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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분명하지 않더라. 나중에 만나서 기억을 정확하게 확인하여, 기록해야 하겠다)
벌써 10년이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부모님 없이 우리가 10년을 살아왔다니, 쉬 믿어지지도 않는다.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인지, 우리가 무심하게 살아왔는지, 이 또한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난 10년이 흘러간 것은 틀림없다.
우리 모두 어찌 그날을 잊으랴! 7월 20일, 수요일 저녁,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으니, 9시경이었으리라. 그날 잠실중앙교회 유년부 하기성경학교를 마치는 날이라, 좀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화에는 영옥이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동생들은 이미 고향집에 도착하였거나 도착 중에 있었다. 경훈이네는 도착하여 부모님과 저녁을 같이 먹었나? 부모님은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난 뒤에, 부산에서 저녁에 도착한 명옥이를 데리러 나가셨다가 그 참변을 당하였다. 영옥이는 고령에서 이미 집에 와 있었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나서, 상도동에 연락을 하고, 아이들을 단속하고 나서, 우리 부부는 동생과 함께 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12시나 되었다. 이미 그때는 부모님을 대구의 한 병원으로 모셨다고 하였다. 대구행 고속버스 표를 샀으나 한 자리가 모자랐다. 버스에 올라서서 내가 형편을 얘기하였더니, 휴가 나온 군인이 아마 여자 친구와 함께 양보하여, 우리는 제일 뒷좌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간간히 전화 연락을 하면서 대구에 도착하여, 병원에 가니 3시가 좀 넘었던가. 이미 두 분은 절명하셨고, 시신을 다시 고령으로 모셨다는 말을 듣고, 택시고 고령으로 향했다. 영옥이의 울음과 입원한 명옥이의 모습은 기억이 나는데, 더 이상 다른 동생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버스와 택시 안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한 순간에 부모님을 잃어버리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스쳐갔지만, 동생들을 안정시키고 장례를 무사히 치르려면, 장남인 내가 먼저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어찌 해석할 도리가 없는 엄청난 일 앞에서, 나는 불신자들의 입술을 보았고, 동생들의 자책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생전의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여동생들은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나는동생들에게는 모두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동기들은 서로 비난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믿으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듭 설득하였다.
그해 2월 아버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방학 중에도 부산에 내려오는 길에, 시간을 내어 고향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하셨다. 곧장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네 아버지가 죽고 싶으면, 혼자 죽지, 왜 나까지 같이 죽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다. 알고 보니, 아버님께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지금 당신들이 누워계시는 곳을 직접 파기 시작하셨는데, 어머님의 만류로 완전히 다 파지는 못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해 겨울에 고향에 들렀더니 아버님은 기술자를 불러 지하수를 파고 계셨다. 암반이 있었던지, 돌가루가 물에 허였게 풀린 물이 펑펑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곁에 피운 모닥불에 내 바지 가랑이 한 곳을 불똥에 태우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마 30만원인가를 아버님께 드리고 왔다. 그날 창수 아재가, 아버님에 대해서 한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버님께, 왜 어머님의 반대를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당신의 말씀인즉, 혹 급한 일을 당하면 객지에 있는 너희들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것인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되레 나에게 물으셨다. 정말, 당신들은 황급하게 가셨다. 그해 어버이날을 맞아서, 난 부모님을 부산으로 청하였다. 내가 뵈려 갈 수도 있지만, 부산에서 두 분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 장 나들이를 하시는 어머님은 사양하셨고, 아버님은 부산미문화원 근처에 있던 어떤 한식부폐에서 점심을 드셨다. 그날 남자라곤 아버님과 나, 단 둘밖에 없고, 숫제 여인들이 식당을 꽉 메웠다. 아버님께서 돼지고기를 어찌나 잘 드시던지, 두세 차례 쟁반을 채워 가져오셨다. 모시고 온 나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쭈었더니, 청하면, 자주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택시를 잡아, 택시비와 용채를 드렸더니, 아버님은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나 그런 대접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7월 21일에는 내가 합천호에서 매운탕을 대접해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님은 개를 잡았는데, 그냥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머님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자주 오실 것이고, 은근히 자랑도 하시겠지. 아버님께서는 종종 학교로 오셔서, 내 강의도 들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소감을 말씀하시면서, 80살 아버지에게는 60살 난 노인도 아들일 뿐이라는 말을 전제하시고는, 나에게 강의의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들려주실 것이다. 학생들이 내 강의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직접 물어보시고, 나에게 전해주실 것이다.
