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서 올해는 아주 무더운 여름을 보내게 될 거라는 보도를 들을 때마다 굉장히 무더웠던 10년전 여름이 생각납니다. 작은 진주성광교회당에서 생활할 때 수요예배를 마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쯤에 큰자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영생병원에 계신데 날이 새면 꼭 와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꼭 와야 한다는 걸 여러 번 이야기하시는 바람에 부모님이 어떠신지 물어볼 수가 없었고, 물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는 부모님 어떠실까 하는 걱정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고령으로 가는 첫차를 타고 가면서도 부모님 어떠실까 하는 생각만 했답니다. 고령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영생병원 앞에 있는 건널목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릴 때, 법정아재를 만났는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영생병원에 가서도 부모님을 뵐 수가 없었고, 단지 염할 때 마지막으로 뵐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인지 몰랐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슬픔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분명 시골집에 계실 것 같은데 시골집에 가도 계시지 않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저건네에 가서도 불러봤습니다. 갑자기 부르지 못하게 된 “아부지, 엄마”.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크게 불러 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차 안에서 힘껏 불러봤습니다. “아부지!”, “엄마!”

  아버지는 소 길들이는 데는 선수였습니다.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는 우리 집에 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공부시키시느라 논도 많이 팔고, 소도 팔았습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소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소를 팔았다는 것은 부모님께서 우리를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소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를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소는 농사에 필수조건이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소를 길 들여 주는 대신 소를 1년 빌리는 조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소인지 남의 소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가 새끼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저건네에 일하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걸을 건너자마자 오르막 길 옆에 있는 조정수 양반 논으로 송아지가 들어갔습니다. 어미소는 길을 따라 올라 가고 송아지는 논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어미소를 따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송아지를 안아서 어미소 옆으로 안아다 주셨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항상 예수님께서 어린양 한 마리를 안고 계시는 사진이 생각난답니다. 소 길들이는 일, 물론 아버지의 오랜 경험도 있으시겠지만 오히려 이런 사랑의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친구 잘 사귀어야 한다.” 중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 핫도그집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많이 군것질 했지만, 우리는 따로 용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작은 방 장롱에 엄마 핸드백이 있었는데, 거기에 오백원짜리 새 지폐가 몇 십장 있었답니다. 핫도그가 50원 했으니 핫도그 10개 값이네요. 들킬 게 뻔한데 내 돈처럼 한 장씩 빼서 사용하다가 혼이 났었죠. 그 뒤에 앞집 황서방네 누야집 앞에 있는 텃밭에서 밤에 자두를 몰래 따고 있었는데 마침 황서방네 집에 마실 오시던 엄마를 만났답니다. 바로 작은 방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께 불려 갔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신 것 같은데, “내 니 때문에 못 살겠다”였습니다. 돈 몰래 훔쳐 군것질 했을 때도 아무 말씀 안하셨는데 이번에는 남의 자두까지 훔쳤으니, 아마 이런 여러 일이 겹친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좀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가정예배를 인도하셨고, 늘 새벽기도를 다니셨습니다. 새벽부터 기도하시고, 밤이 늦도록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는 데 왜 이리 가난한가가 제 사춘기 고민 중의 하나였답니다. 그 성실하심은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자식 공부시켜봐야 자식만 좋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 말대로 아버지, 엄마 덕분에 우리가 호강합니다. 이 호강을 나 혼자 누리지 않고, 아버지를 통해 이어져 가는 믿음의 자녀와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평생하신 새벽기도가 아버지 대에서 그쳐지지 않고, 민족과 교회, 가정을 위한 기도가 계속 이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좋은 유산 중 하나는 식사 시간에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이 한 상에 둘러 앉아,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함께 식사하는 일이 귀한 유산입니다. 가정을 회복시켜 가는 귀한 밑거름이 된 줄로 믿고, 함께 기도하는 일이 계속되어져 가기를 기대합니다.

  대학 다닐 때, 서울에 있는 작은 형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형이 다 듣고 나서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만, 네가 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만큼 이렇게 큰 일을 해 놓을 수 있겠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바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요즘도 종종 작은 형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쉽게 나무라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아버지, 엄마는 분명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믿음과 용납, 어머니의 사랑, 평생 당신들의 삶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신 삶이 여전히 태산 같이 다가옵니다. 아버지만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푯대가 되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나 자신을 가다듬어 가려고 합니다.

  아버지 품에 안겨서 아버지께서 세수 시켜 주실 때 나는 아버지의 손 내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립습니다. 저건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동네의 오르막 길에서 자주 엄마 등을 밀어 드렸는데 지금도 다시 한번 엄마 등을 밀며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