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순서는 후대인들에게 익숙한 신학과 교리의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한 주제를 한 문답에서 일회적으로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한 주제를 다른 주제들과 연관시켜 여러 곳에서 다룬다. 이 방식은 어떤 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깨닫게 하는 장점을 지닌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시기적으로 종교 개혁 시대의 후대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이전에 나온 교리서들을 참고하고, 심지어 루터파 교리서까지도 포용하는 면모를 지닌다. 많은 교리서들의 내용을 파악하고 잘 꿰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단지 기존의 어떤 교리서를 근간으로 삼아 몇 부분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참고하고 승화시켜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포괄성과 포용성이 본 교리서의 장점이다.
1부의 죄와 비참 부분(3-11)에서는 율법이 몽학 선생임을 지적하고, 2부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12-85)에서는 사도신경(23-58)과 성례(65-85)를 다루며, 3부의 성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감사 부분(86-129)에서는 율법, 곧 감사의 법으로서의 십계명(92-115)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주기도문(116-129)을 다룬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신분을 ‘비참-구원-감사’의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사도신경, 성례, 십계명, 주기도문을 용의주도하게 다루었다.
특히 성례 부분(65-85)은 세심한 구조적 배려를 지니고 있다. 65-68문답은 말씀과 성례의 관계를 다루는 서론적 부분이며, 69-74문답은 세례를, 75-82문답은 성찬을 다룬다. 그런데 두 성례는 각각 69와 75문답, 70과 76문답, 71과 77문답, 72와 78문답, 73과 79문답, 74와 81/82문답이 대칭을 이룬다. 80문답이 첨가되어 이 대칭을 깨고 있지만, 초판의 의도는 충분하게 돋보인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신학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보자.
1.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요리문답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을 주제로 삼지 않고, 인간을 소재로 삼아 삼위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이다.
율법(4)-복음(19)-순종의 구조는 멜란히톤의 『신학 개론』의 순서인데, 이것은 로마서로부터 나왔다. 죄와 비참은 율법으로부터 안다(3). 이 점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 선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 사랑’이다(4). 십자가에서 이중 사랑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표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이중 사랑으로 요약하여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은 ‘복음’으로 우리의 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이중 사랑의 법으로 서두에 언급되고, 십계명은 감사의 법으로 뒤에 온다. 루터파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율법 자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율법으로 대변되는 구약은 예수님과 교회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은 구약에서, 또한 구약은 신약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신약은 구약 안에 있고, 복음은 또한 율법으로 계시되었으며,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런 과정에서 삼위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인생이 자기를 알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셨지만, 예수께서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 주신다(4). 이제부터는 성신님께서 부패한 우리의 본성을 거듭나게 하셔야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8). 바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께 속한 것이 우리의 위로이다(1). 그러면서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인간을 규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32)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받은 인간이요(60), 성신님의 사람이다(7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행한 세 직분 덕에 이 세 직분을 십계명을 지킴으로 수행하여 예수님을 닮는 형상이 된다(31-32, 114).
인간의 신분이 요리문답을 구분하는 근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각 신분에 처한 인간을 창조하고, 구속하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이시니, 성경과 이를 요약한 요리문답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그분이심을 잘 보여 준다. 2. 그리스도의 구속과 우리의 믿음
2) 구속 부분은 속상론(贖償論)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복음으로부터 안다.
인간이 범한 불순종과 반역(10)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며, 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 우리나 어떤 피조물도 이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중보자는 참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죗값을 치르고, 참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고 의와 생명을 죄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12-17). 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부터 안다(19)고 답하면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모두 복음으로 묶은 것은 확실히 개혁파적이다.
성육신을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부터 도출하는 이 방식은 안셀무스가 확립한 전통이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와 설명을 합리주의로 보는 경우가 있다. 혹 그런 의문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부터” 안다는 답변은 이런 의문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준다. 3) 믿음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설하고, ‘교회 안의 나’로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덕을 받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데, 참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며, ‘성신’께서 일으키시는 굳은 신뢰이다(20-21). 이처럼 믿음의 항목에서도 삼위 하나님을 아주 멋지게 고백한다. 믿음은 동시에 복음의 약속을 믿음이며, 사도신경은 복음을 요약한다(22).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믿음 이해는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난 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최종적으로 고백하면서(60), 그 믿음을 성신님이 주신다는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65).
믿음을 질문하는 21문은 이신칭의를 향하고(59), 칭의를 질문하는 60문에 종교개혁의 기치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믿음(sola fide)”으로 의롭게 된다고 대답한다. 사도신경 해설의 앞과 뒤에 믿음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데,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의 진리를 사도신경 해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61답의 전반부는 인간의 소망 없는 모습을 고백하고,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인 이 선물을 오직 믿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고백하는 ‘나’는 종교개혁의 교회이며, 그 교회 속에서 개별 성도가 고백한다. ‘교회 속의 개별 성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경건주의나 개인주의에 빠지고 만다.
