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20주기
해무
그해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다. 요즘 여름처럼 무더운 여름이 아니었다. 비는 오지 않아 땅에 괭이를 대면 뚝뚝 튕기고 대낮에 바깥에 나가면 땀이 줄줄 흘렀다. 천수답인 저건네에 부모님께서 모내기를 하셨지만 물이 말라 애태우던 시절이었다. 고령에서 근무하던 여동생이나 진주에서 근무하던 동생은 가까운데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주 고향으로 가 부모님을 도왔다. 나머지는 멀리 있다는 이유로 자주 뵙지도 못하고 일손을 도와드리지도 못하였다.
20년이라, 어제 일 같은데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7월 19일 저녁, 잠실중앙교회 유년부 하기학교를 끝내던 날,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큰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20일, 합천댐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개장국을 한 솥 끓이셨다. 흔히들 날벼락이라 한다. 세월호 사건이나 지난 17일 말레이시자 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날벼락 말이다. 급히 고속버스를 타고 고령으로 갔다. 막내 여동생을 위로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죄책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다 지나간 일, 사건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리고 믿음의 모범을 보이시고 그 믿음을 전수하셨던 부모님의 자녀들답게 의연하게 처신하자고 다독거렸다.
지금도 장례행렬이 기억난다. 더 한더위에 문상객이 많이도 오셨다. 그 당시 내 나이 채 마흔이 되기 직전,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날 장남으로 잘 키우셨고 당신께서 스스로 산소를 준비하심으로 우리의 짐을 덜어주셨다. 그 이후 우리 모두는 다 가정을 이루었고 이제 당신들의 후손은 36명으로 늘어났다.
장례식 마지막에 상주로서 치토를 할 때, 억눌렀던 슬픔과 애모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울음을 걷잡을 수 없어서 엉엉 울었다. 3년 전 지도교수님의 하관식에서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자식과 제자는 늘 자식이요 제자인 모양이다.
나는 그 이후 4년 가을을 많이 탔다. 아버님을 여의고 겪는 정신적 공황의 일종이었다. 특히 학교와 교회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그리웠다. 두 분 다 그러셨지만, 어머님께서는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일을 하셨고, 우리가 가서 뵐 때마다 이런 저런 음식과 먹을 것을 준비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드니까 이런 부모님의 맘을 알듯하다. 자녀들이 믿음에서 건강하게 흥하는 것, 이걸 부모님께서 원하셨다.
지난 20년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지나갔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을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난다. 그해 5월, 부산으로 아버님을 청하여 뷔페에서 아들로서 첫 대접을 해드렸다. 오직 돼지고기만 드시는데, 얼마나 맛있게 드시던지... 도무지 잊을 수 없다. 흥이 많으셨던 아버님, 내가 자주 이런 대접을 해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기분 좋아하시면서 그 좋다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게 첨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어머님은 나 괜찮다 하시거나, 너 차 사주려고 내가 장 다니신다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 나는 어머님과는 깊은 얘기를 별로 나누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우리 어머님같이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분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더운 날, 시골장을 지나치면 어머님 생각이 꼭 난다. 내가 가서 곁에 앉아 있으면, 날 두고 무슨 자랑을 하실까....
며느리와 사위 중에 시부모님과 장인·장모님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뵙지 못한 후손들에게는 미안한 맘이 늘 있다. 그분들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믿음을 다 지키고 자녀들에게도 믿음 훈련을 시키는 것은 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때문이다.
가난과 무식을 물려주시지 않으시겠다면서 추석에도 지게를 지고 나가시던 아버님, 유가들 집안 못돼서 정이 없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은 우애 좋게 지내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님, 이분들 덕분에 우리가 있다. 당신들이 믿음을 잘 지키고 우리에게 물려주시었듯, 우리도 믿음을 잘 지켜 다음 대에 잘 물려주자.
2014,7,20, 주일
값진 신앙, 기독교 3대, 그 이상으로 잘 이어나가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