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여행 마지막 기행문이예요..
4일차
이번 아침도 역시 상쾌한 아침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몸은 가뿐하다만 내 몸이 의심이 될 정도로 너무 가뿐했다. 정말 이게 캄보디아의 상쾌한 공기 덕분인가? 도대체, 이 가뿐함은 어디서? 마지막 날이라. 시간도 정말 빠른 것 같다. 4일이라는 게 원래 짧은 시간이라 해도 이건 너무 짧다. 밥을 먹으러 나가기 전에 짐을 좀 쌌다.
와, 이 컴컴한 식당도 마지막이구나. 식당에 물병을 잔뜩-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병들을 총동원하여- 가지고 가서 슬쩍 슬쩍 한 통씩 채워나갔다. 오늘은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힘든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에 물을 꽉꽉 채워 가야했다. 식당에 카메라도 가져와 신기하게 생긴 과일들과 식당 내부 등을 열심히 찍어댔다. 끝내 매운 국수의 상큼한(;;쩝) 맛은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2일을 창가 쪽에 자리를 맡아서 우리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제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떻게 먹으면 맛이 있는지 알게 되었기에 오랜 시간을 음식을 담는데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에야 예희가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못내 아쉬워 하는 듯도 했다. 그럴만도 하지. 이 맛난 음식 먹을 기회를 놓치곤 이제야 그 기회를 잡았으니.
오늘도 비와 함께 하기로 했다. 정말 정말 갈 곳이 많았기에 어제 나가사키 아저씨가 알려주신 캄보디아식 샌드위치를 비에게 사달라고 부탁했다. 아아, 제발, 샌드위치야 내 입맛에 맞아주거라.
마지막으로 김갑수 아저씨와 함께한 후 20분 거리의 마지막 날의 첫 번째 목적지로 출발했다. 마지막 날이고 볼 것이 많아 빨리 일어난 탓에 20분은 캄보디아에 와서 최고의 단잠이었다. 사실 이미 오래된 옛날 일이라(;;) 마지막 날, 첫 번째 목적지의 자세한 부분부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따쁘롬은 캄보디아에 가기 이전부터 내가 알고 있었던 곳이었고 그만큼 기대도 되었다. 거대하고 웅장하고 그리고 정말 멋있는 뿌리를 뽐내는 나무가 있다. 사원의 건축물 위로 큰 키를 자랑하는 나무는 그렇게 멋있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겠지만 모두들 감탄을 하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많이 본 사진이다 보니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사진들과 똑같이 찍게 되었다. 아무리 나만의 사진을 찍으려 애써도 오히려 원래의 사진이 가장 좋은 이유는 무얼까.. 하여튼 이곳 역시 여기에 대한 역사적인 정보는 없었지만 그냥, 있는 자체가 아름다웠다.
따쁘롬을 보면서부터 어제의 끔찍했던 기억이 스믈스믈 기어나왔다. 그리고. 앙코르 톰을 보러 가자 이제는 따쁘롬이 정말 그리웠다.
앙코르 톰은 우리가 캄보디아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곳이다. 앙코르 톰이란 하나의 유적지가 아닌 성이라는 뜻의 톰이다. 하나의 큰 성인 셈이다. 그만큼 여러 유적들이 많고 다닐 곳도 많다. 비와 나중에 어디서 만날지 약속을 할 때 큰 곤란함을 심각하게 느꼈다;;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데 이 넓은 곳에서 어디서 만날지 어떻게 정하자는 거야!! 몇 번을 말해도 내 앞에 있는 문도 못 알아듣겠으니 어찌할꼬.. 결국에는 비도 조금은 답답하다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의사소통으로 말이 길어졌지만 차가 앙코르 톰 가까이로 가자마자 왜 사람들이 이렇게 여기를 오고 싶어하고 다시 보고 싶어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크기 안에 숨겨진 세심한 묘사들 하나하나가 또 다시 느껴 졌다. 가장 큰 곳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몇 번이고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사실 지금 한계를 느낀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시각은 이 여행을 간 지 3달도 더 된 시간일 뿐 아니라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각나는, 사실 정말 그런, 그 곳을 어떻게 지금 기억해서 쓴 다는 말인가.. 점점 더 글이 ‘급속도’로 짧아질 것을 예언하노라;;-
화장실과 큰 문 앞에서 모자를 쓴 사람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무얼 하나 자세히 보니 직접 온 사람의 수를 작대기로 긋고 있었다. 기계가 없어도 없다지만 이건 너무 확실치 않았다. 게다가 꼭대기에 있던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아까 체크를 했던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고 이 더위에 막노동을 시키는 걸까. 뭐, 현지인으로써는 이건 다른 직업과 별다를 게 없는 것이지만.-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유적지는 이해가 가도 도대체 화장실 가는 사람 수는 왜 세는 거야? 아예 돈을 내게 했으면 편했을 듯 싶다. 볼 일 보러 들어가는데 누군가 나의 발걸음을 듣고는 곁눈질로 슬쩍 보곤 내가 움직인 것을 체크하다니, 뭔가 부담스러웠다..
