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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가 계속되던 10년 전인 1994년 7월 20일.
다음날은 우리 7남매가 고향인 합천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일찍 서울에서 내려온 언니부부는 조카를 엄마께 맡기고 해인사로 놀러 갔고, 근처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나는 바삐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바깥마당에서는 아버지께서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고 계셨고, 놀러 갔다가 돌아오신 엄마는 조카를 업고 그것을 요리하기 위해 마당가에다 솥을 걸고 장작불을 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얼음이 없으니 옆집에서 얻어 오라고 하셔서 더운 날 근무하고 온 딸을 위해 우묵 냉국을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께서 만들어 주신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이야!
길고 더운 여름날이 어둠살을 내리자 언니부부가 되돌아 왔고 저녁을 준비하는 우리를 뒤로 하고 부모님의 자가용이었던 경운기를 타고서 두 분은 수요기도회를 참석하러 떠나셨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자매의 이야기마당은 늘어졌고, 밤 9시가 훨씬 지나도 도착하지 않으시는 부모님 걱정에 이야기도 시들해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부산에서 초등하교 교사를 하던 여동생이 막차를 타고 오면 면소재지에 부모님이 가셔서 함께 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더 긴장 되었다.
“여보세요?”
“언니...”
긴장, 또 긴장.
“언니, 교통사고가 났는데, 나는 괜찮지만 부모님은...”
그 다음은 모르겠다. 뭐라고 했는지.
하나님 제발,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붙어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발, 제발, 제발.
그러면서 그 동안 근무하며 보아 왔던 갖가지 형태의 교통사고 환자가 떠올랐다.
면내에 있는 서 너 곳의 택시 집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아무데고 차가 없다.
다행히 옆집에 혼자 사시는 아지매네 아들이 와 있는 생각이 났다.
10시가 지난 시각. 이미 불이 꺼져 있는 옆집을 체면 차릴 생각도 없이 두드렸다.
사고지점. 면소재지에서 집을 향하는 오르막길에 아버지의 경운기가 승합차를 짊어지고 앞머리는 심하게 비틀린 채 누워 있었다. 그 광경만 봐도 상태가 짐작 되었지만 애써 외면해 보았다.
아버지, 안됩니다. 제발,
수없이 다녔던 30분도 되지 않는 병원까지의 거리가 수십만 리나 되게 느껴졌다.
응급실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엄마가 침대차에 누우셔서 인공호흡기를 의지하고 계셨다. 오, 하나님,
나는 응급실 바닥에 엎드려졌다.
틀렸구나. 이미 봐 온 뭇 환자들의 경우를 경험했던 터라 직감적으로 엄마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소변 줄로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아랫배는 불러오고... 직원 가족이라 당황한 조무사가 잘못 끼운 소변 줄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다시 제 자리에 끼웠으나 여전히 소변은 나오지 않고 혈압은 떨어지고 있었다.
상태가 더 심각한 아버지는 대구의 대학병원으로 이송한 터였다.
보호자도 없이 대구로 간 아버지께 나더러 가 보란다.
이미 엄마도 가망이 없는 줄 알지만 나는 엄마 없이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면 엄마는 영안실에서 나를 맞을 것을 알기에. 너무나 완강한 내 고집에 엄마를 모시고 대구로 향했다. 이미 천국에 가 계셨을 엄마의 몸뚱이만 싣고서.
대학병원에 도착하니 따로 보호대를 친 침대에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코와 귀로 수없이 피를 흘리시며. 서넛의 의사들이 둘러서서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제는 이 환자를 어느 과로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너무 심한 상처로 도무지 과를 정하기 힘들다는 그런 얘기였으리라.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거즈를 얻어서 물을 묻혀 쉴 새 없이 피가 흐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 예순 세 해를 고생만 하신 육신을 쉬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아는 그 분의 걸어온 삶의 자국들이 지나간다. 예수 믿는다고 수없이 당한 고난, 수모, 핍박들이. 그래서 언제나 천국을 사모하셨던 그 분.
