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탓에 오늘에야 3일차 완성이네요;;
3일차
아빠가 바쁘게 움직이는 기척에 잠이 깼다. 역시나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몸이 상쾌한 이유는 샤워한 물 때문? 아니면 공기가 좋아선가? 아빠가 옆방으로 가서 씻는 동안 엄마가 깼다. 아빠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시자 내 인생 15년 동안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희 아빠, 내 팔 좀 만져봐. 예희가 이불 발로 차서 밤새 추워서 떨었어. 팔이 송장같이 차가워.” 말투나 말의 내용 보다 목소리가 더 가관이었다. 같이 살면서도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참, 엄마도 대단하지. 그러고는 예희에게 짜증을 부린다. 목소리만 들으면 앤 줄 알겠네.
오늘은 준비를 좀 한 후에-적어도 어제처럼 호텔 슬리퍼를 끌지는 않았다- 아침을 먹으러 갔다. 호텔 식당은 어제와 특별히 다를 건 없었고, 여전히 불은 껌껌했다. 메뉴에서의 변화는 베이컨이 나왔다는 것 하나. 베이컨도 참 오랜만이다;; 베이컨은 다른 고기들이나 계란처럼 태우진 않고 반대로 덜 익혔다. 사람들이 나중에 다 빠져나간 후에야 느긋하게 구워줘서 바삭바삭한 베이컨을 즐길 수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캄보디아인의 그 느긋하던 성격들이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성격인 ‘대충대충 때우기’로 바꿔졌나?
오늘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아침을 먹었다. 확실히 밝았고 아침이구나라는 생각과 조금 더 정신이 반짝 뜨인 채로 먹을 수 있었다. 호텔 뒷부분에 수영장이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바로 바깥은 흔들의자도 있었다. 내일은 아침에 식당에 카메라를 꼭 가져와야지. 어제 먹었던 맵다디 매운 국수가 자꾸 생각나서 바로 국수를 받으러 갔다. 어제 얻은 교훈에 맞춰 냉이를 정말 정말 정말 코딱지 만큼 넣었다. 하지만 냉이를 너무 조금 넣었는지 국물 맛 밖에는 나지 않았다. 다시 가서 냉이를 넣었다. 어라? 그런데도 맵지 않았다. 맵다기 보다는 조금 이상한 맛이 났다. 그 다음에는 국물을 넣으러 다시 갔다가 또 다시 냉이를 넣으러 갔다. 아무래도 냉이가 어제와 맛이 달랐다. 그 자극적인 맛에 비교가 안 되니 그 냉이가 계속 보고파 졌다..
아유, 박예희 어제는 그렇게 안 먹더니 오늘은 잘만 먹네. 우리는 자리 잘 잡았다는 베짱(?)으로 약 1시간을 여유롭게 아침밥과 함께 즐겼다.
소화를 시키며 짐을 싸서 나왔다. 자, 이제 둘쨋날 시작이시로다! 첫 번째 목적지는 우선 글로벌까지 튼튼한 다리로 행진하기! -사실 1KM도 안 되는 거리다- 우리는 캄보디아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미 오래 살았다 듯이 당당하게 무단횡단을 했다. 대단하다! 아직 1KM도 걷지 않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벌써 힘들다며 땀을 흘리고 있는 날 볼 수 있었다. 글로벌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선풍기 바람을 쐤다. -얼마나 많이 왔다고 벌써 당당하게 사무실에 박차고 들어간다- 우리가 사무실에서 벌써 힘을 빼고 있는 동안 엄마아빠는 김갑수 아저씨와 또 다른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기에 이제는 시원한 선풍기 바람마저 지겨워서 일정을 ‘엿’들었다. 오늘의 계획은.. 어제와 비교가 안 될만큼 갈 곳이 많았다. 오늘은 날씨도 더운데 이 만큼 계획이 많으면 어떻게 다 소화해 내지? 내심 ‘정말’걱정했다. 나는 추위는 잘 견디지만 더위라면 질색을 한다. 겨울이라면 이불만 돌돌 덮어쓰면 되지만 여름에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계획을 모두 끝낸 후에 김갑수 아저씨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건 후 몇 분 후 봉고 크기의 꽤나 좋은 차가 글로벌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어느 아저씨가 내렸는데 지금까지 봤던 캄보디아인 중 가장 멋쟁이였다. 아래 위로 정장을 빼 입고 당당하게 걸었다. 솔직히 조금 웃겼다. 키키 어쨌든 그 아저씨가 우리의 새로운 하루를 책임져 줄 운전기사였다. 그 아저씨에게 모든 일정을 말해 준 후 아저씨 차를 타고 출발했다. 찌는 더위 속에서 차 안의 에어컨은 천국이었다. 아저씨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키는 우리를 이상하게 봤다. 마치 외계인 처럼. 많은 외국인들을 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추위’에 에어컨을 키는 사람은 아직 신기하나 보다. 아저씨는 영어를 꽤나 잘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발음을 극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이 발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차 소리가 꽤나 컸기에 운전석에 있는 아저씨의 목소리 마저 잘 들리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뒷 자리의 첫 번째 좌석에 앉았는데 의사 소통이 안 된다며 두 번째 좌석에 앉은 나까지 끌어들였다. 운전사의 이름은 ‘비’이고, -벌의 영어 단어인 bee가 맞다;;- 나이는 27살이다. 꽤나 동안이로다. 가족사를 물어보니 6명의 아이들이라는데 아저씨까지 포함해서 모두 ‘형제’란다. 여자는 오직 엄마 뿐. 엄청났다.