그 거대한 앙코르 톰의 감상평은 이걸로 막을 내리겠다;;흐흐 예희 또한, ‘또한’이 아니라 박예희라는 사람 답게 돌덩이만 또 무더기로 봤다면서 그다지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네 개의 문이 있는데 거기에 오자 비가 사진을 찍으라며 내려주었다. 와, 진짜 성격이 저런 건지 돈을 위한 행동인지. 그냥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먹고 살기 바쁜 현지인들에 대한 인식이 돈 중심이라니 안타까웠다.
그 다음은 쁘레야칸. 쁘레야칸도 큰 편이라 열심히 돈 후에 동문인가, 서문에서 만나서 비와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아침에 사 온 캄보디아식 샌드위치를 갖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음료수만 시켜서 먹었다. 비가 차 안에서 먹자고 했는데 차 안에서 먹었으면 더워서 찜닭과 돼지찜이 차 안에 가득할 뻔 했다. 원래 공기가 좋았지만 식당은-다른 모든 곳처럼-문이 없었고 선풍기를 틀어주었기에-또 캄보디아에 선풍기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sorry- 시원했다.
사실 샌드위치에게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완전히 굶을 작정하고 점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샌드위치와의 첫 만남을 가졌을 때야 샌드위치의 냄새를 맡고는 직감을 따라 크게 입을 벌렸다. 정말, 정말, 정말 맛있었다. 중국집에 단무지가 늘 함께 하는 것 처럼 샌드위치 옆에는 알 수 없는 정체의 야채들이 단무지 처럼 묶여 있었다. 어떻하노, 어찌 야채마저 맛있는게야? 여전히 캄보디아 만의 냄새는 났지만 그래도 내가 먹어 본 샌드위치 중에서 가장 개성있고-당연한 건가.- 맛있었다. 또 처음으로-마지막으로- 비와 함께 하는 식사였고 비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그제서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비에게 외국인 관광객들, 그의 손님들에게 아이스박스를 제공해 준다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 했다. 아는 분에게 모든 차에 아이스 박스가 있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아이스 박스가 없어서 그거 단 한 가지가 안타까웠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못 알아듣는 듯 하더니, 그제서야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에도 차 트렁크에 아이스 박스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말도 안 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트렁크에 놓고 있었다고 한다. 비가 지금이라고 갖다 줄까라고 하길래 그냥 웃으면서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지금은 무슨, 이제 마지막 날 조금 있다가 해가 질 건데.
나라는 사람의 배를 다 채울 정도의 양을 푸짐히 먹고서는 정말 정말로 아름다운 곳에 갔다. 지금까지의 유적지들과 많이 다른 곳이었기에 특별히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예희 말대로 돌무더기였었지만 니악뽀악은 물론 돌무더기가 있었지만 그 돌무더기까지 도달하는 길의 양 사이드의 물이 너무 이뻐서 더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돌무더기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3일 째 돌무더기만-본 돌무더기의 반만 쌓아 놔도 아마 비행기가 박을 거다- 봤으니 그 이상의 아름다움은 느끼기 힘들었지만 물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과 물이 비치는 큰 나무들의 모습이 정말 이뻤다. 정말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길도 엄청나게 길었고 다만 걱정 되는 것은 카메라의 밧데리밖에는. 그 많은 아름다운 경치들을 다 품고 싶은 욕심에 초보자 답게 별의별 이상한 사진을 조급한 마음으로 다 찍어놓으니 정작 나중에 사진을 정리할 때 보니 제대로 나온 사진은 단 1,2 사진들 밖에는 없었다.
여기 역시 다리로 오르기 전 수많은 상인들이 죽치고 앉아있는 곳이 있었는데 어떤 북을 가지고 원달러라고 외치더라. 아무래도 사기 잘 치는 사람들이 왜 이러시나. 나중에 산다고 갔더니 무슨 원달러냐며 6달러를 불렀다. 솔직히 발음이 안 좋았다고는 하지만 그 말이 원달라였던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저번 책자를 살 때 한 번 속아봤던 거였기에‘큰 어이없음’은 없었다. 원래는 북을 살 생각이었지만 여전히 그 사람들에 대한‘어이없음’이 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아저씨들, 그렇게 거짓말을 치니까 그냥 다 가잖아. 정직하게 좀 팔아봐.
