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에는 "보도연맹"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네요.
보도연맹학살사건은 한 여름이네요. 큰아버지는 추운 때 돌아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신 것이 이제 생각납니다.

큰아버지는 19살쯤에 돌아가셨다고 하신 것 같아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있은 후 남한에서도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토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광산에서도 사람들이 징, 꽹과리, 북 등을 치면서 장터로 내려 갔습니다.
장터, 지서 앞의 큰 다리에 들어서려고 굽은 길에 들어서는 순간 순사들이 총을 쏘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누군가 먼저 나가기를 바랬답니다.

같은 날이 아닐 수 있지만, 창촌에서 묘산면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했답니다.
그 당시 창촌이 면소재지였던 것 같습니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대구쪽인가 거창쪽에서 순사들이 차를 타고 와서는 집회를 하는 사람들을 행해 총을 쏘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망을 하게 되었는데 좁은 길을 지나며 앞에 사람이 한사람 넘어져 뒤에 따라 오던 사람들도 차례로 그 위에 넘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은 산으로 해서 우리 동네로 되돌아 왔는데, 큰아버지는 권빈쪽으로 도망을 하게 되었답니다.
권빈쪽에서 청년단체에 잡혀서 빨갱이라며 몽둥이로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 때가 겨울쯤이라 많이 추웠다고 합니다.
큰아버지를 때리고는 근처 개울에 던지고,
큰아버지가 아프고 추워서 청년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 근처로 기어서 가면 또 마구 때려서 개울에 던지고, 이를 반복했답니다.

그 집회가 있은지 며칠이 지나도 큰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였습니다. 결국 권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가셨는데, 큰아버지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맞아서 온 몸이 산산조각이라 그 시신을 추스리는 데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유가재실에 서당이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서당에 못다니게 했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아버지, 제가 형님 몫까지 더 일할테니 형님 서당에 다니게 해 주세요"라고 하셔서 큰아버지는 서당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때 아버지 나이가 거의 10살쯤이었다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선비이자 농민이었던 큰아버지를 무작정 빨갱이로 몰아붙혀 몽둥이로 죽음을 맞게 하다니, 혼돈의 시대가 안타깝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아래 글을 발견했습니다.
>읽는 순간 문득 아버지에게서 들은 큰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창촌에서 있었던 일, 장터 다리 근처에서 있은 일, 권빈에서 있은 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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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묘산면 학살사건은 1950년 7월 21일부터 27일까지 경찰 등이 거창군 보도연맹원 35여명을 경남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와 권빈재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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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1일(음력 6. 7)부터 7월 27일(음력 6. 13) 사이에 지역내 보도연맹원을 거창경찰서에 연행 한 후 인민군이 거창에 들어오기 전에 1차 20명이 합천군 마령재에서, 2차 35명이 합천군 권빈재에서 정당한 재판도 없이 학살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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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거창군 보고서
>
>* 출처 : http://haxalgy.jinbo.net/bbs/zboard.php?id=youngnam&no=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