조잘조잘 얘기를 하다 보니 첫 번째 장소에 도착했다. 첫 번째는 티켓을 사는 곳이었는데 유적지에 들어갈 때 마다 매번 돈을 내는 대신 며칠 치로 나누어져 있었다. 몇 개를 가던 얼마나 많이 가던 상관 없이 날 당으로(?) 돈을 내는 방식이었다. 비 아저씨 덕분에 의사소통이 편하게 끝났다. 사실 어제는 유적지를 안 갔기 때문에 돈을 절약했다며 좋아하며 2일 치를 샀지만 정작 물어보니 3일치와 2일치의 돈은 똑같았기에 돈 아낄 수 있던 기회는 다 갔다;; 이럴 거면 어제 유적지 봐도 됐잖아!!
티켓을 산 뒤 일정에 계획된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가는 동안 아저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려 내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여전히 의사소통이 쉽지 만은 않았다. 갑자기 아저씨가 창밖을 가르키며 저기를 보라고 했다. 이미 지나간 오토바이 위에는 돼지 두 마리가 얹혀져 있었다. 돼지 두 마리를 줄로 꽁꽁 묶어놓은 채로 신나게 달리고 있는 오토바이를 잽싸게 사진에 담았다. 이 카메라 아니였으면 클로즈 업이 안 돼서 그 웃긴 광경을 담을 수 없었을 거다.
쁘레야꼬라는 곳에 도착하자 드디어 아이들이 몰려왔다. 드디어 라는 의미는 어제는 이런 유적지에 간 것이 아니기에 잡상인인 아이들이 없었다. 이제 하루 종일 이 아이들이 몰려다닐 거다. 차가 주차장으로-주차장이라기 보다는 유적지 주위로- 아직 멈추지 않은 차 주위와 차 문에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티비의 다큐멘터리나 책에서 너무나도 많이 접해 봤던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장면이었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예희는 꽤나 겁에 질린 듯 했고, 나 또한 그냥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꽤나 끈질겼고 만약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더 물고 늘어졌다. 특히 관심 없는 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큰일 나는 이유는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멀리서 보고는 다 달려오기 때문이다.
정작 내리고 유적지를 보러 가까이로 갔지만 미리 준비해 둔 정보가 없어서 그냥 아름답다라고 대뇐 후 왔다. 어제 같은 경우에는 박물관 안에 레코드 시스템이 되어있었고 와뜨마이는 주변의 가이드 뒤를 따라다니며 들었다.-사실 별 다른 정보가 없어도 기본 지식가지고도 구경 가능한 곳이었다.- 또 톨렌샵에서는 가이드를 김갑수 아저씨가 대신 해 주셨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자유 여행을 하는 우리는 정보에 대한 별 준비 없이 왔기 때문에 쁘레야꼬에서 나오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몇 가지 물어보기만 했다. 솔직히 어제와 마찬가지로 별 준비 없이 ‘돌 덩어리’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진짜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얻은 정보라고는 첫 째날 박물관에서의 것 밖에는 확연히 생각나는 것도 없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는 것은 사진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가슴에도 담고 왔다.
그냥 외형만 단순히 소개하자면 쁘레야꼬는 앞에 큰 돌덩어리 3개 뒤에 큰 돌덩어리 3개가 있었다. 그 돌덩어리들이 무엇인지 조차도 몰랐지만 돌덩어리에 묘사된 그림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웠다. 뒤쪽으로 가보니 또 작은 돌덩어리가 있었다. 여긴 제단인가? 캄보디아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나무들이 멀찍멀찍 키가 훤칠히 커서이다. 우리나라처럼 쪼매난 나무는 구경조차 힘들다. 모두 2층 건물은 훌쩍 넘는다. 그만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나무들은 어디나 2,3층 건물들의 창문을 넘어서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입한다. 총 6개의 돌덩어리 탑 뒤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앞으로는 약간의 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직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유적지 1개도 다 보지 못했는데 벌써 덥다니, 오늘 정말로 걱정된다.
이 더위를 없애기 위해 새로운 모자를 사러 앞쪽의 가게에 갔다.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잡상인들이 모여 있었다.-잡상인들의 평균 나이는 따질 수가 없다. 어린아이, 중 고등생, 20대, 30대, 40대까지 다양하다.- 한 잡상인에게 다가가서 모자를 보자고 했더니 주변에 있던 모자 파는 잡상인들이 모두 붙었다. 저쪽에서 달려온 잡상인들이 촌스러운 모자를 내밀며 “오빠, 이뻐요. 모자 달라요.”라며 했지만 어제만큼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심지어 나에게 아줌마라고 하는 ‘언니’도 있었다.-나보다 몇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모자 구매에는 실패한 뒷 차를 타러 갔다. 아저씨가 우리가 오자 알아서 차를 빼서 문을 열어줬다. 무슨 왕족이 된 느낌이었고 조금은 노예 제도가 생각나서 미안하기도 싫기도 했다. 진심으로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돈 많은, 캄보디아 종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아저씨보다 난 띠 동갑을 넘어가는 나이차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주인 모시듯 해서 불편했다.