사진으로는 못 남겼지만 지금도 가지고 있는 감동 만큼의 그 감동을 안고 차 쪽으로 향하는데-물이 있었기에, 나무로 둘러쌓였기에 땀과 함께 헉헉거리며 차에 오진 않았다- 우리 위대하신 동생님께서 나 쉬한다며 울상을 지으며 아빠와 함께 화장실에 갔다. 그 동안 엄마와 나는 먼저 차에 도착했고 밖에 쓰레기통 문을 연 채 쓰레기통에 푹 빠져서 물통을 찾는 애기가 있었다. 물론 이런 아이들을 방글라데시에서 그리고 수많은 사진들, 영상들에서 봤다만 이렇게 가까이 한 적은 없었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주은 물통을 들고 더운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엄마 옆에서 말로는 방글라데시도 저런 애들이 수백이라 했지만 나 역시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조금 확대되어- 물려받은 유전자 소유인으로써 너무 마음이 아팠다. 조금 뒤 예희가 소변을 본 얘기를 조잘조잘 했는데.. 그 내용이 생각이 안 난다..
더위는 안 먹었다만 여전히 더운 우리는 잠을 곤히 잤고 조금 뒤 아빠가 날 깨웠다. 방금 에어컨 바람에 적응되어서 푹 쉬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에서 나를 끄집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옆을 보니 예희는 골아떨어져있었고 차가 세워져있는 맞은 편에 또 다른 유적지인 쁘놈빠겐이 있었다. 예희가 너무 곤히 자길래 내버려 두고 잠깐 건너갔다가 왔다. 특별한 것은 없었고 원래는 산으로 올라가는 코스였는데 아예 입장을 금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코끼리가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산을 꽤나 타야하는지 평소에는 코끼리를 타고 가나 보다. 코끼리를 탈 수 있는 계단이 있길래 그것만 사진으로 담은 후에 바로 차로 돌아왔다. 역시나 예희는 코까지 골며 잘만 자고 있었다. 조금 뒤 예희가 일어났다. 잘자냐고 물어보며 우리 방금 전에 너를 버리고 잠깐 유적지를 보고 왔다고 말을 했더니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또 돌덩어리 봤어?’라고 했다. 확실히 어리긴 한가보다. 또 다른 명언 남겼다.
이제. 앙코르 와트다. 멀리서도 웅장하고 멋있어 보이는 이 것은 집에서, 문제집에서도 수십번은 봤던 모습이었다. 또 궁전이라고 건물까지 가는데 또 한 참 걸리는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조금 쉬고 가자고 했다. 사실 조금 걱정되긴 했다. 꽤 긴 여정일텐데 아직 시간대가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시간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비가 차에서 꺼내준 거대한 우산을 들고 나섰다. 아니,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주지 더위는 다 먹은 다음에야 아이스 박스랑 우산이 나오나. 빨리도 나온다, 참. 우산을 받아들고서도 도저히 눈에 뻔히 보이는 힘든 여정에 쉽게 내딜 수 없었다. 차에 내리자 마자 직원들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길래 의자를 하나 빌려서 앉았다. 고맙게도 기분 좋게 의자를 내 주었다. 나무 아래 한가히 수다를 떨며 앉아있는 모습이 주변의 시끄러운 관광객들만 없고 정자만 있다면 딱 우리 시골 풍경이었다. 아빠가 콜라를 사 오셔서 시원하게 들어 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빠가 내 옆에서 우산을 잡아주니 큰 그늘이 생기며 편안했다. 앙코르 와트 안쪽까지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큰 연못들과 호수가 있었다. 앙코르 와트를 둘러싸고 있는 호수라고 한다.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물 자체가 너무 아름다웠다. 건물 쪽으로 더 가까이 가자 연못이 나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한국에 와서야 읽어본 책에서- 예전에는 악어 몇 백 마리를 이 연못에 놓고 키웠다고 한다. 이유는 적들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 에잇, 치사해서 안 쳐들어간다, 안 쳐들어 가.
역시 건물들 중에서 부러진 것들도 있었다. 많이 안타까웠다. 누가 나보고 타임머신 타라고 하면 앙코르 왕조 때로 돌아다녀보고 싶다. 물론 악어한테 물리지 않게 타임머신이 날라 다닐 수 있다는 조건 하에.
