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자 배추달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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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6. 07. 07(음) 
순교일 : 1950. 

 
야학에서 한글공부
고등성경학교  
 
배추달은 1926년 7월 7일(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26번지에서 태어났다.

배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본처에게서 두 아들을 낳고 상처를 하는 바람에 둘째 아내 이지순을 얻어 그 몸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추달과 월도였다.

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몸이 약했다. 그럼에도 가정을 이끌어나가려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추달의 어머니 이지순씨가 예수를 믿은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거친 세상 살 수 없어 고난을 당할 때 조카 며느리 하선이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다.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석했다. 그러나 추달은 학교 갈 나이가 되었어도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여 배움의 기회를 노친 배추달은 18세때 해방이 되자 전국 강토에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날 때 매일 밤 국민학교 교실에서 하는 한글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오직 그의 목적은 성경을 남처럼 막힘 없이 죽죽 읽고픈 염원에서였다.

전처의 두 아들이 있는 배한도씨에게 후처로 들어간 배추달의 모친은 추달과 추도 두 아들을 낳고 남편이 죽자 조카 며느리 하선히 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고 아들 추달은 자연적으로 모친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농토라곤 한때기도 없는 모친은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추달을 남의 집에 보내졌고 남의 눈치 밥을 먹으며 농사를 지어주다가 8.15해방을 맞은 것이다.

해방 후 1950년 거창읍교회에서는 주남선목사가 모자라는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주무교사는 남영환전도사였다.

배추달은 모처럼 머슴생활을 그만두고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농사일을 하듯 밤낮으로 밝혀 공부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6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남선목사를 존경하여 그를 닮길를 다짐했다.

고등성경학교를 시작한지 한학기도 되기 전에 6.25가 터졌다. 조기방학을 하고 배운 바를 복습하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온 얼마 후 순경이 나타나 피란 가라고 하는 바람에 추달도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들었으나 공산군에 의해 적포철교가 끊어져 집으로 돌아갔으니 1950년 6월 30일이었다.

고향 화양리로 돌아온 교인들은 묘산국민학교 정운택선생의 인도로 구역예배를 마치고 감자를 먹고 있을 때 인민군이 마을가까이 왔으니 남자들은 피해야 한다는 급한 상황에서 정선생과 추달은 급히 몸을 피해 뒷산에 깊숙히 들어가 숯을 굽던 숯가마로 피해 그곳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다가 20일후 7월 중순 마을로 내려왔다.

내려온 날이 마침 주일날이라 예배를 마치고 났을때 인민군과 치안대원이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선생과 배추달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배추달은 주일에는 일을 안 한다고 거부하자 배추달을 내무소로 데리고 가서 미루나무에 매놓은 돼지를 강 쪽으로 몰고 가자고 했다. 그것도 거부하자 비를 주고 마당을 쓸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부했다. 인민군은 배추달을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추달을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추달이 24세에 살해된 뒤 감동스러운 일이 생겼다. 추달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사경에 얼마씩을 떼어 주인에게 맡겨놓은 벼 한섬과 돈15만원을 주인이 가지고 와서 화양에 교회를 짖기 위해 추달이 맡겨둔 것이라고 내놓아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에게 전해져 남교회는 헌금을 하여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12평의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해 주었다.

그 후 화양교회는 묘산장터로 옮겨져 묘산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배추달은 주일 성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귀한 교훈을 오늘의 교회에 남겨주었다. 


출처: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