한국에서 몇 주 전부터, 비행기 안에서, 호텔에서, 차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엄마가 적어 온 유적지 이름을 좀처럼 많이 본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적지 이름은 어려웠다. 그 다음 곳은 빠꽁. 여기는 그나마 쉽네. 빠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후다닥 달려들었다. 원래는 무시하고 가려고 했지만 우리가 찾는 모자라는 물건이 있었기에 모자를 찾았다. 특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냥 쓸 만한 깔끔한 모자를 선택해서 샀다. 어제 지겹게도 흥정을 해 댔지만 또 흥정을 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 흥정 덕분에 싸게 샀다. 나랑 아빠는 새로 산 모자로 잘 썼지만 예희는 한국에서 사온 야구 모자를 쓰고 힘들게 다녔다. 이러니까 집에서 밀짚모자를 가져오자고 한 거지. 밀짚모자 가지고 왔으면 이런 흥행은 안 해도 됐을 텐데. 하지만 한국 공항에서 겨울바람 속에서 밀짚 모자를 들고 돌아다니는 우리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것 또한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모자 잡상인 외에도 거기에는 야자를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끔찍했던 건 그냥 야자만 가지고 다니면 될 걸 큰 칼과 함께 가지고 다니면서 야자를 툭툭 치고 다녔다. 정말 무서웠다. 얼굴과 행동은 다르다더니, 설마 그 선량한 얼굴로 칼로 사람 치려고?? 그.. 그러지 마요..
모자를 머리 위에 얹은 후 역시나 돌로 되어있는 문을 통과해서 빠꽁까지 향하는 길을 걸었다. 캄보디아에 오기 전 이미 한국에서 다 인터넷으로 봐 놓은 거리의 악사는 빠꽁에도 있었다. 빠꽁은 확실히 쁘레야꼬 보다 훨씬 더 컸다. 큰 만큼 우리가 걸어야 하는 거리는 더, 더 길어진다. 쁘레야꼬는 몇 발짝만 걸으면 됐었지만 빠꽁은 위로도 앞으로도 걸어야 하는 거리가 상당했다. 그 탑(?) 위로 ‘기어’ 올라가니 벌써 땀이 흘러내렸다. 빠꽁에서 다시 한탄을 해야 했던 일은 부실 공사였다. 공사라기보다는 부실 복원. 캄보디아에서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도왔는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화재들인 각각의 돌들에는 숫자나 철이 찍혀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의 낙서도 없진 않았다. 전 세계에서 보호해야 할 유물을 모두 나서서 망가뜨리면 이건 캄보디아 잘못이 아닌 주변국과 이 일에 동참한 모두의 잘못이다.
너무 더워서 빠꽁의 꼭대기에 점만 찍고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몇 발짝만 움직여도 뜨거운 햇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여러 나라의 여러 인종들이 쉬고 있었다. 이런 유적지 안에는 보통 현지인이 없다. 현지인은 문 앞에서 들어가는, 나오는 관광객들을 공략해서 물건들을 판다.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우리 옆에는 현지인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몇 살 더 적을까? 갑자기 엄마에게 꽃으로 만든 반지를 주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만들어 주던 그 꽃반지였다. 갑자기 많은 만화책에서 봤던 광경이 생각난다. 무언가를 공짜로 해 준 뒤 돈을 요구하는 장면. 설마 그 장면이 이 장면? 엄마에게 걔가 돈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래? 하며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그 꽃반지를 도로 주었다. 아마 그 걸로 많은 사람들에게 들이대나 보다. 조금 미안했다.
역사적인 정보들은 모두 무시한 채 여러 군데 사진을 찍어대며 유적지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아래로 내려오니 땀이 조금 식었지만 아직도 덥긴 마찬가지였고 아직 걸어야 할 곳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산책 정도로 뒷길을 걷다 보니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과 다를 것은 없었다. 하나같이 교복을 차려입고 있었고 여느 남자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교복의 더러워진 부분들이 보였다. 자전거를 직직 끌고 흙 길을 걸으며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몇 천번은 더 많이 본 외국인일 텐데 늘 신비롭나보다. 나도 당신들이 신기하답니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진 마세요.
