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고신 2월호 “나누는 이야기(아버지)”에 실린 원고, 그러나 원본과 달리 너무 많이 수정되고 잘려서 원본을 올립니다.

겨울 새벽의 부상(父想)                                                   
                                                                                        
                                                                             영남노회 신광교회 유영옥 목사아내


  나의 아버지는 이맘때이면 늘 가사 없이 부르시는 찬송가의 흥얼거림과 함께 겨울 새벽의 찬 공기를 한 아름 몰고 여닫이문을 열고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십니다. 이불 밑에는 뜨끈뜨끈한 구들장의 열기가 그 새벽까지 있기에 나는 풀을 먹여 빳빳한 무명천의 이불깃을 끌어당기어 그 찬 기운을 막으며 선잠으로 아버지의 향취를 느끼곤 했습니다.

  어머니를 도와서 무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무를 썰거나 때론 마늘 종자를 준비하시며 아침 뉴스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그 손놀림 소리와 무 씹는 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서 사각거리는데, 설날 전에는 한 말 이상 되는 가래떡 써시는 아버지의 칼질 소리도 빠질 수 없는 기억입니다.

  집에서 교회까지의 2.5km 거리를 아버지는 늘 그렇게 새벽을 깨우며 다니셨고, 또한 마을 앞산에 혼자 오르셔서 산기도도 많이 하신 걸로 기억됩니다. 찬송이 생활화되신 당신은 일터 근처만 가도 그 낭랑하고 맑은 찬송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 열리는 부흥사경회에서 비록 세련된 음과 박자는 아니어도 온 회중에게 눈물의 은혜를 끼치셨다고 합니다.

  군 복무 시절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말씀의 은혜보다는 당신이 부족하게 느끼셨던, 너무나 말을 잘하시는 그 목사님처럼 자신도 말을 잘 하고 싶어서 믿게 되었다는 그 고백의 말씀은 우리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삼사 십년 전 대부분의 시골 교회가 그랬듯이 공부중인 교역자들이 비우게 되는 주중의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를 도맡으시면서 이러한 소망을 만회하게 하셨습니다.

  11남매에도 불구하고 일찍 혼자되신 아버지의 외로움, 학교 문 앞에는 가보지도 못하셨던 그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가난함, 그리고 부모님과 집안 친척들에게 숱하게 받으셨던 핍박들. 하지만 자신이 물려받은 고독과 무지와 가난을 자식들에게만은 없어지게 해 달라는, 아니 대물림 하지 않으시겠다는 각오의 기도를 하시며, 4남 3녀를 두셔서 그 외로움을 자식들에겐 모르게 하셨으며 열심히 개간하고 사두었던 많은 전답을 칠남매 공부시키시느라 다 팔아서 무지를 물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일에는 미리 옷을 챙겨 밭머리에 가져다 두시고 시작 전까지 일하시다 밥은 굶으시고 예배하러 가시며 그렇게 신앙을 지키셨고, 주중에는 한여름 온 동네 분들이 정자나무 아래서 한담할 때도 쓸데없는 가시나들 공부시킨다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새벽별이 지기 한참 전부터 일을 시작하셔서 저녁달이 떠오르고도 한참 지나서까지 흙과의 전쟁을 기쁘게 하시며, 당신의 자식들은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그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이 겨울에 더욱 그립기만 합니다.

  그 외에도 이른 아침에 아궁이의 재를 치고 불을 지피시거나 공동 우물을 사용하던 시절엔 물을 길어 물독을 채우시는 어머니에 대한 배려, 가마솥에 세수 물을 데워서 우리들을 깨워 얼굴까지 말갛게 씻겨 주시던 그 세심한 사랑은, 그 분에겐 기독교인으로서의 노동관과 가치관이 분명하셨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에도 저녁식사는 하지 않으신 채 수요기도회 참석하여 마치고 돌아오시다 두 분이 같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막내 외에는 모두 공부를 마친 뒤라 이제는 효도도 받으실만한데 자식들에게 그마저도 짐이 될까봐 황급히 그렇게도 소원하시던 하늘 아버지의 품에, 돌아갈 고향으로 가셨지만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수고만 하셨기에 늘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는 못 다한 불효가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기도소리가 우리 일곱의 가슴마다 아직도 울리고 있기에 섬기는 교회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선 위치에서 오늘도 모두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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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고신에 올라온 글


겨울 새벽의 부상(父想)
                                        
  나의 아버지는 이맘때이면 늘 가사 없이 부르시는 찬송가의 흥얼거림과 함께 겨울 새벽의 찬 공기를 한 아름 몰고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셨다. 이불 밑에는 뜨끈뜨끈한 구들장의 열기가 그 새벽까지 있기에 나는 풀을 먹여 빳빳한 무명천의 이불깃을 끌어당기어 그 찬 기운을 막으며 선잠으로 아버지의 향취를 느끼곤 했다.

  집에서 교회까지의 2.5km 거리를 아버지는 늘 그렇게 새벽을 깨우며 다니셨고, 또한 마을 앞산에 혼자 오르셔서 산기도도 많이 하신 걸로 기억된다. 찬송이 생활화되신 당신은 일터 근처만 가도 그 낭랑하고 맑은 찬송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 열리는 부흥사경회에서 비록 세련된 음과 박자는 아니어도 온 회중에게 눈물의 은혜를 끼치셨다고 한다.

  군 복무 시절 우연히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말씀의 은혜보다는 너무나 말을 잘하시는 그 목사님처럼 자신도 말을 잘 하고 싶어서 믿게 되었다는 그 고백의 말씀은 우리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삼사 십년 전 대부분의 시골 교회가 그랬듯이 학업중인 교역자들이 비우게 되는 주중의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를 도맡으시면서 이러한 소망을 만회하게 하셨다.

  주일에는 미리 옷을 챙겨 밭머리에 가져다 두시고 시작 전까지 일하시다 밥은 굶으시고 예배하러 가시며 그렇게 신앙을 지키셨고, 주중에는 한여름 온 동네 분들이 정자나무 아래서 한담할 때도 동네아이들 공부시킨다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늦은 저녁시간까지 흙과의 전쟁을 기쁘게 하셨다. 당신의 자식들은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그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이 겨울에 더욱 그립기만 하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에도 저녁식사는 하지 않으신 채 수요기도회 참석하여 마치고 돌아오시다 두 분이 같이 천국으로 가셨다. 막내 외에는 모두 공부를 마친 뒤라 이제는 효도도 받으실만한데 자식들에게 그마저도 짐이 될까봐 황급히 그렇게도 소원하시던 하늘 아버지의 품에, 가셨지만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수고만 하셨기에 늘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는 못 다한 불효가 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기도소리가 우리 일곱의 가슴마다 아직도 울리고 있기에 섬기는 교회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선 위치에서 오늘도 모두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글/유영옥/신광교회 이승병 목사 사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