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3
띠기야,
“♡♡띠기야(댁아), 내다. 오늘 주일인 것 알제. 일찍 할 일하고 교회 꼭 온나(오너라)”
언제부터인지 엄마는집 근처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제가 쉬는 날에 집에 가면 이웃 마을에 사시는 아주머니께 주일 아침이면 이런 전화를 하곤 하였습니다. 정작 당신 자신은 7남매의 뒷바라지로 장돌뱅이가 되셔서 겨우 주일 하루가 여유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나마 그 주일마저도 잠깐 낮잠으로 눈 한번 붙이시는 것이 한 주간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고, 그러고는 텃밭의 채소를 가꾸어 또 다른 장거리 준비를 하셔야만 했습니다. 이 같은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도, 이 땅에서 성도로서의 마지막 삶을 그렇게 차분히 마무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요. 나의 엄마는 장돌뱅이였습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형제들의 용돈이나 벌어 볼 요량으로 비정기적으로 다니셨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주일이나 아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장 보따리를 묶고, 푸는 일을 되풀이하며 사셨답니다. 그러다가 9년 전에, 부모님의 유일한 자가용이던 경운기를 타고 수요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다가 (교회가 l,5Km 떨어진 이웃마을에 있음), 음주 운전자의 승합차에 부딪혀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죠. 여섯째까지는 공부를 마쳤고, 그 동생이 첫 월급 받아 사 드린 속옷까지 얻어 입었지만, 아직 고3인 막내와 출가시키지 못한 자식들 걱정으로 그 일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지독히 우상을 숭배했던 외가에서 들은 '환갑을 넘기지 못한다'는 소리 때문에 집에 계시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것도 매일 시장을 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 자식들은 오로지 우리들의 체면 때문에 늘 엄마께 시장 다니는 일을 그만두라는 항의를 하곤 했지만,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돌아가실 때까지 근처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집에서 놀면 뭐하냐는 것이 엄마의 유일한 변명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첫 장로인 남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시작한 어머님의 신앙생활.
물론 건강문제로 많은 연단을 받은 후에야 시작했지만, 여느 농촌교회가 그렇듯이 일할 사람이 많지 않기에 제대로 글자조차 알지도 못하지만 오랫동안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해야 했습니다. 주일날의 점심식사를 위해서 '어찌하면 적은 비용으로 어른들을 잘 대접할까'로 늘 고민했다고, 돌아가신 나중에야 다른 집사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생이었던 막내와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여섯째를 뺀 우리들은, 회갑 기념으로 외국여행이라도 보내드릴 요량으로 계를 만들어 돈을 모았던 그 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해 드리고 싶은 우리 칠 남매의 바램을 그대로 접어두고서, 그러니까 회갑일 석 달을 앞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답니다.
급작스레 가시기 위해서 신앙생활과 실생활을 그리도 바쁘게 사시고 준비하셨나 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일마다 전화했던 그 열심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오랫동안 주일마다 엄마께서 '띠기야'를 부르며 예배 참석을 독려하던 그 분은, 지금 집사님이 되셔서 엄마의 뒤를 이어 그 위치에서 고향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남편이 중병이 들어 자녀들 중 믿는 자녀들의 권유로 교회를 나왔지만, 남편 사후에는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더구나 지금 시무하시는 목사님께서는 차를 운행하시지만, 그 당시에는 교회에서 2Km 떨어진 마을에서 걸어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겠지요. 칠순의 나이에도 농사일을 거뜬히 하실 정도로 타고난 건강을 소유한 그 분. 자신 한 사람을 위해서 목사님이 차를 운행하시는 것이 미안해서 자주 걸어서도 교회에 오신 답니다. 그러면서 늘 웃으시는 그 분 안에는 제 엄마가 늘 있는 것 같습니다. 직접 기른 채소들로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더 연세 많으신 분들을 섬기는 그 집사님을 보면서 이제야 엄마의 신앙에 존경이 절로 됩니다.
너무 고단한 삶으로 예배시간과 조그만 여유에도 졸기만 하던 엄마께 저는 늘 불만을 토로했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배후에서 기도하며 격려하는 보통의 신앙적인 어머니를 기대하면서요. 그러나,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주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재의 우리들과 비하면 얼마나 실리적인 신앙을 하셨는지요. 지금은 장바닥에서, 버스 안에서, 들판에서, 자식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기도하셨을 어머니가 너무도 그립답니다. 그 분 앞에서 나의 신앙을 점검 받으며 지금의 내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 엄마의 기도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섬김과 봉사가 여느 교회보다 귀하고 소중한 미자립 농촌 교회에서, 어머니의 노력의 결실인 강건한 그 집사님을 보면서 내 어머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기에 고향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뜨거운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기에 집사님의 삶이 다할 때까지 그 귀한 섬김이 계속될 수 있는 건강을 주십사고 기도해 봅니다.
2003.07.09 18:59:17 (*.45.49.203)
고모 글 잘 읽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해외여행을 위해 돈을 모았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긴데 너무 안타깝군요. 요새는 누구든지 해외여행을 다닐 뿐만 아니라 유학간 자녀들이 있으면 이메일, 채팅, 전화 등으로 연락하기도 쉬운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다른 시대에 살다가 가신 것 같습니다. 만약에 1649가 있다면 엄마,아빠가 유학 시절에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축하 전화도 자주 드릴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