21문답이 묻고 답하는 ‘참된 믿음’은 사실상 동어 반복이다. 구약에서 진리와 믿음은 동의어이다. 그럼에도 믿음은 사도신경에 고백한 삼위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다. 진리로 ‘여김’은 진리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다. ‘확실한 지식’은 개연적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확실성을 말한다. ‘굳은 신뢰’ 역시 복음으로 마음에 일으켜진다. 참신앙은 말씀에 뿌리를 박은 확실한 지식이며 성신님께서 일으키시는 굳은 신뢰이다. 지식에 신뢰가, 신뢰에 지식이 담겨져 있다. 지식은 복음을 향하며, 복음을 통하여 성신께서 신뢰케 함이 믿음이다.1)
4) 구원의 역사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경륜적으로 가르치는 요리문답은 인격적이며 실존적이다.
24문은 사도신경을 삼분하면서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를 말한 사도신경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간명하게 잘 드러낸다. 게다가 이 고백 방식은 이른바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보여 준다. 구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성자 하나님의 구속 계시는 이 구원 역사적인 측면을 아주 잘 보여 준다.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25).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며,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는 고백(26)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고백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 요리문답은 아주 인격적이며 실존적이다(27-28; 120문답 참조).
5)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직분은 성신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직분이다. 곧 기독론에 정초(定礎)하는 성신론적 인간론이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백한다. 12-18문답은 그분이 참하나님이시고 참인간이심을, 29-52문답은 사도신경의 제2부에 나오는 구속 부분을 다룬다.
첫 부분은 4-5세기의 기독론 관점보다는 안셀무스의 성육신론에 나오는 논거를 따르고 있다. 고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심을 보였다면, 안셀무스는 성육신의 이유에 관심을 기울인다. 12문에 “마땅한데”, 16문과 17문의 “왜”는 그런 배경을 보여 준다. 이 부분은 포괄적인 죄 고백 다음에 나온다(6-11). 죗값을 완전히 치름으로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어야 한다(12답). 이 사실은 참하나님이요 참인간이신 중보자를 필요로 하며, 이 진리는 복음으로부터 안다고 고백한다(19). 그리스도의 사역은 양성(兩性)이 서로 섞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분리되지 않은 일체성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17). 비록 스콜라 신학의 영향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지만, 역사적 사실인 죄와 구속의 필요성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여 잘 해명하고 있다. 이 해명이 사도신경의 제2부를 다루는 구속 부분에서 길게 나타난다.
구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하면서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신님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31)이라고 대답한다. 아주 멋진 삼위일체론적 답변이다. 그리스도의 세 직분, 곧 선지자와 대제사장과 왕직을 말하는데, 이것은 칼빈에게서 왔다. 그분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계시하시고 대제사장으로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왕으로서 말씀과 성신님으로 다스리고 보호하신다는 답도 멋지다(31).
이 기독론 위에 곧장 정초(定礎)하는 성신론적 인간론은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세 직분을 지니는데,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제사장으로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며, 왕으로서 죄와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며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해야 한다(32).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말한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한다”(20, 53, 60, 65).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며(64), 성신님에 의해 그에게 연합된다(74, 80). 이것은 이후 순종의 기조가 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이런 접근 방식은 요리문답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단순성을 잘 보여 준다.
6) ‘음부 하강’에 대한 해설(44)은 칼빈적이다.
그리스도께서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44답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과 모든 사역의 유익에 대해서 말하고 나서 이 문제를 다룬다. 즉 ‘음부 하강’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역사적 고난의 순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다.
3.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선택을 다룸
7) 선택과 그 확실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확실성과 신뢰(26, 60)로부터 이끌어내며,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다룬다.
성부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성신님으로 자기 지체인 우리에게 은사를 베푸신다고 말한다(50-51). 이것은 사도신경의 제2부를 다루는 문맥에서 나오는데,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잘 묘사한다. 나아가 장차 임하실 심판주 예수님은 나를 자기의 택함을 받은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에 선택이 나온다(52). 장래에 대한 신뢰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선택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선택을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성신론과 교회론적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의 성자께서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 교회’를 참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자기의 말씀과 성신님으로 불러 모으고 보호하시며, 그 가운데서 개별 성도도 영원한 지체임을 고백한다(54). 교회는 말씀과 성신님으로 거룩하여지고, 성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만물을 다스리시는 성자께서 모든 인류 가운데서 택하셨으니 보편적이다(50답). 교중이 택함을 받았고, 그 안에서 개인도 택함을 받아 영생을 소망하고 이생에서 사명을 받아 행한다. 선택이 개별적 선택론이 아니라 교회론적 문맥에서 나온다. 이른바 개혁파의 중심 교리라고 알려진 예정론은 이 요리문답에 나오지 않는다. 이후의 개혁파 예정론의 발전은 이런 공동체적 선택 사상보다는 개별적 선택과 인간 심리 분석의 위험을 노출한다. 이런 고백의 성격상,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자기와 우리의 원수를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고백은 나오지만(52답), 유기(버림)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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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성적인 믿음과 신뢰를 복음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통합하는데, 지식과 신뢰가 이루는 균형이 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후 개신교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지식을 강조하는 스콜라주의나 신뢰를 강조하는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2) 공적이고 목회적인 요리문답답게,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 구속과 성화는 현학적 인 ‘귀속’(appropriation)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