뒤 쪽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간만에 맘에 드는 사진 한 장을 포착한 후 다시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아까 왔던 길 그대로를 걸었기에 다시 거리의 악사들을 볼 수 있었다. 눈 먼 사람도,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모두 어딘가가 불편한 사람들이었는데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전에 하던 노래를 멈추더니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했다. 발소리만 듣고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아나. 만약에 일본인을 보고 한국인으로 알고 허탕 치면? 나도 일본인과 중국인, 한국인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 얼마나 많이 해 봤는지 잘도 구분하더라. 더 웃긴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아리랑의 가락이 아닌 가사만 아리랑이었고 음과 다른 악기들은 모두 신세계였다. 게다가 한 분은 정말 진지하게 안녕하세요를 외쳐대며 가락에 넣었다. 안녕하세요를 얼마나 진지하게 불렀는지 풋 웃어버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더니 칼을 들고 다니던 현지인 ‘두려움의 존제’를 포함한 아까 우리 주위를 둘러싸던 상인들이 다시 몰려왔다. 아까 샀던 아빠의 모자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까의 상인을 찾아서 바꿔달라고 했더니 이 분께서 ‘원 달라’를 더 원하신답니다. 또 다시 nono 거리며 흥정을 했다. -그냥 공정한 발언일 뿐이었다. 그냥 바꾸는 건데 뭘 그렇게 돈을 밝히시나. 아님 현금 영수증을 떼어주던가.- 몇 분을 ‘흥정’하자 그제서야 이 놈은 못 비기겠다는 얼굴로 okok하며 바꿔 줬다. 우리가 흥정을 할 때 nono라고 할 땐 보통 옆에 있는 현지인과 말하고는 하는데 못 알아들어도 욕과 비슷한 부류의 말이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솔직히 바꽁을 다 보고 나오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일정상으로는 하나를 더 가야하는데 도저히 그럴 힘이 없었다. 이런 때에 그 다음 목적지가 먼 곳이어서 차를 타고 멀리멀리 쉬면서 가야하지만 뭐야, 정말 가까웠다. 큰 나무 밑에 차를 세워 놓은 후 발걸음을 땠다. 이 곳 룰루로스는 꽤나 작은 유적지인데도 불구하고 여기 조차도 상인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예희의 모자까지 흥정을 여러 번 거쳐 구입했다. 예희의 모자는 리본이 달린 아가씨 모자였다. 하지만 리본 모자 아래의 예희 얼굴은 더위로 찌든 돼지와 흡사한 얼굴이었기에 뭔가 애매 했다. 너무 더워서, 머리카락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머리는 엉망이었고 사실 머리카락을 신경 쓸 만큼 정신도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나를 그렇게 까다롭게 평가할 사람들도 없는데 내가 무슨 상관? 룰루로스로 가는 몇 안 되는 계단 마저 나에게는 높고 높은 사다리였기에 계단을 다 오르자 숨이 차고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정신이 없었다. 결국에는 바로 앞에 있는 탑도 보지 못하고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주위에 현지인 아이가 두 명 있었는데 우리에게 ‘candy’라고 연속했다. 고개만 절래 절래 흔들 뿐 우리는 너에게 캔디를 주고 싶지만 현재 캔디가 없어서 주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7살이나 됐을 만한 녀석들이 영어를 할 리는 없었고, 더군다나 우리가 캄보디아어를 할 리는 없었다. 걔들은 나보다도 더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울상을 지은 얼굴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색종이도 차에 있고 이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먹을 것은 우리가 먹을 것도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너무 미안했다. 계속 candy를 속삭이는 아이들을 나중에는 무시하고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나는 더위를 먹은 듯 했다. 한국에서의 여름에 아, 진짜 덥네, 내 더위 니나 가져가라고 장난치던 때가 그리울 만큼 그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고 더위를 정말로 먹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더위 먹는 정도가 이 정도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 셋은 나무 아래의 그늘에서 힘 없이 앉아 있었고 아직 힘이 남아있는 아빠는 '홀로' 구경을 했다. 조금 뒤 엄마도 아빠를 따라서 구경을 했고 그 동안 또 나랑 예희는 앉아 있었다. 조금 뒤 엄마 아빠가 돌아 왔다. 이번에도 왓뜨마이에 갔을 때처럼 다른 여행객들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성격 더러운 가이드가 엄마 아빠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나쁜!! 이런 유적지에 로봇 가이드가 있었으면.. -박물관 안의 레코드 같은- 룰루로스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올라올 때와 다름 없는 힘 빠진 몸을 이끌고 내려왔다. 이제 땀은 모두 식었지만 뇌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으로 영이 다 빠져나간 몸으로 나왔다. 고맙게도 바로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이제는 쉬러 갔다. 엄마아빠가 보기에 내가 정말로 더위를 먹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오늘은 점심 동안 호텔에서 쉬면서 있자고 하셨다. 점심거리를 먹기 위해서 엄마의 조사에 따른 마트를 갔다. 이름부터 외국어로 달아 놓은 '럭키 마켓'이란 곳은 온통 외국인들 밖에는 없었다. 마켓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을 넣자 마자 외국으로, 아니, 정상적인 기후의 나라로 온 듯 했다. 외국인들에 맞춰서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싶었다. 아마 여기서 일하는 현지인들은 자주 감기에 걸릴 것이고 오랫동안 일하면 캄보디아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들어왔을 때 안의 온도를 즐기기 보다는 다시 나갈 때의 느낌을 걱정했다.