건물들은 우리가 며칠 동안 본 ‘돌덩이들’과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거기인 만큼 그 아름다움도 모두 A급으로 거기서 거기였다. 봐도 봐도 나는 돌덩이 하나는 안 질리더라. 다만 앙코르 와트는 너무 많이 봐서 별로 감흥이 없었다. 건물 전체가 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이제까지 중에서 너무 담담하게 봤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치 우리 집 가구 찍듯이 한 것 같다. 정말 찍기 싫더라. 그래서 이 사진 초보가 어떻게든 다르게 찍어보려고 애를 무진장 썼다. 아까 그렇게 쉈는 데도 불구하고 다시 주저 앉아 버렸다. 오히려 다른 건물들이 배는 아름답더라. 돌덩이들과 밖에 있는 키 큰 초록 물체들은 끝내주게 어울렸다. 이 곳의 최고 경관은 뭐니뭐니 해도 ‘돌덩이와 초록이들’인 듯 하다.
들어가자 마자 그토록 기다리던‘우유 휘젓기’를 원없이 봤다. 너무너무 길어서 누구나 원없이 볼 수 있을 듯 했다. 처음 캄보디아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지겹게 들어온 곳이였다. 드디어. 원없이 봤다고는 하지만 사실 다시 간다면 다시 넋 나간 듯이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 세밀한 묘사들은 누구든지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 듯 했다. 한 편의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 병사들의 몸 짓, 얼굴, 왕, 동물들, 바닷 속, 신들, 특히 가장 재밌었던 마을의 풍경 등 모든 것이 두 입술을 서로 떼어내게 했다. 틈도 없이 빽빽하게 그려진 장면들로 사진의 한계를 느꼈다.-물론 내 실력 탓도;; 직접 가 보라니까, 이게 변명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될 거야- 그와 동시에 캄보디아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이 귀중한 작품들을 줄 하나 사이에 두고 관람을 허용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 안 있으면 입장 금지 시키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들도 있었지만 개념 없는 관광객들이 했을 법한 뻔한 자국들이 여기 저기 많이 보였다. 개념없는 사람 둘째치고 이렇게 허술하게 해 놓으니 계속 손상되지. 공사 도와주는 나라들도 똑같이 한심했다.
앙코르 와트도 앙코르 톰 못지 않게 규모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곳을 돌아보진 못했고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 길이 있는 곳을 찾아 요리조리 다녔다. 멀리서 보면 똑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섬세한‘우유 휘젓기’를 또다시 몇 번이나 감상하며 드디어 꼭대기로 갔다. 줄을 서서 위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우리가 여행을 준비하며 블로그를 볼 때 까지만 해도 이 높은 곳을 기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신에게 더 가까워진대나 뭐래나. 지금은 양 옆에 손잡이라도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서도 죽을 것 같은데 기어 올라가기는 무슨. 블로그를 보면서 나왔던 괜한 자신감은 어디가고 쪼그라 든 다희 쥐만 보였다.
맨 꼭대기라서 여기서는 바지 길이 검사를 했다. 아까 한창 바지 검사한다 했으면서 안하냐며 땀으로 젖어있는 바지에 불평했는데 너 한 몫 했다, 야.
저번에 엄마가 그랬다. 더위 먹었던 날, 다희야 이렇게 힘든데도 다시 한국가면 여기가 그렇게 그립고 생각 난대. 어, 응.. 아름다운 건 아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 사실 앙코르 톰, 앙코르 왓에서 걸을 때는 내내 절대 기억 안 할 거라며 ‘앙코르’랑 싸웠다. 하루에 몇 번이고 생각이 바뀐다. 평지에 내려가면 기억 날거라고 인정해 줄게.
적혈구 거의 죽어나갈 즈음, 숨통이 트였다. 맨 꼭대기가 이 맛이구나. 밖이 보이는 곳으로 갔더니 호수부터 시작해서 잠시 쉬어 갔던 건물 까지 모두 보였다. 정말 멋있었다. 이 것 또한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그래도 이건 한국에 돌아와서 사진 블로그들을 본 후에 사진의 한계가 아닌 ‘박다희 사진’의 한계라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나를 분노하게 하는 자는 또 다른 개념 없는 관광객들의 행적이었다. 계단에서 올라와 모든 사람들이 지나치는 길목에 있는 기둥의 낙서는 속을 메스껍게 했다. 그 사람들을 당장 불러서 중 3과의 진지한 면담을 제공해 주고 싶었다. 구석에 꼼지락 꼼지락 써놓은 것도 있었고 대문짝하게 기둥 반 이상을 다 차지한 大무개념 낙서도 있었고 언어 또한 다양했다. 지금까지 한글이 그렇게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God bless you’도. 하긴, 이걸 보고 혀를 차며 교훈을 얻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실지는.
꼭대기 층도 생각보다 정말 컸기에 오랫동안 그 위에서 구경을 하다가 내려왔다. 내려올 때 풀린 나의 다리 나사란..