부모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우리 아이들 모두에게 얼마나 좋을까. 아마 명절에 세배돈과 용돈을 맞춰주신다고, 꽤 힘들어하시겠지. 현순이는 아버님께 멍석을 짜 달라거나 내가 손도 까딱하지 않으니, 집을 손봐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아버님은 그런 부탁을 쾌히 응하셨을 것이요, 다른 자식들이 살고 있는 이곳과 저곳을 다니시면서, 구경도 하고 교회도 방문하고, 그렇게 쉬고 싶어 하셨는데, 유람하시듯 편케 살아가실 것이다. 어머님은 지금도 장을 다니면서, 이 돈은 아무개 아들 몫, 저것은 아무개 딸 것이라고 명목을 붙이고는, 그 재미에 세월 가는 줄도 모르실 것이다.
부모님께서 떠나시고 나서,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결혼했는데, 과연 당신들이 이들의 결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찬성했을까, 반대했을까? 결국, 당신들이 계시지 않았지만, 계셨다 하더라도 이들의 결혼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께서 애써 모으신 돈을 떼먹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님의 기억력을 뛰어났으니, 그 참에 덕을 보자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을 터이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난 아버님과는 여행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시는 곳에서, 입맛을 돋우는 별미를 대접하면서, 예전의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회상하면서 말씀을 청해 듣고, 그리고 다시 차를 몰고 길을 떠날 것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히 아버님에게서 왔다. 어머님은 항상 피곤에 짓눌려서, 감겨지는 눈을 연신 떠시면서, 이것 먹어라 저것 마시라 하실 것이다. 함께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자고 말씀드리면, 이 장 저 장의 형편을 말씀을 하시면서 사양하실 터이니, 일년에 한 차례도 같이 떠나지 못할 것이다.
두 분이 함께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부의 정이 깊으면, 그렇게 한 날 한 시에 떠난다고 한다. 다 남은 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말이겠지.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셨다. 우리 자식들에게 두 분이 때로는 염려거리를 던지시기도 하였으나, 난 당신들의 돈독한 관계를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서로 사랑하셨고,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살아계셨더라면, 그분들 때문에 지난 10년은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계시지 않아도, 그분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다. 우리 일곱 동기들이 다 건강하고,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의 복을 받으며,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다 이분들의 덕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 계시든 계시지 않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 자신들을 말한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그리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그분들을 뵐 날을 고대한다.
벌써 10년이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부모님 없이 우리가 10년을 살아왔다니, 쉬 믿어지지도 않는다.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인지, 우리가 무심하게 살아왔는지, 이 또한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난 10년이 흘러간 것은 틀림없다.
우리 모두 어찌 그날을 잊으랴! 7월 20일, 수요일 저녁,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으니, 9시경이었으리라. 그날 잠실중앙교회 유년부 하기성경학교를 마치는 날이라, 좀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화에는 영옥이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동생들은 이미 고향집에 도착하였거나 도착 중에 있었다. 경훈이네는 도착하여 부모님과 저녁을 같이 먹었나? 부모님은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난 뒤에, 부산에서 저녁에 도착한 명옥이를 데리러 나가셨다가 그 참변을 당하였다. 영옥이는 고령에서 이미 집에 와 있었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나서, 상도동에 연락을 하고, 아이들을 단속하고 나서, 우리 부부는 동생과 함께 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12시나 되었다. 이미 그때는 부모님을 대구의 한 병원으로 모셨다고 하였다. 대구행 고속버스 표를 샀으나 한 자리가 모자랐다. 버스에 올라서서 내가 형편을 얘기하였더니, 휴가 나온 군인이 아마 여자 친구와 함께 양보하여, 우리는 제일 뒷좌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간간히 전화 연락을 하면서 대구에 도착하여, 병원에 가니 3시가 좀 넘었던가. 이미 두 분은 절명하셨고, 시신을 다시 고령으로 모셨다는 말을 듣고, 택시고 고령으로 향했다. 영옥이의 울음과 입원한 명옥이의 모습은 기억이 나는데, 더 이상 다른 동생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버스와 택시 안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한 순간에 부모님을 잃어버리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스쳐갔지만, 동생들을 안정시키고 장례를 무사히 치르려면, 장남인 내가 먼저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어찌 해석할 도리가 없는 엄청난 일 앞에서, 나는 불신자들의 입술을 보았고, 동생들의 자책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생전의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여동생들은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나는동생들에게는 모두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동기들은 서로 비난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믿으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듭 설득하였다.
