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6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고전12장)
들어가면서 : 우리는 살면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 목표란 무엇에 근거하여 세우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나요? 그리고 왜 우리에게 그러한 명령을 하시나요? 이는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주어져 있는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기인하게 됩니다. 즉,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삶을 바르게, 착하게 사는 것이며 미래의 나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을 진로고민이라고 흔히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다원화된 이 시대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겐 어떤 역할들이 주어져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세요. 가정에선 자녀, 형과 동생, 학교에선 친구, 제자, 선후배, 사회에선 청소년 등등. 물론 선생님들에겐 살아온 만큼 더 많은 역할들이 주어져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주어지는 역할은 점점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할들에 어떤 질서와 우선순위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삶은 항상 이것저것을 분주하게 쫒아 다니다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어디 우리는 현재 자신의 역할들에 질서가 있습니까? 친구의 역할을 따르다가 학생의 역할을, 학생의 역할로 인하여 자녀로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경험은 없나요?
지금 우린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답변 적어보자>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 주일학교학생과 교사, 중등부 임원과 회원 등등.
어른들은 보다 다양한 역할들을 갖게 된다. 이 역할들에는 우리가 누리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도 주어짐을 볼 수 있다.
이제 저는 고전12장에서 제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의 생활 패턴을 정렬해 보라고 감히 권고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들은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수정할 사항이 없이 지금 주어진 역할만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하면 하나님나라의 모델인 교회의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감사한 것이지요. 아니라면 어떤 역할들이 첨가되고 어떤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고전 12장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보기를 원합니다.
4절에서 7절까지 다시 읽어봅시다. 7절을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무엇을 유익하게 한다는 뜻입니까? 이 구절의 관주는 엡4:11-13과 14,15,16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은사가,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다 ( “내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관주는 고전 14:26입니다. ...모든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여라.
여러분들이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결정이 교회에(or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것인가?’ 어떤일에 집중을 하고 그 공동체를 사랑하게 될 때 자연히 열정과 열심이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저처럼 온유함이 결여된 유형의 사람들은 쉬이 과격해지거나 나와 다른 것은 적으로 간주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행동은 덕을 해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분명히 이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고전 14:26과 롬 14:19 )
8-10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 즉, 이 외에도 많은 종류의 은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내가 지닌 재능, 특기가 내가 원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함부로 자랑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고, 그 은사를 내 맘대로 사용해서도 안 되며, 동시에 그냥 묻어두어서도(달란트 비유처럼)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아! 나에게 이러이러한 은사를 주신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찾고 고민하여야만 합니다.
이제 본문의 핵심인 몸과 지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12절에서부터 몸(육신)을 예로 들어서 교회의 연합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강도사님이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는 매주 공을 차는게 아니니까 ‘내 발아 너는 공을 차야 되니까 김포 전원교회에 가서 실컷 공을 차거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발은 잘려나가는 순간 이미 아무쓸모가 없어집니다. 일단 그것이 잘려지면, 그것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지체로의 속성인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5절부터 나타나는 예들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지체로서의 특성을 보다 자세히 살펴봅시다. 15,16절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연상됩니까? (답 듣기)
-겸손함의 미덕으로 ‘나는 못해요’, ‘나보다 제가 더 잘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러한 답을 하라고 사도 바울은 solution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바로 17-20절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18절과 11절을 비교해 봅시다.
다음에 21절은 어떤 상황이 연상됩니까? (답 듣기)
다른 지체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니 표현은 안 했어도 마음에 이런 생각으로 옆 사람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22-25절을 봅시다.
24,5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람의 관심은 정말 다르구나 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하면 이 모임이 잘 될까? 그럴 듯 하게 돌아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하여,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지체들이 똑같이 서로 돌아보게 하심’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을 닮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어서, 혼자 몰래 섭섭해 하거나 몰래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고, 연약한 지체에게 진심으로 기꺼이 도움을 주고, 비교하여 멸시함이 없이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그러한 공동체요...
현재 우리의 모임은 사람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중 어디에 더 가깝습니까?
이제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 지체임을 계속 확인하여야 할 분명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말씀은 여기서 마치지 않고 이런 돌아봄이 있는 공동체에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한 지체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고, 즐거움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 지체의 역할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하는지를 말씀에 의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한 장의 말씀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다면 성경 66권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행함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성경을 읽을 마음이 들다가도 사라지지요? 우리처럼 흠 많은 인간에게 이런 행함을 무작정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절망할까봐 고전 12장을 끝나기 전 마지막 절에 그 길의 힌트를 주십니다.
한 번 읽어 봅시다. 여기서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다음 장이 무슨 장입니까? 네,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로서 내 역할만 하기도 벅찬 한계가 너무 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 잡아갈 때 나도 모르게 지체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지 말라고 하여도 미소 지으며 주위의 지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좋은 날 여기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보기 싫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까? 그를 돌아보아 한 몸이 고르게 되도록 합시다.
