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3
위대한 유산
유해신 (버지니아 주 샬롯츠빌 빛과 소금 교회 목사, 미주 고신)
지난 달 40중반의 늦은 나이에 제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은 선친 유대수 장로의 위대한 신앙의 한 열매로 생각됩니다. 아버님은 복음적 소명 때문에 한때 50대 나이에 시골의 무임교회의 교역자로 섬겼지만 다시 농사일로 되돌아 와 들판에서 하늘로 부름받아 가셨습니다. 그 신앙따라 형님 유해무 목사는 교수 사역을 하고 사위 이승병 목사가 현장목회를 해 왔습니다. 사위 정태인은 농아학교에서 가르치고, 막내사위 박성일은 용감하게도 지난 달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가르치는 수학”이라는 연구수업을 했습니다. 동생 해은이는 직장과 교회를 잘 섬기며 4월에 하영이를 딸로 입양하였습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막내 성은이도 아버님 신앙따라 결혼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교회와 민족을 위해 살라”는 아버님의 교훈대로, 저희 7남매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천국으로 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소개해 주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믿음은 손자들에게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아버님은 온 몸이 으스러지게 일하신 날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골교회당에 무릎꿇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유산 덕분에 저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윤실)에서 시민운동을 할 때도, 새벽에 하나님께 무릎꿇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유산 덕분에 저는 정치 사회적 정의를 외칠 수 있었고, 교회의 성결을 회복하려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만이 인류문제에 대한 유일한 최상의 해결책이라는 복음적 확신을 견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작은 개척교회에서도 매일 새벽 하나님과 말씀 앞에 자기를 돌아보고 교회와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늘을 바라고 농사짓는 천수답에는 비가오면 당장 물을 모아 써레질 해야 모심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일에는 비가 와도 아예 들에도 나가지 않고 안식의 날로 지키셨습니다. 아버님의 신앙 따라 우리들도 아이들에게도 주일에는 TV와 물건 사는 것은 하지 않고, 스포츠나 가벼운 놀이정도만 하게 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주일에는 외로운 사람을 돌아보며 전도하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하려 합니다.
당신은 천성적으로 몸도 허약하고 겁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과 4촌 동생 (저의 할아버지와 5촌 아저씨)에 매맞고, 시골마을에 혼자 외톨이가 되어도 주일이면 교회가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지조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신비적 하나님의 능력이 아버님 안에 초인간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자녀들에게 진리 앞에 용감하라고 아직도 힘차게 말합니다.
동네 사람이 심은 감나무가 우리 집 논에 그늘을 드리워 벼가 익는데 방해를 주는 데도 아버님은 그냥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저는 대학 때는 용기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년기를 지나면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정신임을 깨달고, 손해를 감수하는 순교정신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완벽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나가도록 전도해 주셨기에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다했다고 믿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아버님은 자녀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있는 조언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신앙적 도덕적 결함은 사춘기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분이 소개해 준 용서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분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장례식 날, 우리들은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찬송하며, 죄인 중의 한 사람인 아버님을 사랑하고 천국으로 영접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찬양했습니다. 유대수 장로의 아버님, 은혜의 성 삼위 하나님 앞에, 오늘도 우리는 새롭게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유해신 (버지니아 주 샬롯츠빌 빛과 소금 교회 목사, 미주 고신)
지난 달 40중반의 늦은 나이에 제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은 선친 유대수 장로의 위대한 신앙의 한 열매로 생각됩니다. 아버님은 복음적 소명 때문에 한때 50대 나이에 시골의 무임교회의 교역자로 섬겼지만 다시 농사일로 되돌아 와 들판에서 하늘로 부름받아 가셨습니다. 그 신앙따라 형님 유해무 목사는 교수 사역을 하고 사위 이승병 목사가 현장목회를 해 왔습니다. 사위 정태인은 농아학교에서 가르치고, 막내사위 박성일은 용감하게도 지난 달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가르치는 수학”이라는 연구수업을 했습니다. 동생 해은이는 직장과 교회를 잘 섬기며 4월에 하영이를 딸로 입양하였습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막내 성은이도 아버님 신앙따라 결혼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교회와 민족을 위해 살라”는 아버님의 교훈대로, 저희 7남매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천국으로 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소개해 주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믿음은 손자들에게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아버님은 온 몸이 으스러지게 일하신 날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골교회당에 무릎꿇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유산 덕분에 저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윤실)에서 시민운동을 할 때도, 새벽에 하나님께 무릎꿇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유산 덕분에 저는 정치 사회적 정의를 외칠 수 있었고, 교회의 성결을 회복하려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만이 인류문제에 대한 유일한 최상의 해결책이라는 복음적 확신을 견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작은 개척교회에서도 매일 새벽 하나님과 말씀 앞에 자기를 돌아보고 교회와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늘을 바라고 농사짓는 천수답에는 비가오면 당장 물을 모아 써레질 해야 모심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일에는 비가 와도 아예 들에도 나가지 않고 안식의 날로 지키셨습니다. 아버님의 신앙 따라 우리들도 아이들에게도 주일에는 TV와 물건 사는 것은 하지 않고, 스포츠나 가벼운 놀이정도만 하게 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주일에는 외로운 사람을 돌아보며 전도하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하려 합니다.
당신은 천성적으로 몸도 허약하고 겁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과 4촌 동생 (저의 할아버지와 5촌 아저씨)에 매맞고, 시골마을에 혼자 외톨이가 되어도 주일이면 교회가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지조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신비적 하나님의 능력이 아버님 안에 초인간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자녀들에게 진리 앞에 용감하라고 아직도 힘차게 말합니다.
동네 사람이 심은 감나무가 우리 집 논에 그늘을 드리워 벼가 익는데 방해를 주는 데도 아버님은 그냥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저는 대학 때는 용기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년기를 지나면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정신임을 깨달고, 손해를 감수하는 순교정신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완벽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나가도록 전도해 주셨기에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다했다고 믿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아버님은 자녀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있는 조언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신앙적 도덕적 결함은 사춘기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분이 소개해 준 용서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분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장례식 날, 우리들은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찬송하며, 죄인 중의 한 사람인 아버님을 사랑하고 천국으로 영접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찬양했습니다. 유대수 장로의 아버님, 은혜의 성 삼위 하나님 앞에, 오늘도 우리는 새롭게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