난 현상은 무관심 쪽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요나의 형편에 처해 있든, 바벨론 포로에 있든, 별반 개의치 않는 분위기라는 말이다.
가장 큰 요인은, 복음병원을 재산적으로만 보려는 태도 때문이다. 재산적 가치를 지닌 복음병원이 목적 자체로 많은 이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복음병원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파가 복음병원을 "수익기관"으로 규정한 것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현재의 위기를 질병에 비유하면, 신학교가 지니던 질병은 그나마 쉽게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초기 상태였다. 그러나 고신대학교가 병균의 활동을 왕성하게 촉진시키는 숙주 역할을 제공하였고, 복음병원은 치유할 수 있던 작은 병을 불치병으로 만드는 더 확실한 숙주가 되었다. 한편으로 병원이 육의 병을 치유하는 기관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편으로는 교회의 영적 부패와 환부를 악화시키는 종양과도 같다.
복음병원은 애초부터 "구호병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고려파의 신사참배 거부정신에 걸맞게 구호와 복음 전도를 위한 기관이었고 설립자였던 장기려박사는 비영리기관이던 병원을 통하여 빈민 구호에 진력하였다. 그런데 1956년 4월 당시의 총노회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복음병원을 돕기 위하여 이사 9명을 파송함으로써 법적으로 고려파의 기관이 되었다. 1961년 8월에는 비영리 의료기관으로서 복음병원의 개설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학교법인의 설립과 더불어 1971년에는 수익기관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현재의 고려파에다 불치병을 가져온 것이 병원이라면, 수익기관으로 병원의 성격을 변화시킨 일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그 순간부터 병원 관계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흑자를 내어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 만약 그가 이익을 내고, 그 이익금을 학교법인과 교회로 전출시키면 "교단정신"이 철저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재정적인 여유 자금이 없는 상황에서, 의과대학이 인가를 받게 되었으니 실험실습 기자재를 들여와야 하고 실습 병실을 늘리기 위해서 병원도 증축해야 하였다. 그래서 외자도 도입하고, 그래도 부족한 자금은 은행으로부터 빌렸다. 이 융자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결국은 사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고려파는 병원에 투자하지도 않으면서, 계란도 내고 살도 때때로 잘라 상에 올려라고, 병원에 요청한 셈이 되었다. 자금이 없어서 사채를 동원한 이들은 "수익기관"이었던 복음병원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사랑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항변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다. 수익기관으로 결정한 고려파가 그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IMF 직후 당시 경제팀에게 사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경영의 실패를 법정에 세워도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파국을 맞으면 그만이지 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정치논리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런 데에도 우리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총회가 표결로 부결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고신대학과 병원 당국자는 불법적으로 의과대학 인가를 신청하고 교명까지 바꾸었는가. 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이렇게 하여서, 복음병원과 고신대학교는 고려파의 모든 관심의 중심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모태였던 고려신학교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모두가 이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구호 아래 동참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점에서 복음병원은 고려파 안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결정한 것이 옳았는지, 그리고 누가 공회의 그런 결정을 유도하고 주도하였는지, 의과대학을 꼭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
관심의 중심인 복음병원과 함께 고려신학교도 이제 교육부의 신탁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니, 학교법인의 이름으로 이 기관들을 운영하고 경영하던 고려파가 부분적으로 세속 권력의 신탁 통치 하에 있게 되었다. 교회 이름으로 이제는 이 기관들에 대한 권한을 잠정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관들은 교육법적으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총회가 구성한 고려학원의 소유이지만, 실제적인 권한 행사는 이를 승인하고 인가한 교육부가 당분간 되돌려 받은 것이다. 이제 이 기관들은 직접 교육부가 파견한 이사들과 접촉해야 하며, 사실은 교육부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고려파의 정신과 이념을 따라 신학교육을 관장하고 감독하는 이사회가 아니라, 세속 고등교육기관이 따라야 하는 규정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중립적인 임시이사회가 신학과 신학교육에 관한 법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태가 고려파의 바벨론 포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재의 상황은,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도 세금을 내는 병원을 경영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실수의 보응이다. 교회 이름으로 병원과 대학교를 경영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공개적으로 논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신학교를 모태로 하여 대학교와 대학병원을 설립하고 확장하면서도 이런 일이 교회의 본질에 맞는지, 또는 교회에 어떤 피해를 가져다 올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았다. 그런 결과가 무엇인가? 이런 기관들을 경영하다가 부실 경영의 불명예와 내적 분열의 수치를 극복하지 못한 "고려파라는 교회"가, 적어도 이 일에 관한 한, 신탁 통치 하에 있으며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문자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 하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인들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충격적인 수욕의 의미를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관을 세우고 확장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소수의 지도자들만이 일을 주관하고 확대하고 악화시켰기 때문에, 대다수의 교인들은 문제를 의식하지도 못하며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다만 치리회로 있는 총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공식적이고 법적으로 벌여놓고 나서도, 책임을 지려는 총회 총대는 한 사람도 없다. 소수가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다수는 알지 못해서 그냥 묵과하였지만, 더러는 알면서도 침묵하였다. 그러나 일을 벌여놓은 이들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책임감을 깊이 인식하고,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현재와 앞으로도 고려파이기를 원한다면, 먼저 고려파 수욕의 50년 역사를 살펴가면서, 근원적인 잘못과 범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웃이나 국가에 대하여 범죄하기 전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특히 모든 구약 성도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우리를 징계하시는 분는 국가이기 전에 바로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범죄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를 의지하고서는 진정한 회개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야 하며, "우리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라"(단 9:19)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회개가 선행되지 않았으므로, 서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관선이사 거부 서명, 또는 다양한 헌금의 방식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궁리를 앞세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회개가 앞서지 않으면, 고려파는 이 영적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고려파는 한국교회사의 한 대목을 채우던 과거 역사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즉 이제 고려파는 사라졌다는 말이 회자하게 될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이다.
