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라


  저는 좀 특별한 가훈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기 투고자들은 모두 고명하신 분들이었지만 저는 한 목회자의 아내로서 이 투고란이 어색하지만 꼭 하고 싶은 것이기에 감히 써 보았습니다.

 


  나의 아버지 류대수 장로


저의 아버지는 군대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이미 준비된 핍박은 시작되었습니다. 가정과 집안의 반대와 핍박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11남매를 두셨던 조부모들은 아버지 위의 큰아버지와 단 두 아들 외에는 모두 잃은 상태였는데, 그 큰아버지마저 6,25 사변 때 오해로 공산당으로 몰려 총살 당하셨다고 합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형님을 위해 배우는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똑똑한 분이었나 봅니다. 큰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이던 이복아들(사촌)을 저의 어머니께서 키우셨지만 어릴 때 잃어야 했답니다. 하나 남은 아들인 저의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자 7살 때부터 지기 시작한 지게와의 씨름은 더 한층 힘겨운 싸움이 되었습니다. 조부의 심한 반대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지게를 지고 가서 들에서 일하시다가, 식사도 그른 채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교회에 가야 했답니다.

고약한 성질의 당숙들은 사흘이 멀다하고 저희 집을 찾아와서 기물을 부수거나 온갖 폭언으로 행패를 부리며 아버지를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저를 임신한 엄마의 배를 차기도 할 정도로 그 정도는 지나쳤습니다. 또한 씨족 마을인지라 다른 먼 집안 사람들로부터 심한 욕설이나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는 혼자서 일하시는 들을 찾아간 저에게, 당신을 핍박하던 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얼굴에서 영적 승리자가 보여주는 평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순교자 배추달 집사를 낸 거창노회의 관기교회에 초대 장로로 임직 받아 잦은 교역자 이동이 불가피한 시골교회를 한평생 지키시며 섬기셨고, 한 때는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주일 설교로 봉사하기도 하실 정도로 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셨습니다.

 

  어떤 것이 믿는 자의 모습인가? (내가 물려받은 가난과 무지와 고독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


당신은 아주 자상한 가장이요, 아버지요. 교육자요, 신앙인이셨습니다. 더구나 완벽한 개혁가셨습니다.

상수도 시설이 되지 않았을 때는, 어머니보다 먼저 일어나서 마을 아래쪽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지게로 물을 지고 와서 밥 지을 아궁이의 재를 다 치고는 불을 지피셨고, 커다란 가마솥에는 칠 남매를 위해 따뜻한 세수 물을 데워 두셨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식사 준비를 도와 밥솥의 불을 봐 주시는 등 함께 정감을 나누기도 하셨죠. 마을에서 제일 먼저 펌퍼 시설(개인 우물)도 하셨는데, 직접 우물을 파셨답니다.

같이 정감을 나눌 형제가 없는 외로움을 아셨기에 7남매를 두셔서 자식들은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고독의 한을 물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역시 부모님께서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부름을 받았을 때 우리들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고 힘과 위로가 되었었습니다.

큰오빠가(현 신대원 교수)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서 「첫째 신앙, 둘째 건강, 셋째 공부」를 복창하고야 등교 할 수 있었고,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있음에도 대구로 유학을 보내는 열성도 있었습니다. 항상 신앙을 첫째로 삼고 무장시키신 것이죠. 온 마을 사람들이 쓸데없는 가시나들 공부시킨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고등학교부터는 모두 타처로 보내어 고등교육을 받게 해 주신 것은 복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들이 벌어주는 돈이나 쓰면서 삼복 더위에 다른 사람들은 정자나무 밑에서 쉴 때도, 엄동설한에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농사일을 손에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바른 성수주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죠. 또한 노동은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요, 도구였던 때문입니다.

신앙을 최우선으로 삼으시던 아버지의 기도에는 언제나 일곱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고, 언제나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그 날은 수요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기도회를 마치고 타고 가신 경운기로 부산에서 막차를 탄 동생을 데리고 오셔서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걸려온 동생의 전화. “사고가 났는데, 아버지 엄마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울먹이는 소리였습니다. 육신의 양식은 굶고 영의 양식은 마지막까지 드시고 가신 아버지의 삶.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랬겠죠?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예배당에 다녀오다가, 자식 공부시킨다고 고생만 죽도록 하더니, 그것도 객사까지? 칭찬 받을 일은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이제는 자식들 효도를 받을 만도 한데. 오히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싶어 그리도 급하게 가셨습니다.

그 해 봄에는 길도 나지 않은 산허리까지 굴삭기를 세 내어 산소 할 자리를 다듬고,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너희들이 당황할까봐 미리 준비한다면서 묘 자리의 구덩이를 파 놓을 정도로 당신들의 마지막을 준비하셨습니다.

육신이 너무 고달파서 주일날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보다 한숨 눈 붙이는 것이 더 좋다고, 그리고 언제나 천국을 사모하며 찬송을 끊지 않으셨던 당신. 그 은혜로운 육성들을 남겨두고 가셨기에 오늘도 우리들은 당신과 함께 호흡하고 있습니다.


   일곱을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이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라)                       


당신이 물려받은 가난과 무지, 고독을 자식들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단으로 오늘 우리들은 믿음에 굳게 섰습니다. 특별히 잘 사는 사람은 없지만 밥을 굶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끊어지지 않는 한 소리가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시며 빠뜨리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기도,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게 해달라던 간절한 기도소리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지 늘 고민하는 우리에게 내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 민족과 교회를 위한 외침이 곧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겠지요.

저희는 한 달에 한번씩 가족의 소식지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홈페이지에서 수시로 소식을 나누기도 하지만 우리 ‘일곱을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소식지를 통해서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고난의 삶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것의 표제로 “이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살라“를 삼고, 우리의 부모님이 한 평생 몸 바친 땅 ”저건네”가 월간지의 이름입니다. 소식지를 통해서 아버지의 신앙을 되새기며 그 음성을 우리 칠남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끝)

 

아버지의 예수 영접: 군대 등 혹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은 없나요?

이것은 월간고신에 투고 할까 하고 썼지만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오래전에 써 둔 것이지만 부모님 10주기 특집호에 올릴려고 하다가 오늘 읽어보고 저건네 홈에 올려 둡니다.