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총대 참석기
나는 어릴 때에는 부자집 아들이 최고인줄 알았다. 과거에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부자집 아들은 먹을 것(간식이나 과자)이 풍부함으로 가난한 친구들이 고개를 숙이며 따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것이 최고인줄 알았다. 선생님(혹은 교수)은 물론 친구나 선후배까지 알아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군에 가서는 다 소용없고 계급이 힘이라는 것을 알았고, 결혼하여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우등인간임을 억울하지만 자인하게 되었다. 교역자로 말하면 큰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나 부흥집회 다니는 강사들,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교수, 등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 많은 동료나 이웃으로부터 신뢰(지지)와 사랑을 받는 자가 대단한 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러한 신뢰와 사랑은 인물이 좋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큰 교회당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어느 정도 중간계층까지는 간판, 시험, 머리, 인물, 가문, 등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이상의 위치는 결국 다른 사람의 신뢰와 인정으로 가능하다. 가령 선거직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기타 선거직(도지사, 광역시장, 군수, 구청장, 시의원, 도의원, 군의원), 등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이하 장관이나 각 분야의 고위인사 역시도 임명권자의 눈에 들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총회 군선교 위원회 주관으로 전국 37개 노회장을 초대함으로, 군부대를 시찰한 적이 있다. 거기서 과거 우리 친구인 중령을 한 명 만났다. 그는 현재 공군 전체의 군목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앞으로 조만간 대령으로 진급할 것이라 들었다. 다른 한 군목 친구는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아 결국 소령으로 얼마 전 전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후자인 친구는 이번 총회에서 만났는데 아마 새로운 사역지를 구하고 있는 듯 했다.
대위에서 소령 진급을 비롯하여, 소령에서 중령진급이나 중령에서 대령진급도 먼저는 공석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상위 인사권자의 눈에 들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게 안 되면 어떤 군목처럼 대위로 들어가서 현재까지 14년간을 그대로 대위로 있다가 내년에 역시 대위로 전역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교단 총회 총대는 다 알다시피 각 노회에서 무기명 투표를 실시하여 선출된 분들이다. 무기명으로 선출하기에 누가 누구를 찍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친하게 어울렸던 사람이라고 해서 나를 찍었을 것이라 믿기 어렵다. 부목사도 담임목사를 안 찍을 수 있고, 자식 목사나 자식 장로가 아버지 목사(혹은 장로)를 안 찍을 수도 있다.
간혹 언론을 통해서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이 장관이나 심지어 국무총리까지도 불러서 호통 치는 것을 보았다. 선거직이라는 것이 그만큼 힘이 있다는 말이다. 작년에도 총대로 참석하여 느꼈지만, 이번 총회에서도 그렇게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신학 교수님들이 총대들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이번 총회에서 모 장로님을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금년 만 70세의 나이로 내년부터는 총대로 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장로님은 내가 과거 창녕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의 은퇴권사님 사위이셨다. 그 당시 은퇴권사님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을 때, 이 장로님을 만나 그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다.
당시 내가 강도사였는지 부목사였는지는 오래 되어 모르겠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께서 작은 교회 젊은 부교역자인 나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깍듯한 예의를 갖추심에 아주 기억에 남고 놀라웠다. 그런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이런 저런 교계행사 일로 만났는데, 만나면 자기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하셨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분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다. 상당히 큰 교회 장로님이시며, 30대 중반에 장로가 되셨고, 만39세에 전국 C.E.회장을 하셨고, 40대 중반에 총회회계와 그 후 전국장로연합회 회장까지 하셨다고 들었다. 또 몇 년 전에는 교단 총회 부총회장까지 하셨단다.
이런 분이 작은 교회 부교역자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 후로도 만날 때마다 나를 알아보고는 자기가 먼저 인사하며 나를 예우하였다. 그래서 이번 총회에서는 이 분과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결론은 사람을 한 번 보면 이름과 얼굴을 익혀놓고, 그 다음에 만나면 자기가 먼저 인사하며 정중하게 예의를 다하는 이런 면이 이마 이분의 인생관이자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료’에 대한 처신만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나 아래 사람’에 대한 처신이 그분의 삶의 노하우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대부분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다 잘한다. 가령 중령이 같은 계급의 중령이나 아니면 대령들에게는 당연히 잘하거나 예의 있게 처신할 것이다. 적어도 소령들에게도 잘 할 것이다. 그러나 중령이 하사관이나 병들(이병, 일병, 상병, 병장)에게까지 잘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자주 자신이 유명하거나 잘나가기에, 젊은 부교역자나 이름 없는 농촌교회 목사를 우습게 여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별로 덕 볼 일이 없다 싶을 때에는 관심도 안 가지고 무시하다가, 자기들이 아쉬울 때에는 전화상으로 많이 부탁하고 친절하게 해도, 막상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 또 다시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떨어지고 나서도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아니면 전화상으로는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부탁하면서, 막상 만나면 여러 번 만났을지라도 얼굴을 기억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대화를 해도 건성으로 하다 다른 사람이 오면 금방 매듭도 짓지 않고 떠나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나도 모른 척하거나, 내 쪽에서 아는 체를 하려고 해도 일부로 모른 척 피하는 분들도 있다.
화장실 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면 한 번은 선거에 어쩌다 당선될지 모르나 그 다음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거나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란 말도 잊어버린 것 같다.
오늘날 갈수록 가정이 불화하고 이혼율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부부간의 결혼생활도 그렇고, 직장에서 동료간의 관계도 그렇고, 목사가 목회를 하거나 동역자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결국 인간의 최종적인 힘(능력)은 학벌이나 가문이나 외모가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얼마만큼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절대적인 인정(지지)을 받느냐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사랑, 신뢰, 인정, 지지는 결국 자기희생과 손해(내가 먼저 밥 한 그릇 사거나, 돈을 먼저 쓸 수 있는 자세), 상대방에 대한 양보와 배려, 겸손과 지혜로운 처신, 말과 행동의 신중함, 약속을 지키는 성실, 자기 위치와 임무를 충실히 묵묵히 잘 감당하며, 고난과 오해 혹은 모함이 와도 말없이 잘 견디고, 특히 자기에게 별로 유익이 안 되거나 자기를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등의, 한 마디로 하자면 인격(personality)이라 본다.
나는 클 때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나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하여 듣거나 깊이 배운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에서도 그저 하나님 교회 열심히 충성하라는 말만 많이 들으며 신앙 생활한 것 같다. 이제 나 자신 역시 남은 생애 이런 부분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길 것이고, 나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나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들려주고 싶다(끝).
총회를 통해 좋은 것을 얻어서 감사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