대충 의논이 끝났는지 의사 한명이 가망이 없으니 모셔가란다. 그야말로 아버지가 이 땅에 남기시는 마지막 유품 같은 피가 계속 흐르는 것을 뒤로 하고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그 밤의 하늘은 유난히 까맣고 높았다. 한없이 원망스러운 한탄이 내 입에서 계속 되었다.
바보, 바보. 난 감히 부모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끝없는 통곡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해 봄, 아버지는 큰오빠에게 전화하셔서 돈 30만원을 보내라고 하셨단다. 아버지의 설명은 간단했다. 너희들이 갑자기 큰일을 당하면 당황할 터이니 묘 자리를 봐 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빠가 보내 온 돈으로 아버지는 꽤 높은 산으로 굴삭기를 세 내어 나무를 베 내고 땅을 다지는 것도 모자라셔서 두개의 묘 구덩이를 파 놓으셨다. 산사람 구덩이 파 놓는다고 엄마는 다시 파묻는 등, 난리를 치셨단다.
늘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낫고, 천국에서 영원히 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그래서 ‘우리구주 그리스도 다시 세상 오실 때’를 늘 즐겨 부르시더니. 그래 아버지 속 시원하십니까?
엄마 당신은 무에 그리 바쁜지 잠은 장사 다니는 차에서 보충하실 정도로 일만 하시더니 이리 가시려고...
바보, 바보 같은 당신들.
서른이 넘도록 시집 못 보내 안달이던 나를 두고 가신 바보들.
구급차 두 대에 한 분씩을 싣고 집 근처, 그리고 내가 근무하던 병원으로 돌아왔다. 대구에서 실컫 울고 나니 눈물도 나지 않는다.
사인을 판정하기위한 x선 촬영이 시작되었다. 육의 양식은 굶고 영의 양식은 마지막까지 드시고 가신 두 분의 평안한 승리자는 그렇게 차가운 지하 냉동실로 들어가서 장례를 기다리셨다. 늦게 서울에서 도착한 오빠들을 보니 또 눈물이 났다. 큰오빠는 아무도 스스로나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갖지 말자고 다독이셨다.
너무 덤덤해진 나.
연이어 계속되는 폭염 속에 사흘 뒤 장례식이 있었다.
그 병원 개원 이래 처음인 두 부부의 동시 사망에 가장 거대한 기독교식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해 온 병원 사람들이 다 나왔나보다. 두 대의 영구차가 사고지점을 지나는데, 도로위에는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곳.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앞. 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반긴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에 다녀오셔서 ‘내 죽으면 누가 나를 환송할까’ 하시더니. 마을 앞 공터에서 상여를 만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객사하여 집에도 못 들어간다고 저주 받은 죽음이라 하겠지만. 부모님은 자식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계산이셨으리라.
굽이굽이 녹음 짙은 들판 길을 지나 평생 동안 땅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전부를 바쳤던, 그리고 육신의 마지막을 안주할 그 곳을 향해 하얀 꽃으로 단장한 한 쌍의 상여가 남아 있는 성도들의 찬송을 배경 삼아 산허리를 오르고 있었다. 이 땅의 수고를 그치라고 부르신 하늘 아버지의 환영 속에 ,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이 모습을 두 분은 보고 계셨을까?
반지하나 하시는 것도 마다하신 아버지의 두 번째 욕심은 석관이었다. 생전의 유언대로 석관에다 수많은 사람의 환송식을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계셨겠지?
그 가뭄 속에 7남매나 되는 자식들 당황할까봐 파 놓은 묘 자리에 관이 내려가고 붉은 천에 십자가가 그려진 천이 덮이고 우리들의 시삽식. 잠시의 오열. 그러나 끝이었다. 부모님의 한 생은 그렇게 마쳐졌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그 여름의 시골집은 나를 늘 이방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내리쬘 여름 햇빛, 시멘트 칠한 틈새로 비집고 자라는 잡초들,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 없어 상해가는 집, 아픔 그 자체이다. 잠시 잠깐 출타한 듯 착각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골짜기의 두 개의 산소는 또 다른 아픔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다.