먼저 빵과 우유 등을 사들였다. 빵도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거였다. 각각 원하는 빵을 고른 후 햄버거를 사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캄보디아에 와서 처음으로 반가운 에스컬레이터도 보고 햄버거 집에 들어갔다. 햄버거의 가격은 사람을 정말 놀라게했다. 우리나라 햄버거의 반값에 가까웠다. 아빠랑 주문을 한 후 아빠는 먼저 내려가고 나는 햄버거를 받아서 내려갔다. 어딜 가도 나는 식사는 달리 하면 안 되나 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외국에 온 지 얼마나 된다고 패스트 푸드에 군침을 뚝뚝 흘렸다. 드디어 마켓의 바깥으로 나왔다. 걱정했던 것 만큼은 덥지 않았다. 그래도 이 더위는 어쩔 수가 없어서 차까지 뛰어갔다. 차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사실 먹는게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모든 곳이 따뜻했기에 아이스크림도 인내 녹아버렸다. 나는 빨리 먹어치웠지만 한국에서도 녹이면서 먹는 예희는 오죽할까.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귀여운 나비 모양의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비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넸더니 이런 것은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비 동생 몫으로 하나 챙겨놨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제 정말 살 것 같았다. 더위 먹었던 그 느낌은 사라졌고 이제는 아까 그 느낌을 되살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국에 가서는 더위에 불평하지 않아야지 했던 그 다짐은 그 느낌이 사라짐으로써 그 더위에 대한 공감이 없어졌기에 함께 사라졌다. 점심은 짱이었다. 우선 한국에서 가져온 엄마의 precious, 땅콩을 먹었다. 햄버거는 맛만 없는 한국의 롯데리아 보다 몇 배는 정상적인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맛도 엄청 있었다. 하나 더 사올 걸 그랬나? 빵도 무진장 맛있었다. 게다가 캄보디아로 오면서 비행기에서 먹으려 했던 컵라면은 오늘 내 더위에 대한 위로 선물로 점심이 되었다. 라면은 어디에서나 맛있다.
이제 배가 정말 부르고 더위까지 가시자 움직이기 싫어졌다. 오전을 회상하며 오후의 여행은 탄탄한 정보와 함께 가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사실 이런 책을 빌려오면 안 되는 건데, 도올 김용옥의 책이었는데 정보는 무슨, 약간의 정보들과 감상밖에는 없었다. 이딴 감상들은 지금 필요치 않다고!! 그리하여 책은 시간 때우기 정도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침대에서 잤고 아빠는 베란다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폼을 잡고선 책을 읽기와 졸기를 반복하였다. 예희는 카메라 앞에서 별 쌩쇼를 다 했고-이 '쌩쑈'는 카메라에 남겼다! 우하하하!- 나는 예희의 쌩쑈를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비와 만나는 시간을 잡아놓을 때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으로 널널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 버렸다. 우하. 아잣, 이번에는 더위 먹지 맙시다!!
분명히 다짐을 하였건만!! 더위를 먹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더웠다. 한국의 날씨가 너무 고마울 정도로..
차를 타자마자 1시간 동안 단잠을 잤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빠를 제외한 우리 3명은 쿨쿨 잤다. 반띠아이 쓰레이에 다와 갈 때 아빠가 깨웠다. 이미 알고 있었던 곳. 씨아씨아. 왕의 옛날 목욕탕이라고 했다. 외부에 덮개도 없는 목욕탕인데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폭도 엄청 넓었고 길이는 몇 백평은 될 듯 보였다. 차로도 10초는 더 가야만 하는 규모였다. 아니, 왕의 목욕탕이라 이렇게 크게 지었어? 갈지도 못 하는 더러운 물로 혼자서 잘도 사용했겠다, 욕심쟁이 왕아.
그리고 여긴 반띠아이 쓰레이다.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도올의 책에서 자세한 정보는 얻어내지 못했지만 몇 개는 알 수 있었다. 몇 여신상들도 책에 있었고 몇 가지의 설명들은 있었기에 책을 들고 다니며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여신상들을 책 속에 있는 여신상과 끼어맞추기를 했다. 사실 맞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많이 틀렸기에 또 보고 또 보고 했다. 이게 맞다, 하고 사진을 찍어놨더니 가는 도중 뭔가 이상하다 생각된다. 그러면 꼭 바로 앞에 정답의 것이 있어서 다시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오전에 내내 손에 들고 다니며 쉴 새 없이 사용했던 손수건은 무척이나 유용했다. 땀이 비오 듯 쏟아졌기에-나는 이 말을 과장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가방에 넣을 새 없이 카메라와 함께 계속 손에 들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오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더운 시간인 1~2시는 피했지만 여전히 더웠다. 여전히 땀이 ‘차고 넘쳤기’ 때문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중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이 이리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참, 깨달은 것도 많아라.-
반띠아이 쓰레이는 유적지 중 유일하게 왕과 관련되지 않은 곳인 신전이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왕과 왕실에 관련되어 있지 않고 신과 관련이 깊은 만큼 또 여신상도 많다. 그 중에는‘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여신상과, 앙드레 말로라는 프랑스 사람으로부터 도난당했다가 다시 돌아 온 여신상도 있었다. 그냥 여기도 긴 감탄 뿐.-사실 얻어 갈 정보가 없어서 감탄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몇 시간을 쉬고 왔는데도 조금 걷다 보니 다시 땀이 물처럼 줄줄 흐른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하고는 들어오는 문 쪽에 앉았다. 지금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게,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돌로 만들어졌다니 놀라웠다. 사실 '들어오는 문'을 출입문으로 쓰려다가 바꾼 이유가 출입문이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열렸다 닫혔다 하는 유리문으로 착각할까봐이다.
조금 뒤 엄마가 한 여자 아이와 책을 파는 남자와 함께 왔다. 책을 파는 남자는 아까 전에도 앞 쪽에서 외국인과 흥정을 하고 있더니 이번 목적은 우린가 보다. 엄마가 이 책이 원 달러라며 살까하며 물었다. 솔직히 이 두꺼운 책이 원 달러일 리가 있을까. 더군다나 얍삽한 현지인이 들고 있는 책인데. 결국에는 이 책의 정가라는 ‘11달러’라는 단어를 듣고야 말았다.
