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말에 ‘톨레랑스(tolérance, 영어로 tolerance)’란 단어가 있다. 우리말의 ‘관용’으로는 그 깊은 의미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하는 방식을 존중하는 용어이다. 비록 찬성하거나 동의하지는 못할지라도 상대방은 나와 다른 관점을 혹시 가질 수 있으며 그 관점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 내가 남을 존중하지 않는 한 절대로 나 역시 상대방에게 존중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나름 적용이 되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선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는 다 이유가 있으시다. 비록 장애아로 태어나도 나름 해야 할 사명과 달란트가 있는 것과 같다.

 

어제 삼일기도회에서 살펴본 출23:20-33절에도 나오듯, 성도에게는 하나님 잘 공경하면 바로 복이지만, 혹시 불순종하면 고난을 통한 복이다. 고난도 멀리 보면 일종의 ‘(고난의) 복’인 셈이다. 칼라일은 “경험은 최고의 교사이다. 다만, 수업료가 비쌀 뿐이다.”라고 했다는데, 인간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나아가 깨달아 더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가장 잘못 쓰이는 것 중의 하나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문제도 그래서 많이 발생한다고 본다. 목회자가 되는 길이 사람마다 다 다르듯, 참된 성도에 이르는 길도 다양할 수 있다. 갈수록 다양성을 보이는 현대사회에 매우 중요한 가치이리라.

 

우리가 불교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불교인은 존중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유씨는 물론이고, 옥씨, 천씨, 정씨, 이씨, 박씨, 송씨, 그리고 김씨까지 상대가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 생활방식들도 함께 존중되었으면 한다.

 

이제 7남매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다. 나이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책임을 가진 위치에 모두 다 있다. 이번 명절부터 우리 가족 안에 이런 톨레랑스가 적용되었으면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