다음날은 우리 7남매가 고향인 합천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일찍 서울에서 내려온 언니부부는 조카를 엄마께 맡기고 해인사로 놀러 갔고, 근처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나는 바삐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바깥마당에서는 아버지께서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고 계셨고, 놀러 갔다가 돌아오신 엄마는 조카를 업고 그것을 요리하기 위해 마당가에다 솥을 걸고 장작불을 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얼음이 없으니 옆집에서 얻어 오라고 하셔서 더운 날 근무하고 온 딸을 위해 우묵 냉국을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께서 만들어 주신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이야!
길고 더운 여름날이 어둠살을 내리자 언니부부가 되돌아 왔고 저녁을 준비하는 우리를 뒤로 하고 부모님의 자가용이었던 경운기를 타고서 두 분은 수요기도회를 참석하러 떠나셨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자매의 이야기마당은 늘어졌고, 밤 9시가 훨씬 지나도 도착하지 않으시는 부모님 걱정에 이야기도 시들해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부산에서 초등하교 교사를 하던 여동생이 막차를 타고 오면 면소재지에 부모님이 가셔서 함께 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더 긴장 되었다.
“여보세요?”
“언니...”
긴장, 또 긴장.
“언니, 교통사고가 났는데, 나는 괜찮지만 부모님은...”
그 다음은 모르겠다. 뭐라고 했는지.
하나님 제발,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붙어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발, 제발, 제발.
그러면서 그 동안 근무하며 보아 왔던 갖가지 형태의 교통사고 환자가 떠올랐다.
면내에 있는 서 너 곳의 택시 집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아무데고 차가 없다.
다행히 옆집에 혼자 사시는 아지매네 아들이 와 있는 생각이 났다.
10시가 지난 시각. 이미 불이 꺼져 있는 옆집을 체면 차릴 생각도 없이 두드렸다.
사고지점. 면소재지에서 집을 향하는 오르막길에 아버지의 경운기가 승합차를 짊어지고 앞머리는 심하게 비틀린 채 누워 있었다. 그 광경만 봐도 상태가 짐작 되었지만 애써 외면해 보았다.
아버지, 안됩니다. 제발,
수없이 다녔던 30분도 되지 않는 병원까지의 거리가 수십만 리나 되게 느껴졌다.
응급실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엄마가 침대차에 누우셔서 인공호흡기를 의지하고 계셨다. 오, 하나님,
나는 응급실 바닥에 엎드려졌다.
틀렸구나. 이미 봐 온 뭇 환자들의 경우를 경험했던 터라 직감적으로 엄마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소변 줄로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아랫배는 불러오고... 직원 가족이라 당황한 조무사가 잘못 끼운 소변 줄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다시 제 자리에 끼웠으나 여전히 소변은 나오지 않고 혈압은 떨어지고 있었다.
상태가 더 심각한 아버지는 대구의 대학병원으로 이송한 터였다.
보호자도 없이 대구로 간 아버지께 나더러 가 보란다.
이미 엄마도 가망이 없는 줄 알지만 나는 엄마 없이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면 엄마는 영안실에서 나를 맞을 것을 알기에. 너무나 완강한 내 고집에 엄마를 모시고 대구로 향했다. 이미 천국에 가 계셨을 엄마의 몸뚱이만 싣고서.
대학병원에 도착하니 따로 보호대를 친 침대에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코와 귀로 수없이 피를 흘리시며. 서넛의 의사들이 둘러서서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제는 이 환자를 어느 과로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너무 심한 상처로 도무지 과를 정하기 힘들다는 그런 얘기였으리라.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거즈를 얻어서 물을 묻혀 쉴 새 없이 피가 흐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 예순 세 해를 고생만 하신 육신을 쉬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아는 그 분의 걸어온 삶의 자국들이 지나간다. 예수 믿는다고 수없이 당한 고난, 수모, 핍박들이. 그래서 언제나 천국을 사모하셨던 그 분.