들어갈 때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나올 때는 샤워하고 나온 사람으로. 정신은 이미 내 몸에서 나간 상태에서 없는 정신으로 사진만 찰칵찰칵 찍어댔다. 비가 왕 모시듯 미리 차를 대기 해 놓고 문을 열어놔서 바로 땀을 식힐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이상한 이름의 슈가팜이라는 농장에 가기로 했다. 진짜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가니 조금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톨렌샵에서도 가 봤지만 이번에는 땅 위의 집으로!! 그 근처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우리가 차를 몰고 들어서니 양 옆에서 쳐다봤다. 차를 세우자 앞에서 뭘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무슨 끈적끈적한 물체를 통에 담고 있었다. 비가 말하길 이건 설탕이고 직접 만들어서 판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집들을 구경했다. 집 안은 정말 어둡고 조금했다. 여기저기 식탁 두 개 정도 크기의 방에 부엌 용구들이 있었고 부엌 안 쪽으로 그만한 크기의 방이 보였다. 물론 문은 없었고 늘 그렇듯 개방식이었다. -여기는 도둑이 없는 건가, 훔쳐 갈 게 없는 건가.- 집 옆에는 캄보디아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었던 흔들이‘천’을 타고 어떤 아저씨가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 좋은 날씨에 외국인 없는 이 천국에서, 심지어 외국인이 여러 명 와 시끄럽게 떠들어도 깨지 않을 수 있는 정신력으로, 일 안 하고 쉬고 있는 그 사람은 정말 편안해 보였다.
몇 집을 구경하고 나니 집 아래 뚫린 구멍에 칠판과 책걸상들이 있었다. 칠판에 쓰여있는 날짜는 이틀 전의 날짜였고 책걸상도 그리 많지는 않은 양으로 삐툴빼툴이었다. 이 곳 사람들 중 좀 아는사람들이 가끔씩 수업을 해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학교들도 여기서는 찾아보기 조차 힘든 것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여러 번 느꼈지만 잠시 마음에 담아두고는 마음에서 내쫓아보낸 느낌이었다. 분명히 방글라데시에서도 책에서만 보던 그 풍경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깊은 동정심과 떨림을 느꼈는데.
우리 주위에 우르르 몰린 마을 아이들에게 색종이를 나눠 줬다. 이 근처는 외국인이 오지 않아서 그러는지 아이들은 색종이를 받고 한동안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한 나라 안에서 같은 크고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아이들도 두 분류로 나눠진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공부 못하는, 잘 하는 으로 나눴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돈이라는 것에 이미 더러워진 아이들과 맑고 깨끗한, 순수 그 자체인 아이들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서글펐다. 정말로 우리에게 와서 무언가를 팔거나 구걸하지 않아서 너무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이런 아이들은 때지게 하지 말고 싶다는 생각으로 색종이를 안 주고도 싶었다. 이 아이들만은 저 작은 임시 책걸상에서라도 공부하고 때 묻지 않은, 이 나라의 큰 도움인 문화재와는 멀리 떨어진 아이들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들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모두 슈가팜 트리로써 설탕이 나오는 그 나무였다. 나무가 큼직큼직한게 잘 생겼다라고 생각했건만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나무는 폴 포트라고 볼린다고 한다. 폴이 집권하던 시절에 나무의 뾰족뾰족한 부분을 잘라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 이유가 총알이 아까워서. 그 인간들이 지금 정권에 있던 말던, 지금 정권을 사로잡고 있으니 더더욱 ‘죽일 놈’들이다.
나무 아래에 수도꼭지가 있었고 그 근처에서 아이들이 발을 씻고 있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비에게 내가 캄보디아에 우물을 판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보통 수도꼭지를 사용한다고 한다. 쩝, 그래도 우리가 판 우물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겠지?
다시 나와서 앞에서 만들고 있던 설탕을 샀다. 정말 수작업이었다. 나무에서 나온 설탕을 저어서 하나하나 통에 넣고 또 한 단계를 거친 후에 통에 넣으면 끝이다. 여기 오는 외국인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이쁜 통에 담아 줬다. 나오면서 생각해 봤더니, 아차, 슈가팜이 이 나라 말이 아닌 이 나라 발음으로 변형된 SUGAR FARM이구나.;;
슈가팜의 원래 의미를 알고는 쿡쿡, 이 나라의 발음에 또 한 번 감탄하며 이 길고 긴 하루의 마지막 목적지로 갔다. 이번에는 쁘레아 럽이라는 곳으로 갈 거다. 쁘레아 럽도 별다른 정보 따윈 필요 없다. 우린 우리의 상상력과 감탄사, 즉 감정을 이용해서 우리 나름대로 최고의 여행을 할 거다.