오랜 시간을 후덜후덜 내려오면서 보니 아래서 압쌀라 댄스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후들후들 떨면서도 사진을 찍어 놨더니 아래 내려와서 우리가족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압쌀라 댄스 추는 여자들 사이에서 압쌀라 손 모양을 한 후 몇 컷을 남겼다. 바로 옆에서 본 압쌀라 동작은, 와, 짱이었다. 관절을 확인해야 할 듯. 그리고는 우리에게 돈을 요구했다.
시간이 거의 ‘마법의 시간’이라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아래에서 이 초보 사진가께서는 찍고 또 찍고를 무한 반복 하셨다는..
드디어 앙코르 왓을 모두 본 후에 내려 왔다. 그리고 다시 연못, 호수를 거쳐 가는 길은 캄보디아에서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우산에 가려서 잘 못 보긴 했지만 그래도 그 강렬한 햇빛을 막아 줄 회색 우산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앙코르 왓을 끝으로 하루의 피곤과 앙코르 유적지는 모두 다 봤다. 사실 중간 중간 번뜩 예희와 같은 ‘언제까지 이 돌덩이들을 봐야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것도 많았다. 특히 유적지 마다의 해설이 없으니 특별히 아름답지 않으면 같은 돌덩이를 보는 것 뿐 더 이상의 가치는 더위 먹은 내 머리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등 지고 있으려니 섭섭하다.
아직 예상한 시간보다 많이 남아서 비가 악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와! 사실 무서웠지만-..- 진짜 악어를 본다니 들떠서 가는 내내 편안히 앉아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사실 너무 많이 걸어서인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 기대는. 악어 앞에서 무너졌다. 아, 악어는 맞는데 혼 없는 악어였다. 음.. 그.. 그래요.. 마음에 드네요.. 뭐, 악어랑 아이 컨텍트 까지 했으니 후회는 없다.-사실 매장 곳곳에 있는 악어는 볼 때 마다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비싼 정도에 해당 되는 악어 가죽 매장이었다. 사실 우리가 가져온 돈을 탈탈 털어도 안 될 것들도 넘쳐났고 심지어 기념품으로 하나 사자라며 마음 가볍게 집어 든 열쇠 고리 마저도 몇 만원이었다. 답답하고 어이가 없더라. 거의 손님의 90% 외국인 관광객일테지만 밖에서는 죽으려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 곳 사람들로 치자면 몇 년은 살 수 있는 생활비의 물건들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시장 돌아다니 듯 구경만 한 후 나왔다. 이럴 때 손님이 물건을 사면 커넥터 역할로 운전사도 돈을 받는다고 한다. 좀 기분이 나쁘더라. 비가 별로 탐탁지 않게 보였다.
그러고는 그 길로 비네 집으로 갔다. 어제 밤에 기분 좋게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곳이었다. 우리는 현지인의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정말 들떴다. 비네 집에서 비네 엄마가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고 그 뒤로 집이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비네 막내 동생은 부끄러운 듯 엄마 뒤에 쏙 숨었다. 아들이 7명인 만큼 나이차도 많이 났는데 막내는 7살이었다. 와,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런데 여느 한국 아이들 못지 않게 너무 이쁘게 생겼더라. 손톱만큼도 거짓말 치지 않고 진짜 모델감이였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내 모습을 찍으려 하는 이상한 누나로 보였나.. 숨지만 않았으면 얼굴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
비네 가게에서 몇 가지 캄보디아 과자를 사려고 했더니 캄보디아 과자는 없다고 했다. 거의 대부분 외국 과자들이었다. 결국에는 외국에서 수입해 온 것 하나와 힘들게 찾아낸 진짜 캄보디아산 과자를 샀다. 그 때부터 이걸 먹겠나 싶었는데 예상대로 아직 선반에서 곪고 있다.
축구하러 나간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비네 가족과 인사를 한 후 드디어.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러 갔다. 캄보디아의 마지막 식사는 다름 아닌 북한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외국이라서인지 그래도 북한 식당이라는 단어가 매우 생소하게 들린다.