들어가면서 : 우리는 살면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 목표란 무엇에 근거하여 세우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나요? 그리고 왜 우리에게 그러한 명령을 하시나요? 이는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주어져 있는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기인하게 됩니다. 즉,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삶을 바르게, 착하게 사는 것이며 미래의 나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을 진로고민이라고 흔히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다원화된 이 시대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겐 어떤 역할들이 주어져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세요. 가정에선 자녀, 형과 동생, 학교에선 친구, 제자, 선후배, 사회에선 청소년 등등. 물론 선생님들에겐 살아온 만큼 더 많은 역할들이 주어져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주어지는 역할은 점점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할들에 어떤 질서와 우선순위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삶은 항상 이것저것을 분주하게 쫒아 다니다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어디 우리는 현재 자신의 역할들에 질서가 있습니까? 친구의 역할을 따르다가 학생의 역할을, 학생의 역할로 인하여 자녀로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경험은 없나요?
지금 우린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답변 적어보자>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 주일학교학생과 교사, 중등부 임원과 회원 등등.
어른들은 보다 다양한 역할들을 갖게 된다. 이 역할들에는 우리가 누리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도 주어짐을 볼 수 있다.
이제 저는 고전12장에서 제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의 생활 패턴을 정렬해 보라고 감히 권고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들은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수정할 사항이 없이 지금 주어진 역할만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하면 하나님나라의 모델인 교회의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감사한 것이지요. 아니라면 어떤 역할들이 첨가되고 어떤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고전 12장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보기를 원합니다.
4절에서 7절까지 다시 읽어봅시다. 7절을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무엇을 유익하게 한다는 뜻입니까? 이 구절의 관주는 엡4:11-13과 14,15,16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은사가,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다 ( “내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관주는 고전 14:26입니다. ...모든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여라.
여러분들이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결정이 교회에(or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것인가?’ 어떤일에 집중을 하고 그 공동체를 사랑하게 될 때 자연히 열정과 열심이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저처럼 온유함이 결여된 유형의 사람들은 쉬이 과격해지거나 나와 다른 것은 적으로 간주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행동은 덕을 해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분명히 이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고전 14:26과 롬 14:19 )
8-10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 즉, 이 외에도 많은 종류의 은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내가 지닌 재능, 특기가 내가 원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함부로 자랑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고, 그 은사를 내 맘대로 사용해서도 안 되며, 동시에 그냥 묻어두어서도(달란트 비유처럼)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아! 나에게 이러이러한 은사를 주신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찾고 고민하여야만 합니다.
이제 본문의 핵심인 몸과 지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12절에서부터 몸(육신)을 예로 들어서 교회의 연합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강도사님이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는 매주 공을 차는게 아니니까 ‘내 발아 너는 공을 차야 되니까 김포 전원교회에 가서 실컷 공을 차거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발은 잘려나가는 순간 이미 아무쓸모가 없어집니다. 일단 그것이 잘려지면, 그것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지체로의 속성인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5절부터 나타나는 예들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지체로서의 특성을 보다 자세히 살펴봅시다. 15,16절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연상됩니까? (답 듣기)
-겸손함의 미덕으로 ‘나는 못해요’, ‘나보다 제가 더 잘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러한 답을 하라고 사도 바울은 solution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바로 17-20절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18절과 11절을 비교해 봅시다.
다음에 21절은 어떤 상황이 연상됩니까? (답 듣기)
다른 지체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니 표현은 안 했어도 마음에 이런 생각으로 옆 사람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22-25절을 봅시다.
24,5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람의 관심은 정말 다르구나 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하면 이 모임이 잘 될까? 그럴 듯 하게 돌아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하여,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지체들이 똑같이 서로 돌아보게 하심’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을 닮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어서, 혼자 몰래 섭섭해 하거나 몰래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고, 연약한 지체에게 진심으로 기꺼이 도움을 주고, 비교하여 멸시함이 없이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그러한 공동체요...
현재 우리의 모임은 사람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중 어디에 더 가깝습니까?
이제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 지체임을 계속 확인하여야 할 분명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말씀은 여기서 마치지 않고 이런 돌아봄이 있는 공동체에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한 지체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고, 즐거움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 지체의 역할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하는지를 말씀에 의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한 장의 말씀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다면 성경 66권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행함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성경을 읽을 마음이 들다가도 사라지지요? 우리처럼 흠 많은 인간에게 이런 행함을 무작정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절망할까봐 고전 12장을 끝나기 전 마지막 절에 그 길의 힌트를 주십니다.
한 번 읽어 봅시다. 여기서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다음 장이 무슨 장입니까? 네,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로서 내 역할만 하기도 벅찬 한계가 너무 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 잡아갈 때 나도 모르게 지체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지 말라고 하여도 미소 지으며 주위의 지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좋은 날 여기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보기 싫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까? 그를 돌아보아 한 몸이 고르게 되도록 합시다.
아빠.왜 이렇게 글이 길어! 그래서 나 안 읽었어. 나도 길개하는게 낮을거야. 아바가 빨리 온 다면서! 다음부터... 아니! 오늘부터 빨리 와! 나 실망... ㅋㅋ 아니야. 그런대 엄마가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몰르겠어. 아빠. 나 아직도 아바타 걱정이야. 난 아래 쪽은 보겠는데... 왜이렇게 길어!나 지금 쓰는 대도 아바타 생각나. 아저씨. 잘 먹고 조심히 돌아오슈^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