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이라는 단어가 참 새삼스럽네요. 세월이 유수라 부모님은 우리 가족 중 나만 알고 아무도 이 땅에서는 만나지 못 하신 채 가셨더라고요. 흐르는 세월은 아련한 기억만 남기고 많은 것들을 가져갔네요.
  원고 마감은 다가오는데 뭘 쓰야 할지 참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속에 부모님은 나란히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실제처럼 3m는 되어 보이는 시장보퉁이를 앞 뒤로 드신 채 시장에서 돌아오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짐은 무척 컸지만 힘들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보이시더군요.
  
기억 하나
우리가 아프다는 말 한 마디면 늘 아버지는 머리에 먼저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죠. 아프면 약보다는 아버지의 기도가 가장 가까운 처방이었습니다.

기억 둘
초등학교 때까지 아버지께서 직접 저희의 머리를 잘라주셨죠.
몇 장 있는 사진 속 머리는 모두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머리 자르는 시간은 주일 오후. 장소는 외양간 앞 아궁이 바로 위.  아무리 눈코 뜰새 없는 농번기에도 주일성수는 꼭 하셨죠. 대부분의 논이 오는 비를 받아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께는 큰 불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주일 오후는 아버지가 낮에 유일하게 집에서 쉬실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곤한 시간을 쪼개어 우리 모두의 머리를 잘라주셨죠.
머리를 자르면서 아버지는 늘 묻어둔 이야기나 교훈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부드럽게 와닿는 손길의 따스함에 저는 이야기가 자장가인양 꾸벅 꾸벅 졸음에 빠졌고, 아버지는 머리 자르는 것을 마무리하시고는 목 주위의 머리카락을 살살 터시고는 수돗가로 안고 가셔서 머리를 감겨주셨어요.
이 때 다시 한 번 저는 잠에서 살짝 깨어났습니다. 물의 차가움 때문은 아니죠. 왜냐하면 아버지는 추운 겨울에도 미리 물을 데웠다가 차가운 물과 적당히 섞어서 알맞게 조정하셨거든요. 제가 졸음에서 잠시 깨어나는 이유는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 소리 때문이죠. 머리에 비누를 바르시고 문지르시면서
  “아이고, 이 머리가 다 엉켰는데, 우째 빗을래? 큰일났다. 안 빗어지면 우짜노.”
놀림 섞인 말 때문에 저는 빗어질 걸 당연히 알면서도 우는 소리도 내고 그랬죠. 그렇지만 다시 머리감기가 다 끝날 즈음에는 다시 잠에 빠집니다.  그럼 아버지는 다시 저를 안아다 마루에 눕히셨고 저는 한낮의 오수를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에 잠기어 즐겼습니다. (아마 다희가 아파트 주차장에 딱 서면 잠에서 못 깨어나는 시늉을 해서 아빠가 안아서 집안에 내려다놓으면 눈을 뜨는 것과 같았을까요?) 어린 시절의 가장 따스한 기억 중이 하나입니다.

기억 셋
겨울날의 세수하기 기억나시나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세숫물을 데우시고는 우리 하나 하나를 불러서 얼굴을 씻어주셨죠.
세수하는데는 그리 많은 물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 한 세수대야 받은 물로 아마 우리 형제 모두를 닦아주셨죠. 한 손 떠서 이 쪽 저쪽 뽀드득 뽀드득 문질러주시던 손길이 아직도 목에 남아있는 듯합니다.

기억 넷
  아버지께서 대병에 설교하시러 다니던 때였나요?
어머니의 생활력은 우리 모두가 알죠. 저건네에서 참깨를 베서 깻단이 마르도록 잘 세워놓는 일을 해가 지고도 한참을 하고는 내려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가서 달무리를 보신 엄마는 “내일 비가 오겠다. 큰 일났다.”는 한탄을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살살 꼬시더군요. 빨리 가서 깨를 털고 오자고. 달이 저렇게 휘엉청 떴으니 지금 저건네 가도 별로 무섭지 않을테니 가자는 내용이었어요. 그 당시  무엇보다 참깨의 값이 솔솔했던 것을 알았던 저와 작은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아무리 달이 밝지만 그 무서움은 머리가 쭈뼜해질 정도였어요. 저건네 산을 내려와 제일 처음 만나는 평지에서 작은 오빠가 들려줬던 이 곳만 유독 뱀이 기어 다니질 않고 서서 다닌다는 얘기는 낮이나 밤이나 나를 따라 다니는 이야기였으므로 무서움은 더했죠.
  휘엉청한 달빛 아래 저희 세 모녀는 꽤 깊은 밤까지 깨를 털고 내려왔어요.
지금은 오히려 낭만적인 풍경으로 눈 앞에 그려지기도 하지만 고달픈 삶의 한 모퉁이었습니다.

  아버지께 사춘기 때 대들기도 하고 존경할만한 면이 왜 이리 없는지 불만도 많이 토로하고 무능해 보이는 모습에 화도 많이 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따스하고 자상한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다희 아빠도 아이들에게 참 잘 하지만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듯한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나눴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식에 대한 교육적이고 치밀한 사랑과 한량없는 희생이 오늘의 저희를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마의 생활력과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봐주시고 기다려주신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요.
  일찍 가셨지만 좋은 부모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온 힘을 다해 길러주신 그 분들의 사랑이 새롭습니다. 이 사랑을 2세들에게 그대로 몸으로 보일 수 있길 바래봅니다.<차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