원래 도착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시간을 맞춰야 했던 이유는 공연에 있었는데 북한에서 우리나라로 치자면 인턴으로 온 사람들이 7시부터 매일 공연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모두 공연에 맞춰서 오는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에게 어서 오시라고 외치며 거울 앞에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많이 놀랐던 게 물론 모두 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다 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였다. 우리나라에도 미인들은 많다만 여기는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아무튼 자리를 잡아 앉았더니 곧이어 그 중에서도 가장 이쁘장하게 생긴 언니가 와서 인사를 하며 식탁을 차려주었다. 이름이 봄이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중에서 들어준 이름 중 가장 이쁜 이름 중 하나였다. 요즘 고유어 이름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또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공연을 시작안하길래 물어봤더니 단체 손님이 늦으시는 바람에 늦게 되었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이럴 거면 먼저 나이트 마켓부터 갔다 올 걸.. 지금 가기에는 언제 공연이 시작할 지도 모르고 시간도 어중간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우리끼리 먹기 시작하고 공연을 시작하는 대로 보기로 했다. 메뉴판을 펴고서 아빠는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백김치 하나에 열광을 하고 빈대떡이 없다는 말에 실망을 하고. 하긴 한국에서는 더 이상 아빠가 어렸을 때 접하던 북한음식을 접하기 어려우니 이해가 됐다. 캄보디아는 아빠를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와야 될 듯싶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흠칫 했지만 맛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 하에 마음 편히 시켰다.
손을 씻으려 바깥에 있는 화장실으로 향하는데 밖으로 나오자 마자 서둘러 되돌아 나왔다. 캄보디아로 오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인, 나를 무섭게 한 그 분, 바로 도마뱀님.. 이미 방글라데시에서도 몇 번의 만남을 가졌기에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화장실으로 들어가는 옆 벽에 있는 것은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에서 네 마리 정도였다. 밖이 이 정도면 세면대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저 속은 어느 정돌까. 돌아와서 도마뱀이 있었다고 난리를 쳤더니 옆에 있던 봄이 언니가 웃으며 침대에까지 도마뱀이 있을 정도로 거의 같이 산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꽃단장을 할 동안 봄이 언니는 우리 테이블 쪽으로 와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여전히 북한 사람이 내 옆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엄마아빠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 멍하니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도덕 시간에 귀가 터지도록 들어왔던 것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물어봤다. 봄이 언니가 북한 예술 어쩌고를 나오고 여기까지 나온 것을 보니 중류층 정도는 될 것을 감안해서 남한 드라마나 노래들 듣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이미 교육을 받고 왔을 테니 적어도 하나쯤은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때 앞에서 ‘어, 이상하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는데..’라고 했는데 내가 말하고 나서도 봄이 언니의 표정과 함께 실수했구나 싶었다. 그러고는 언니가 북한에서는 북한 남한이라고 부르지 않고 남조선 북조선이라고 부른다고 말해줬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봄이 언니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되도록 말을 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실수를 한 듯 했다.
음식이 조금 걸리길래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 주제가 우리 할아버지까지 갔다. 할아버지가 예전에 북에서 내려오셨고 큰 할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등등 말을 했더니 언니 얼굴이 급격하게 바뀌더니 네,네,라고 대답을 하고는 음식을 가지러 갔다. 우리끼리 조금 잘못했나, 북에서 모두 교육을 받고 왔겠지라고 했다. 이게 남북한인의 한계구나 싶었다. 그리고 통일이 된 후에도 책임져야될 문제 중 하나고 말이다. 언니에게 통일을 원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제 생각난다.
반찬이 놓이는 순간부터 아빠, 물론 우리의 감탄은 끊이지 않았다. 내가 먹기에는 물김치는 그냥 그랬지만 아빠는 모든 음식을 맛보며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과 똑같다며 점잖은 흥분을 했다. 그 뒤를 이어 물냉면, 만두, 칼국수, 생선. 많은 메뉴들 중에서 힘들게 고른 이 음식들을 맛나게 먹어드렸다. 특히 물냉면 그리고 생선. 아니아니. 그냥 다 맛있었다. 이제는 나도 흥분을 해서 먹고 있을 때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우리가 그제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체 손님들이 왔다. 아무래도 식사를 빨리 끝내고 가도 시간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몇 번이나 언제 시작하냐고 물었다. 단체 손님의 식탁에 모든 준비가 되고 우리가 식사를 모두 마쳤을 즈음에야 우렁찬 소리로 시작했다. 사실 공연의 첫 음은 내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보컬과(?) 피아노, 드럼으로 시작했는데 피아노 소리는 묻혀버렸고 쩌렁 쩌렁 울리는 마이크와 높고 큰 목소리, 그리고 ‘때려치는’ 드럼 소리가 더해져 한동안 귀가 멍했다. 사실 드럼이라고 하면 밴드의 멋있는 기타소리와 알맞은 소리라고 들리지만 어린 아이들 악단의 큰 북과 별 다름 없었다. 여자가 친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우렁찬 드럼 소리에 넋을 빼고 있을 즈음에 다시 내 눈을 자극했다. 듣고 사진으로는 보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끔찍하다고 느꼈던 동영상 안의 아이들의 표정보다는 덜 했지만 훨씬 더 ‘전문적인 표정’으로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지껏 우리가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쾌활했기에 그 충격은 조금 덜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표정하나는 충격 그 자체였다. 모두들 실력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지만 크게 왜곡되고 한계가 있는 공연이라 마음 편히는 보지 못했다. 단순한 노래들 외에도 간단한 몸짓들이나 나중에는 여러 명이서 올라와서 춤을 추기도 했고 봄이 언니가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가야금도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예쁘게 옷을 차려 입으니까 진짜 선녀더라.