쁘레아 럽에서 일몰을 보기로 했다. 일몰을 봐야하니 위로, 위로, 또 위로 올라가야 했다. 위로 올라가면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를 놓칠 수가 없어서 사진기를 올렸다 내려놨다를 반복하는 데 몇 분이 걸렸다.-나중에 보니 그 때 찍었던 것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 그 좋은 걸 단 한 장도 명작으로 찍어내지 못하다니!!-
위로 올라가 보니 이미 몇십분 전부터 와서 탑들 구경은 다 했다는 모양의 사람들이 죽치고 앉아있었다. 맨 꼭대기 까지 올라간 사람도 있고 중간 쯤 올라간 사람도 있고, 또는 최소한 해가 보일 정도의 높이에서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 두리번 거리다가 아직 일몰이면 멀었다는 생각에 구경을 했다. 한 탑에 들어가니 천장이 뚫려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좀 더 잘 보이는 탑으로 들어가니 어떤 아저씨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천장을 가르키며 돈벌이 해 줬다는 듯이 사진을 찍으라는 모션을 취했다. 사진을 찍고는 반쯤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오려고 하자 나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탑에 들어가자마자 연기가 자욱했다. 앞에는 향을 피우고 있었다. 나한테 부처한테 향 드리랩니다. 고개를 여러 번 절레절레 흔들고는 나를 찔러버릴 것 같은 아저씨의 눈을 뒤로 하고 급히 나왔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거기서 나와서도 한참이나 있다가 그제야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멋있다. 이번에 확실히 카메라 값을 치뤘다. 눈에도 잘 안 보이는 저 일몰을 뚜렷이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몰의 모양과 일몰만을 담으려고 하다 보니 옆의 아름다운 하늘은 한 장도 담지를 못 했다. 지금 그 일몰 사진을 보면 옆으로 조금 보이는 주변의 하늘이 너무 보고 싶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오기 전에 조금 일찍 빠져나왔다. 이미 일몰은 절정에서 떨어졌기에 사람들에 엉켜서 계단에 굴러떨어지느니 빨리 내려오는 게 훨씬 나았다. 사람들이 많이 없어도 계단은 한 칸 내려가기 조차 힘들었다.
이제 오늘 일정은 끝난 건가? 노노, 무슨 섭섭한 소리를. 엄청난 게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바로바로 바로 MY PRECIOUS DINNER이다! KOULE라는 international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비와는 내일도 기사와 손님 노릇을 하기로 약속을 했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이라기 보다는 큰 천막 안에 있는 음식들이었다. 식당은 여기 저기 뚫려 있었고 어디서나 들어와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자리를 모두 잡으니 총 200은 넘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걸 카메라로 찍어야 했는데.. 빨리 앞자리를 잡은 후 뒤로 가서 음식을 받았다. 전 세계의 음식 뷔페집이었다. 한 자리를 잡아서 짐들을 위해서 한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음식을 가져오는 식으로 했다. 사실 여기는 international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나라의 전통 춤인 압쌀라 댄스 공연장이다. 그래서 조금 일찍 식당에 도착한 거고 앞, 뒤가 있는 이상한 식당에서 앞자리를 잡은 거다. 앞은 이미 vip가 예약을 했는지 사람도 없는데 자리를 안 내 줬다. 계산도 얼렁뚱땅이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예약 종이를 보고는 다시 우리에게 주고 갔다. 그게 계산 끝이었다. 나라면 이 예약 종이 가지고 한 번 더 오겠다, 이 무식들아.
음식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세계의 음식이 다 있다고들 하나 서양 음식, 즉 우리가 잘 아는 음식들과 캄보디아 주변 국의 음식들 정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이했던 건 씨앗 수프였다. 액체 안에 씨앗들이 들어있었는데 맛이 특별한 건 아니었지만 씨앗들을 씹는 맛과 푸딩같은 액체의 물컹물컹한 느낌으로 먹었다. 즉석 요리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샌드위치 같은 것이 정말 맛있었다. 다른 음식들은 아무리 외국인의 입맛에 맞췄다고 해도 아직 캄보디아의 냄새가 그대로 났다. 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가-음식을 놓은지 오래됐는지 벌써 차가워진- 있었는데도 음식들이 입에 안 맞아서 하나는 먹다가 토할 뻔 했다. 결국에는 배는 반도 못 채운 채로 공연을 감상했다.
‘정말’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는데 물을 안 준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역시나 엄마의 정보에서부터 알아서 미리 물을 준비해왔다. 물마저 사 마셔야 하는 곳, 이게 무슨 국제 식당이야!
공연은 시작됐다. 좋은 카메라를 둔 덕에 줌을 해서 동영상을 다 찍을 수 있었다. 가장 재밌었던 건 2번째로 했던 ‘물고기 춤’이다. 똘렌샵에서 물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청년들의 장면이었는데 가장 재미있었고 외국 문화에 맞게 리 메이크한 버전인 것 같다.
거기의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생이었다. 음악, 노래, 앞의 소개, 춤.. 공연을 하나 할 때 마다 현지어로 블라블라 거리며 설명을 해 줬는데 똘렌샵과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둠에 싸인 무대 왼쪽 편에서 ‘캄보디아식 오케스트라’와-유적지 앞의 악사들이 연주하던 악기들과 일치했다.- 내 나이도 안 되어보이는 여자아이가 설명과 노래 두 개를 모두 담당하고 있었다. 혹.. 혹시 녹음 하는 걸 모.. 모르는 건가??