대충 의논이 끝났는지 의사 한명이 가망이 없으니 모셔가란다. 그야말로 아버지가 이 땅에 남기시는 마지막 유품 같은 피가 계속 흐르는 것을 뒤로 하고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그 밤의 하늘은 유난히 까맣고 높았다. 한없이 원망스러운 한탄이 내 입에서 계속 되었다.
바보, 바보. 난 감히 부모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끝없는 통곡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해 봄, 아버지는 큰오빠에게 전화하셔서 돈 30만원을 보내라고 하셨단다. 아버지의 설명은 간단했다. 너희들이 갑자기 큰일을 당하면 당황할 터이니 묘 자리를 봐 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빠가 보내 온 돈으로 아버지는 꽤 높은 산으로 굴삭기를 세 내어 나무를 베 내고 땅을 다지는 것도 모자라셔서 두개의 묘 구덩이를 파 놓으셨다. 산사람 구덩이 파 놓는다고 엄마는 다시 파묻는 등, 난리를 치셨단다.
늘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낫고, 천국에서 영원히 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그래서 ‘우리구주 그리스도 다시 세상 오실 때’를 늘 즐겨 부르시더니. 그래 아버지 속 시원하십니까?
엄마 당신은 무에 그리 바쁜지 잠은 장사 다니는 차에서 보충하실 정도로 일만 하시더니 이리 가시려고...
바보, 바보 같은 당신들.
서른이 넘도록 시집 못 보내 안달이던 나를 두고 가신 바보들.
구급차 두 대에 한 분씩을 싣고 집 근처, 그리고 내가 근무하던 병원으로 돌아왔다. 대구에서 실컫 울고 나니 눈물도 나지 않는다.
사인을 판정하기위한 x선 촬영이 시작되었다. 육의 양식은 굶고 영의 양식은 마지막까지 드시고 가신 두 분의 평안한 승리자는 그렇게 차가운 지하 냉동실로 들어가서 장례를 기다리셨다. 늦게 서울에서 도착한 오빠들을 보니 또 눈물이 났다. 큰오빠는 아무도 스스로나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갖지 말자고 다독이셨다.
너무 덤덤해진 나.
연이어 계속되는 폭염 속에 사흘 뒤 장례식이 있었다.
그 병원 개원 이래 처음인 두 부부의 동시 사망에 가장 거대한 기독교식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해 온 병원 사람들이 다 나왔나보다. 두 대의 영구차가 사고지점을 지나는데, 도로위에는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곳.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앞. 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반긴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에 다녀오셔서 ‘내 죽으면 누가 나를 환송할까’ 하시더니. 마을 앞 공터에서 상여를 만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객사하여 집에도 못 들어간다고 저주 받은 죽음이라 하겠지만. 부모님은 자식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계산이셨으리라.
굽이굽이 녹음 짙은 들판 길을 지나 평생 동안 땅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전부를 바쳤던, 그리고 육신의 마지막을 안주할 그 곳을 향해 하얀 꽃으로 단장한 한 쌍의 상여가 남아 있는 성도들의 찬송을 배경 삼아 산허리를 오르고 있었다. 이 땅의 수고를 그치라고 부르신 하늘 아버지의 환영 속에 ,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이 모습을 두 분은 보고 계셨을까?
반지하나 하시는 것도 마다하신 아버지의 두 번째 욕심은 석관이었다. 생전의 유언대로 석관에다 수많은 사람의 환송식을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계셨겠지?
그 가뭄 속에 7남매나 되는 자식들 당황할까봐 파 놓은 묘 자리에 관이 내려가고 붉은 천에 십자가가 그려진 천이 덮이고 우리들의 시삽식. 잠시의 오열. 그러나 끝이었다. 부모님의 한 생은 그렇게 마쳐졌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그 여름의 시골집은 나를 늘 이방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내리쬘 여름 햇빛, 시멘트 칠한 틈새로 비집고 자라는 잡초들,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 없어 상해가는 집, 아픔 그 자체이다. 잠시 잠깐 출타한 듯 착각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골짜기의 두 개의 산소는 또 다른 아픔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다.
누나 글을 읽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눈시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