단체 손님들 중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관광지를 막 보고 와서인지 누가 봐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더니 탈이 났는지 밥도 먹지를 못했다. 옆에 보고 있던 언니들 몇 명이 직접 가서 열도 제 주고 어디 아프냐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었다. 처음에 가서 머리도 만져주고 친절하게 물어봐줄 때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풍경이었기에 이상하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선녀에 둘러싸 나무꾼 같았다. 여전히 그 아이의 꾀병이 의심된다.
거의 공연의 막바지에 도달했지만 이미 많이 지체된 시간 탓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예희가 계속 봄이 언니가 이쁘다고 하며 좋아하는 듯 했는데 언니에게 인사를 못 하고 가서 서운하다고 했다.
든든하게 몸보신을 했으니 서둘러 다시 나이트 마켓으로 갔다.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차를 타고 시장들을 지나치며 엄마 아빠는 시장이 이렇게 큰 줄을 몰랐다고 했다. 이제 아셨나요, 저 큰 시장 중에 한 줄을 보는 데에도 몇 시간을 고심해서 좋은 쇼핑한 우리의 모습을. 그렇게 생각해 보니 확실히 이 시장이 크긴 크다. 한 줄 보느라고 엄청 고생했는데.
비가 데려가는 곳으로 갔다. 비에게 저번 일을 얘기해주며 흥정하는데 이미 지쳤다고 했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이 곳 사람들은 모두 그런다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직 선물을 거의 사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뭘 살까 고민한 후 비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구입하기 시작했다. 비 덕분에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흥정은 계속됐다. 기나긴 흥정 끝에 커피, 귀걸이, 팔찌, 모빌, 필통 등을 구입했다. 그제 산 팔찌들이 있지만 다시 돌아다니면서 너무 이쁜 게 많아서 싸게 많이 샀다. 다행히 흥정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뒤늦은 비의 발언. ‘은 다 가짜예요.’ 아닛. 물론 검은 게 의심되긴 했다만 우리 너무 순진하게 속은 거 아닌가. 어떻게 의심할 생각조차 안 했지?
왜 그 때 은이 아니라는 걸 말 하지 않았냐는 추궁에 말 하면 다 알아들으니까, 아는 사이기도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하긴 뭐. 그래도 모양이 이쁘니 봐주마.
아닛. 분명 비는 나이트 마켓과 공항이 약 30분은 잡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몇 번 꺽어서 달리더니 도착했다. 아직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공항에 늦을까봐 제대로 쇼핑도 못 했는데. 엄마가 비에게 liar!!(조금은 무례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보면 그 것 외에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자 밀릴 줄 알았다고 했다. 음음. 우우. 으악으악. 조금 더 쇼핑하고 싶었는데. 공항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가는 유적지 마다 차 바로 앞에서 팔던 아이들 손 위의 엽서들이 생각났다. 아 이런. 사려고 했는데. 무시하고 불쌍하다고만 하지 말고 미리 좀 살 걸. 그 외에도 사지 못 한 것들이 생각이 나서 계속 후회를 했다.
마지막으로 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엄마 아빠가 다시 예수님을 믿으라고 지져스 지져스 해대니 그제 그렇게도 못 알아듣던 분께서 한 번에 알아듣더니 믿는다고 합니다. 아, 소통을 위해 열심히 몸을 움직였더니 효과가 있긴 있구나. 비가 태워준 외국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그들 영향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엄마아빠가 비에게 영어 공부나 캄보디아 글씨 공부 등을 더 꼼꼼히 해서 좋은 가이드가 되라는 ‘잔소리’ 끝에 인사를 했다. 서로 별 몸짓 손짓 발짓을 하면서 이틀 동안 안전하게 데려다 준 비한테 정말 고맙다.