공연이 시작하고 나서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맛도 없었을뿐더러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기에 음식을 가지러 가려면 기어서 가야할 판이었다. 무대 앞에는 모두 사람들이 득실득실 했다. 나도 앞으로 쪼르르 달려나가서 동영상 버튼을 딱 눌렀으나 키는 그 순간 이 매정한 밧데리께서 이미 나가셨다는 안내멘트와 뒤의 외국인이 비키라는 말이 들렸다.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될 만한 곳을 교묘히 찾아서 갔건만 옆쪽에도 사람들이 있어서 밧데리가 있었어도 아마 못 찍었을거다.
아, 안내 멘트 중 마지막에 제대로 하나 들을 수 있던 게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하고 귀를 쫑긋 열어 듣고 있던 중 압.쌀.라 라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그러자 엄마가 ‘이제 압쌀라 춤 추는 거야?’;; 도대체 엄마가 이해한 압쌀라 춤과 앞의 ‘fishing 춤’의 차이는 뭘까요.. 마지막 공연은 전통 압쌀라 춤이었고 앞의 공연들도 fishing을 포함해 현대판으로 리메이크한 다름 아닌 압쌀라 춤이었다.
말 충격적인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현지어로 방송되어 왔다고 생각했던 그 언어는 다름 아닌 영어였다. 아.. 하긴 fishing이라는 단어가 교묘하게 여러 번 내 귀에 지나갔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캄보디아의 발음은 위대하다.
공연을 중간 쯤 들었을 쯤에 갑자기 무언가가 우리 식탁 밑으로 스르르 들어갔다. 보니 고양이었다. 앞쪽으로 나 있는 ‘크은’ 구멍에서-구멍이 아니라 그냥 입장문 보다 큰 공간이다- 들어왔나 보다. 우리 테이블에서 옆의 테이블로 건너가 사람들을 무지 놀라게 했다. 엄마가 종업원을 불렀고 그냥 슈슈 하며 내쫓았다. 살다가 살다가 자체 ‘도둑을 위한 개구멍’을 만들어놓곤 고양이를 모시는 식당은 처음 봤다.
그리하여 음식 값은 공연 값으로 다 냈다고 생각하자라고 스스로 주문을 건 후 나왔다. 비에게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집으로 보냈기에 우리는 알아서 툭툭을 잡아야 했다. 다행이-아니, 당연히- 툭툭이 기사들은 식당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마 이 공연 끝나는 시간에 맞춰 우르르 몰렸을 게다.-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우리나라의 택시기사도 툭툭이 기사만큼이나 힘들 것 같다.- 바로 호텔로 갈까하다가 나가사끼 아저씨가 전번에 한 번 오라는 말이 생각나 아저씨가 주신 명함을 들고 한 툭툭이 아저씨에게 이 길을 아냐, 전화 한 통 하게 핸드폰 좀 빌려줄 수 있냐는 두 가지 조건을 걸고 ok했다. 우리가 말한 부탁이었지만 미안하긴 했다. 나 같했으면 됐다고 하고 다른 사람 기다렸을 거다. 결국에는 툭툭이 아저씨가 오래 걸린다고 거짓말을 친 탓에 돈을 좀 많이 주고 타서 쌤쌤으로 미안하지 않게 되었다.
나가사끼 아저씨가 전번에 호텔에 와서 자신의 가게에 오면 맛있는 걸 좀 주겠다고 했다. 아저씨의 자전거 대여와 관광을 같이 하는 가게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한 나라의 안인지라 다른 곳과 불의 밝기는 같았다. 아저씨가 선물도 주시고 약 1시간 동안 우리의 내일 애매한 스케쥴에 대해 도와주셨다. 그리고 내일은 가야할 곳이 많으니-이 말을 듣자 아무래도 피곤한 몸이 내일 고생을 하셔야 하는데 이제 그만 이 긴 어른들의 수다를 끝내고 호텔로 가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혀까지 나왔다- 따로 사먹지 말고 아침에 음식을 사가서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먹은 음식 중 한 번도 입에 맞은 음식이 없었고 게다가 아침에 음식을 사러갈 만큼 일찍 일어나고 그 음식을 찾으러 나갈 자신도 없었기에 별로 반가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한식집을 추천해 주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 전 한국에서 날아온 사람, 게다가 이미 캄보디아에서 한국음식은 첫날에 신나게 즐겼던 사람이 여행까지 와서 한국음식을 또 먹자니 그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사실 캄보디아 음식도 한번 쯤은 즐겨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추천할 만한 것들 몇가지만 써 주셨다. 사실 캄보디아에 오신지도 얼마 안 되신 분이라 음식이나 스케쥴에 대해 확신을 가지신 것 같지도 않았다. 다행히-사실 사람의 예의로써 예상했던 대로- 나가사끼 아저씨가 호텔까지 태워주셔서 다시는 툭툭이를 잡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솔직히 옆에서 보고 있는 나도 이 나라 사람들과 흥정하는 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고마우신 아저씨 덕에 편안히 도착했고 아저씨와 작별인사를 했다.
침침한 엘리베이터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서 엄마 아빠는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그 아저씨는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을 하루에 보면 벅차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다고 했다.
아. 또 하루가 끝났다. 다시 정전이 있었고 모두 잠자리에 누웠다. 오늘, 잠이 잘 오겠지? 내일은 많은 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잠을 불렀다.
다희씨 수고 많았슴다.
읽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모하는데
이 긴 글을 써 내려 간 열정에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