유해무
2. "고려파의 바벨론 포로"
2003년 4월 11일(금)에 첫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이 이사들의 파견을 거부하겠다는 움직임은 아무리 동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여도, 로마서 13장과는 배치될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느 압력 단체처럼 거부 서명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그런데 첫 이사회는 "기도와 성경 봉독" 없이 시작되었다. 어찌 이런 일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가. 통곡하며 가슴을 쳐야 할 일이 우리 앞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의도하는 "고신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이 상황을 지적한다. 지금 모든 관심은 복음병원에 쏠려있다. 기껏해야 정치계파간의 알력이 아니라, 매일 부도의 위기를 넘기고 있는 복음병원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임시이사회가 파견되었다고들 생각할 터이다. 그런데 왜 고려파는 임시이사회의 파견이 지닌 의미를 신앙의 안목에서 영적으로 파악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신학교를 관장하는 이사회가 법적으로 신앙과는 관계가 없는 권세라는 사실의 심각성을 왜 통탄하지 않는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겠는가. 우리의 교회는 당분간 신학교육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이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신대원을 지원하는 교회의 헌금은 "기부금"일 뿐이다. 신학교육을 관장하는 회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이런 일을 자초하고도 고려파의 후예라고 나서겠는가.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고려파는 없어지고 말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는 애가의 상황을 재연하는 것이 아닌가.
더러는 우리의 상황을 요나의 형편에 비교하기도 한다.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선장의 질책을 받고 있는 자, 배 밑창에 내려가서 풍랑 가운데서도 잠을 청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이것이 말하자면 불신자의 책망과 관장을 받아야 하는 신자인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의 행적은 비록 직분자이긴 하지만 그의 일개인의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요나가 배에 오르기 전에 엄청난 범죄를 자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향하여서 여호와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실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한 형편은 요나의 범죄, 그리고 그가 당한 낭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요나가 아니라, 유다의 바벨론 포로에 해당되는 사건 가운데 처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미리 언약의 법인 말씀을 주셨고 또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그 법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런 데에도 언약의 백성이 범죄하자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포로를 갈 것이라고 미리 예언까지 하셨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의 입으로 유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셨다. 실로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려파를 향하여 성경을 주셨고, 설교자를 주셨다. 또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갖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허락하셨다.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써 복음병원을 하나님처럼 숭배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고려파의 마음은 말씀에서 많이 떠났다. 마치 유다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애굽 및 앗수르와 맹약을 맺고서,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듯이, 고려파도 그렇게 중히 여기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따라 헐떡거렸다. "기도와 말씀"으로 개회는 하고 나서 계파를 따라서 싸움을 하고 분열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였으니, 하나님의 법과는 상관이 없는 세속 권세의 지배 아래에 놓여도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 때문에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기회를 내어 차버렸다. 경고에 따르는 징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음병원만을 되돌려 받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다. 고려파가 살아 있다면, 옛적 같은 회개 정신이 건재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충에 대해서 더 큰 국난이 아니라 "겨우" 복음병원 정도로 징계를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회개할 것이다. 비록 복음병원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회개하고,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여서, 옛적과 같게 되기를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애가 5:21). 병원으로 인한 관선이사 파견이 아니라, 고려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범죄가 아닌가 한다.
이 충격이 크다고들 하지만, 충격의 여파를 직접 당하지 않으니까, 느끼지도 못할 뿐이다. 대개 복음병원의 향방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병원"이라는 관점에서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은 충격에 분노하지만, 일단은 자기들의 일상적인 삶에는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나타난 현상은 무관심 쪽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요나의 형편에 처해 있든, 바벨론 포로에 있든, 별반 개의치 않는 분위기라는 말이다.
가장 큰 요인은, 복음병원을 재산적으로만 보려는 태도 때문이다. 재산적 가치를 지닌 복음병원이 목적 자체로 많은 이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복음병원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파가 복음병원을 "수익기관"으로 규정한 것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현재의 위기를 질병에 비유하면, 신학교가 지니던 질병은 그나마 쉽게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초기 상태였다. 그러나 고신대학교가 병균의 활동을 왕성하게 촉진시키는 숙주 역할을 제공하였고, 복음병원은 치유할 수 있던 작은 병을 불치병으로 만드는 더 확실한 숙주가 되었다. 한편으로 병원이 육의 병을 치유하는 기관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편으로는 교회의 영적 부패와 환부를 악화시키는 종양과도 같다.