공항에서 다시 빠진 물건이 없는지 체크를 했다. 빠진 물건이 있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겠지만. 후회를 그만 하려 했지만 누울 곳도 없는 이 작은 공항에서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이 시간들을 쇼핑하며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며 가을 옷들을 꺼내 입었다. 처음 온 날에는 우리가 적응 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더운 거였는지 더위에 익숙해진 건지 가을 옷을 입고도 덥지 않았다. 가을 옷을 입으니 벌써 캄보디아를 떠난 느낌이다. 공항은 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든다. 몸은 그 곳에 있었지만 졸린 탓이었는지 마음은 공중에 떠 있었다. 고생하며 즐기며 지냈던 시간들이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니 깨울 수도 없었다. 그냥 여기에서 있었으면 했다. 방글라데시나 미국에서는 가족 본 다는 생각에 빨리 가고 싶었지만 지금이야 가족도 옆에 있고 한국 음식이야 여기서도 실컨 먹어서 공중에서 어딘가로 착륙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긴, 피곤한 몸을 얹힐 내 침대와 찬 바람이 그립긴 했다. 탑승 시간이 다 되 가자 원래부터 모든 지역을 수다로 매우고 있었던 한국인들이 더 많아져 거의 내 몸 반 이상은 한국에 이미 착륙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아이들에게 줄 내 가방 속 가위를 뺏긴 이후 처음이었다. 삐! 응? 또 무슨 일이야? 뭔가 해서 잘 찾아봤더니. 아니 이런. 우리가 점심 때 우걱우걱 처음으로 맛있게 먹은 캄보디아 음식이 그 속에 있었다. 너무 아깝다며 그냥 봐주면 안 된다는 듯이 바라봤다.-사실 방비도 너무 허술해서 오히려 기계가 작동하는 데 놀랄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맛있는 샌드위치를 꽉 찬 뱃 속에 평양음식과 함께 소화를 시켰다. 아까 옮길 것도 없다고 하더니 잘-됐다. 비행기에 싣는 가방에 넣었으면 삐-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번에는 비행기에 넣었으면 썩었을 거라는 위로를 했다.
밖으로 다시 나와서 본 공항은 여전히 작았고 비행기도 그대로였다. 암, 그럼 그렇지. 내가 너에게 기대를 걸었겠니. 비행기에 들어가니 이제는 정말 마음이 편해 졌다. 캄보디아로 올 때 탔던 비행기를 같이 탔고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몇 번 만났던 사람들이 비행기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히히 반가워요.
앉자 마자 바로 잘 준비를 했지만 예희가 좀처럼 잠들지 않는 바람에 맨 정신으로 눈만 감은 채 잠을 불렀다. 겨우겨우 잠이 들고 다운진을 갈 때 생긴 습관인지 한국에 거의 다 와가니 저절로 깼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주는 캄보디아의 저주인지 깬 뒤부터 한국에 비행기 바퀴를 굴릴 때 까지 귀가 죽을 듯이 아팠다. 왕복 모두 캄보디아의 저주라도 되나. 비행기를 다시 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기 발가락이 다친 날 이외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아팠던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몇 초간 떠올랐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한국에 오니 캄보디아에서의 피곤이 다 쌓이는지 피로와 같이 겹쳐서 한국에 들어오며 쓰는 종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는 코트를 꽁꽁 싸매고 내렸다. 너무 피곤해서 차가운 바람이 내게 왔을 때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권과 카드가 없어졌다며 길바닥에서 한 바탕 소동을 버리고선 가방 안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는 카드를 가지고 지하철을 탔다.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자 이른 출근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학생들도 몇 보였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부르셔서 나 혼자 잠깐 수업을 빼먹는 그 느낌?
세트로 구입한 4개의 밀짚모자와 겨울 코트들의 조화는 끝내줬다. 매서운 추위 가운데 편안한 휴식을 보는 듯 했다. 하루를 준비하려는 직장인들에게 여행가방 위에 올려진 밀짚모자는 천국처럼 보였을 것이다.
밖에 오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눈이 반갑다. 말 그대로 극과 극을 다녔다.
택시를 어떻게 어떻게 타서 어떻게 짐을 다 내리고 집에 도착해서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 것 까지는 기억이 나고.. 그리고.“다희야, 라면 먹어.” 정신이 번뜩 들더라. 나 아무래도 동남아에서는 오래 못 살 것 같다.
예희는 학교 특기적성이 있어서 몇시간 못 자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예희 대신 오동통 면발을 즐겼다.
이번 우리가족 첫 번째 해외여행은 너무 멋졌다. 처음부터 보는 안목을 너무 높여놔서 다음 여행지가 마음에 안 들까 두렵긴 하다만. 방글라데시에서 느껴본 감정들을 다시 되살아나게끔도, 돌에 빠져서 넋을 놓고 더위를 먹어서 죽으려고도 하고. 많은 것을 얻었다. 엄마가 말한 말이 맞았다. 이 기행문을 끝낸 오늘. 사실대로 말하자면 7월 17일. 세세한 기억은 아니더라도 그 곳에서 느꼈던 모든 느낌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오랜만에 기행문을 완성해서 그런지도.-
역시 박다희~~!!
조금 있다가 꼭 읽어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