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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는 학교의 게시판에 누군가 올려뒀던 글인데, 유익한 글입니다.
첫번째 link에는 이글의 영문 원문이 그리고 두번째 link에는 Kenneth의
홈페이지가 link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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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The Academy and Jesus
이 글은 미국의 크리스챤 경제학자들이 발간하는 저널 "Faith and Economics"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Elzinga는 버지니아 대학의 교수인데, 산업조직론에서 대가로 꼽히는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그는 정부규제 및 정책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고, 최근 MS의 소송에서 쟁쟁한 경제학자들 Fisher, Schmalensee, Shapiro, Murphy 등과 함께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크리스챤인 것을 알고 조금 놀랐지요. 그리고 이 글을 읽고서 참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학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크리스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적은 에세이입니다. 그의 탁월함 뒤에 숨겨있는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크리스챤 경제학자들의 모임에서 소개하기 위해 번역해 보았습니다. 동지 여러분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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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cademy and Jesus
By Kenneth G. Elzinga, Ph. D. Professor of Economics, University of Virginia
정리 : 김재수 (2003. 10.9)
지난 수년 동안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나의 생각을 사로잡았던 것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크리스챤으로서 학문적 영역에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주의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는 신앙과 학문의 통합적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는 이것과는 조금 벗어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논의는 생물학, 철학, 역사학, 문학, 사회과학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Calvin College와 같은 곳에서 많이 토론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러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생물학, 철학, 역사학, 문학, 또는 사회과학의 교수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주제는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염두하고 있는 것은 크리스챤 교수가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University of Virginia의 교수진들에게 각자의 교육 철학을 써내라고 한 때였습니다. 학교와 연구소 같은 직장에서 우리의 봉급은 대부분 연구 성과에 기초해 있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크게 달려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학교측의 이러한 요청은 몇몇 교수 동료들에게 작은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나 역시 교육 철학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교육 철학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내 홈페이지에 담겨 있는 교육 철학 사명서의 처음 두 문단을 인용한 것입니다.
종교학과의 동료들은 크리스챤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을 십자가의 희생 장면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 선생인 나에게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이 장면은 역설적이라 할 수 있는 성경적 리더십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섬김을 받으려거든 섬겨야 하고, 첫째가 되려거든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러한 그림을 나의 강의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만약 내가 학생들을 가장 잘 이끌기 원한다면, 나는 그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선생으로서의 나의 권위는 내가 학생들을 기꺼이 섬기려고 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교육철학은 나와 경제학 사이의 연결점 보다는 나와 학생들 사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최근 우리 학교에는 많은 학생들이 WWJD(What Would Jesus Do?)라는 팔찌를 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삶의 영역에서는 내가 기대하는 것 보다 그 이상으로 그 답변이 명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직접 섬길 수 없으므로, 나의 학생들을 마치 주님처럼 섬기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심오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섬겨야 할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모범적인 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지난 33년 동안의 교직 생활 동안 많은 실수가 어우러진 이야기 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1. Prayer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기도는 학생들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영역입니다.
나의 연구실을 방문하는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학문적인 문제들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는 깨어진 관계와 삶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문제는 경제적 분석이 아니라 아담 이래로 계속되어 온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종종 나의 능력으로는 그들의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단순하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들과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위해 기도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아직까지 나의 제안을 거절한 학생은 없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할 것은 내가 사전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유대인도 있었고 모슬렘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다시 연구실을 방문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줄 어떤 교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쳤기 때문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 장면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나의 깨어짐과 부족함을 보기를 원합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학생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2. The Home
내가 사는 곳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수들에게 있어서 집이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성입니다. 교수들의 집이란 보통 학생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집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그와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은 나의 집을 학생들이 항상 환영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나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나의 전 아내에게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집을 학생들에게 항상 개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James Houston 교수의 말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와 그의 아내는 그들의 집이 주님의 것이기에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집을 개방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성경공부와 세미나 그리고 각종 모임을 위해 우리 집에 있는 방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와 아내는 종종 집에 없지만, 학생들은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교의 많은 크리스챤 모임들이 우리 집에 있는 연못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언젠가 집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3. Office Hours
몇 해 전, 나는 office hours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 시간에 찾아오는 학생들을 필요악(necessary evil)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들의 발을 씻길 기회 임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복음과 예수님에 대하여 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수 백 명의 학생들이 회심하였다고 하면 과장일 테지만,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젊은 시절에는 갖지 못했던 기대감을 가지고 office hours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 The Classroom
가장 전문적인 역할을 위해 학생들을 만나는 교실에서는 어떻게 예수와 강의를 연결 지을 수 있을까요? 대학은 내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을 가르치도록 나를 고용했고 내게 월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생은 그들의 전문 영역을 냉철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을 다른 용도로 이용한다면 이것은 마치 영원한 스승되신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하나의 금괴를 찾기 위해 온 책을 채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 The Website
만약 예수님이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링크가 존재할까요?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의 홈페이지는 ‘매일 묵상’을 할 수 있는 싸이트들로 링크되어 있는데, 얼마 전 한 여학생이 나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다가 이 싸이트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왜 예수님을 믿는지에 대하여 묻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 여학생은 세 달 정도 묵상 싸이트를 방문하다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홈페이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지 모르지만, 학생들의 비용편익 분석은 다릅니다. 만약 당신이 선생이라면 당신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감추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6. Credentials
이 사회는 성적표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학문 세계에서도 성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순위 매기고, 그들을 존경하거나 경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처럼 가르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성적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자기반성을 잘 할 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학문적인, 재정적인, 그리고 제도적인 성과를 중요시 여기려는 경향이 바로 나의 영혼이 불안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업적은 당신과 학생들 간의 장벽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년 동안 나는 수업에서 A+을 받은 학생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들 역시 나의 편지를 좋아합니다. 반면 나는 최근부터 내 수업에서 낙제한 학생들에게도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30명의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F를 받은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편지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사실 이 학생들이야 말로 내가 잘 섬기지 못한 학생들입니다.
여기서 마치 각주를 달 듯이 부언하자면,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정말 훌륭한 섬김입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은 교수로부터 편지를 받지 않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아프거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항상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의 편지는 그들이 학교로부터 받은 유일한 편지이기도 합니다.
학문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교훈 하나는 성과와 업적을 덜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는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가말리엘에게서 공부했는데, 이것은 마치 프리드만, 사무엘슨, 또는 토빈과 같은 경제학자의 제자였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부를 뿐이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기 위해 경제학자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업적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우리 모두 내부화(internalize)하도록 합시다.
6. Conclusion
Southern California University의 Willard 교수는 Christian Scholar’s Review에서 예수님이 매우 총명한 논리학자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서는 예수와 intelligence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역사상 가장 총명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이를 매우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어느 누구도 예수를 사상가 또는 논리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이야 말로 오늘날의 모든 전문적인 학문 분야에 있어서도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를 우리의 전문분야에 있어서도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그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리고 코즈의 정리와 CAPM 모델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골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의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의 말씀처럼 그는 철저하게 우리의 전문 분야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은 마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리적인 세계를 철저하게 이해했고, 그 법칙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은 가능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모든 능력과 지혜를 초월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상하구조를 덜 중요하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람은 그것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 깨닫고 놀라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상하구조와 자신의 업적이 매우 중요한 세계를 살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무슨 의미가 있을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대학에서 30년 이상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 지겹지 않느냐고, 적어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은 끊임없이 새롭고, 도전적이고, 보람을 느끼게 하고, 한편 두렵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스승되신 예수와 동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