복음병원은 애초부터 "구호병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고려파의 신사참배 거부정신에 걸맞게 구호와 복음 전도를 위한 기관이었고 설립자였던 장기려박사는 비영리기관이던 병원을 통하여 빈민 구호에 진력하였다. 그런데 1956년 4월 당시의 총노회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복음병원을 돕기 위하여 이사 9명을 파송함으로써 법적으로 고려파의 기관이 되었다. 1961년 8월에는 비영리 의료기관으로서 복음병원의 개설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학교법인의 설립과 더불어 1971년에는 수익기관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현재의 고려파에다 불치병을 가져온 것이 병원이라면, 수익기관으로 병원의 성격을 변화시킨 일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그 순간부터 병원 관계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흑자를 내어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 만약 그가 이익을 내고, 그 이익금을 학교법인과 교회로 전출시키면 "교단정신"이 철저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재정적인 여유 자금이 없는 상황에서, 의과대학이 인가를 받게 되었으니 실험실습 기자재를 들여와야 하고 실습 병실을 늘리기 위해서 병원도 증축해야 하였다. 그래서 외자도 도입하고, 그래도 부족한 자금은 은행으로부터 빌렸다. 이 융자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결국은 사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고려파는 병원에 투자하지도 않으면서, 계란도 내고 살도 때때로 잘라 상에 올려라고, 병원에 요청한 셈이 되었다. 자금이 없어서 사채를 동원한 이들은 "수익기관"이었던 복음병원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사랑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항변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다. 수익기관으로 결정한 고려파가 그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IMF 직후 당시 경제팀에게 사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경영의 실패를 법정에 세워도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파국을 맞으면 그만이지 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정치논리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런 데에도 우리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총회가 표결로 부결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고신대학과 병원 당국자는 불법적으로 의과대학 인가를 신청하고 교명까지 바꾸었는가. 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이렇게 하여서, 복음병원과 고신대학교는 고려파의 모든 관심의 중심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모태였던 고려신학교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모두가 이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구호 아래 동참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점에서 복음병원은 고려파 안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결정한 것이 옳았는지, 그리고 누가 공회의 그런 결정을 유도하고 주도하였는지, 의과대학을 꼭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
관심의 중심인 복음병원과 함께 고려신학교도 이제 교육부의 신탁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니, 학교법인의 이름으로 이 기관들을 운영하고 경영하던 고려파가 부분적으로 세속 권력의 신탁 통치 하에 있게 되었다. 교회 이름으로 이제는 이 기관들에 대한 권한을 잠정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관들은 교육법적으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총회가 구성한 고려학원의 소유이지만, 실제적인 권한 행사는 이를 승인하고 인가한 교육부가 당분간 되돌려 받은 것이다. 이제 이 기관들은 직접 교육부가 파견한 이사들과 접촉해야 하며, 사실은 교육부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고려파의 정신과 이념을 따라 신학교육을 관장하고 감독하는 이사회가 아니라, 세속 고등교육기관이 따라야 하는 규정과 원칙만을 고수하는 중립적인 임시이사회가 신학과 신학교육에 관한 법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태가 고려파의 바벨론 포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재의 상황은,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도 세금을 내는 병원을 경영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실수의 보응이다. 교회 이름으로 병원과 대학교를 경영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공개적으로 논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신학교를 모태로 하여 대학교와 대학병원을 설립하고 확장하면서도 이런 일이 교회의 본질에 맞는지, 또는 교회에 어떤 피해를 가져다 올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았다. 그런 결과가 무엇인가? 이런 기관들을 경영하다가 부실 경영의 불명예와 내적 분열의 수치를 극복하지 못한 "고려파라는 교회"가, 적어도 이 일에 관한 한, 신탁 통치 하에 있으며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문자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 하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인들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충격적인 수욕의 의미를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관을 세우고 확장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소수의 지도자들만이 일을 주관하고 확대하고 악화시켰기 때문에, 대다수의 교인들은 문제를 의식하지도 못하며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다만 치리회로 있는 총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공식적이고 법적으로 벌여놓고 나서도, 책임을 지려는 총회 총대는 한 사람도 없다. 소수가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다수는 알지 못해서 그냥 묵과하였지만, 더러는 알면서도 침묵하였다. 그러나 일을 벌여놓은 이들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책임감을 깊이 인식하고,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현재와 앞으로도 고려파이기를 원한다면, 먼저 고려파 수욕의 50년 역사를 살펴가면서, 근원적인 잘못과 범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웃이나 국가에 대하여 범죄하기 전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특히 모든 구약 성도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우리를 징계하시는 분는 국가이기 전에 바로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범죄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를 의지하고서는 진정한 회개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야 하며, "우리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라"(단 9:19)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회개가 선행되지 않았으므로, 서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관선이사 거부 서명, 또는 다양한 헌금의 방식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궁리를 앞세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회개가 앞서지 않으면, 고려파는 이 영적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고려파는 한국교회사의 한 대목을 채우던 과거 역사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즉 이제 고려파는 사라졌다는 말이 회자하게 될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