그해 2월 아버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방학 중에도 부산에 내려오는 길에, 시간을 내어 고향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하셨다. 곧장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네 아버지가 죽고 싶으면, 혼자 죽지, 왜 나까지 같이 죽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다. 알고 보니, 아버님께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지금 당신들이 누워계시는 곳을 직접 파기 시작하셨는데, 어머님의 만류로 완전히 다 파지는 못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해 겨울에 고향에 들렀더니 아버님은 기술자를 불러 지하수를 파고 계셨다. 암반이 있었던지, 돌가루가 물에 허였게 풀린 물이 펑펑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곁에 피운 모닥불에 내 바지 가랑이 한 곳을 불똥에 태우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마 30만원인가를 아버님께 드리고 왔다. 그날 창수 아재가, 아버님에 대해서 한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버님께, 왜 어머님의 반대를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당신의 말씀인즉, 혹 급한 일을 당하면 객지에 있는 너희들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것인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되레 나에게 물으셨다. 정말, 당신들은 황급하게 가셨다. 그해 어버이날을 맞아서, 난 부모님을 부산으로 청하였다. 내가 뵈려 갈 수도 있지만, 부산에서 두 분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 장 나들이를 하시는 어머님은 사양하셨고, 아버님은 부산미문화원 근처에 있던 어떤 한식부폐에서 점심을 드셨다. 그날 남자라곤 아버님과 나, 단 둘밖에 없고, 숫제 여인들이 식당을 꽉 메웠다. 아버님께서 돼지고기를 어찌나 잘 드시던지, 두세 차례 쟁반을 채워 가져오셨다. 모시고 온 나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쭈었더니, 청하면, 자주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택시를 잡아, 택시비와 용채를 드렸더니, 아버님은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나 그런 대접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7월 21일에는 내가 합천호에서 매운탕을 대접해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님은 개를 잡았는데, 그냥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머님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자주 오실 것이고, 은근히 자랑도 하시겠지. 아버님께서는 종종 학교로 오셔서, 내 강의도 들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소감을 말씀하시면서, 80살 아버지에게는 60살 난 노인도 아들일 뿐이라는 말을 전제하시고는, 나에게 강의의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들려주실 것이다. 학생들이 내 강의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직접 물어보시고, 나에게 전해주실 것이다.
부모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우리 아이들 모두에게 얼마나 좋을까. 아마 명절에 세배돈과 용돈을 맞춰주신다고, 꽤 힘들어하시겠지. 현순이는 아버님께 멍석을 짜 달라거나 내가 손도 까딱하지 않으니, 집을 손봐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아버님은 그런 부탁을 쾌히 응하셨을 것이요, 다른 자식들이 살고 있는 이곳과 저곳을 다니시면서, 구경도 하고 교회도 방문하고, 그렇게 쉬고 싶어 하셨는데, 유람하시듯 편케 살아가실 것이다. 어머님은 지금도 장을 다니면서, 이 돈은 아무개 아들 몫, 저것은 아무개 딸 것이라고 명목을 붙이고는, 그 재미에 세월 가는 줄도 모르실 것이다.
부모님께서 떠나시고 나서,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결혼했는데, 과연 당신들이 이들의 결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찬성했을까, 반대했을까? 결국, 당신들이 계시지 않았지만, 계셨다 하더라도 이들의 결혼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께서 애써 모으신 돈을 떼먹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님의 기억력을 뛰어났으니, 그 참에 덕을 보자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을 터이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난 아버님과는 여행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시는 곳에서, 입맛을 돋우는 별미를 대접하면서, 예전의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회상하면서 말씀을 청해 듣고, 그리고 다시 차를 몰고 길을 떠날 것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히 아버님에게서 왔다. 어머님은 항상 피곤에 짓눌려서, 감겨지는 눈을 연신 떠시면서, 이것 먹어라 저것 마시라 하실 것이다. 함께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자고 말씀드리면, 이 장 저 장의 형편을 말씀을 하시면서 사양하실 터이니, 일년에 한 차례도 같이 떠나지 못할 것이다.
두 분이 함께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부의 정이 깊으면, 그렇게 한 날 한 시에 떠난다고 한다. 다 남은 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말이겠지.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셨다. 우리 자식들에게 두 분이 때로는 염려거리를 던지시기도 하였으나, 난 당신들의 돈독한 관계를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서로 사랑하셨고,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살아계셨더라면, 그분들 때문에 지난 10년은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계시지 않아도, 그분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다. 우리 일곱 동기들이 다 건강하고,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의 복을 받으며,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다 이분들의 덕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 계시든 계시지 않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 자신들을 말한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그리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그분들을 뵐 날을 고대한다.
엄마께는 우리집(아파트)을 보여 드리고 마사지를 해 드려서, 화장을 하면 뭉쳐 시퍼러쭉쭉하다시던 얼굴에 화장이 잘 먹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